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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9.16 [13:02]
이슬람의 태동과 십자군 운동
중세교회사 6
 
서요한

주님 승천 이후 지금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지만, 그 중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놓고 전개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십자군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역사 속에 수천, 수만 개의 전쟁이 있었으나 우리를 그토록 긴장시킨 전쟁도 일찍이 없었다.
 
이슬람의 태동과 확장
 
불교, 힌두교, 기독교와 함께 세계 4대 종교 중의 하나인 이슬람교는 이들 중 가장 늦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슬람은 전세계 약 12억의 신자와 함께 세계 도처로 신속하게 확장되고 있다. 622년 아라비아에서 마호메트에 의해 창설된 이슬람교는 코란을 중심으로 그의 생존시에 폭발적으로 발전하였다. 640년에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장악하였고, 예루살렘에 모스크를 세웠다. 650년경에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스페인을 경유하여 유럽으로 확장하였다. 그 후 동·서방으로의 확장은 717∼718년에 레오 3세와 732년에 투르에서 카를 마르텔의 군대에게 패함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453년, 결국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초대 교회 이후 독점적 위치에 있던 기독교는 이슬람교의 강력한 도전으로 갈등과 대립, 반목과 투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의 역사적 배경
 
이슬람의 정복 정책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계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성지 예루살렘과 아시아, 서부 유럽 및 아프리카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9세기경에 이곳을 점령하여 온갖 착취와 만행을 일삼았다.

한편, 유럽은 10∼11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발전, 급속한 인구 증가로 새로운 활기가 넘쳤으나, 11세기로 넘어오며 비잔틴 제국은 내외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국고가 탕진되었고, 지방 귀족 세력이 확장하면서 군대의 핵심인 자유 농민이 예농화되고, 중앙 정부의 약화가 현저해졌다. 이때, 이슬람의 동부 이동으로 셀주크 투르크족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여 1055년에 바그다드를 점령,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은 1071년에 그들을 공격했으나 만찌커트전쟁에서 참패하였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고, 셀주크 투르크족은 소아시아를 점령하여 니케아를 수도로 정한 후 새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였다.
 
 당시 이곳 소아시아는 비잔틴 제국의 경제 요충지이자 병역의 원천이었으므로 손실이 막대하였다. 따라서 비잔틴의 부흥을 다짐한 당시 콤네누스(comnenus) 왕조의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 1081∼1118년)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투르크족에 대항할 것을 요청하였다. 우르반 2세는 이를 전격 수용하여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소집된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의 설교에 감동된 참석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이 전쟁을 원하신다고 확신하였다. 결국 서구 기독교인들의 활력과 강렬한 신앙심이 함께 어우러져 전 유럽이 전쟁에 가담하였다. 참전을 위해 모여든 군중과 기사들은 저마다 가슴에 붉은 십자 표지를 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원정으로 기독교인들은 회교도가 장악한 지중해 지역인 서유럽의 스페인과 시칠리아, 팔레스타인을 되찾고자 하였다.
 
십자군 운동이 실패한 원인
 
 그리스도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소박한 신앙 열정과 함께 시작한 여덟 번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권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으나, 엄청난 손실과 함께 실패하고 말았다. 이유는 통일된 지휘 체계의 부재(不在)와 십자군에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상호 이익에 대한 의견충돌 때문이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자들 중 기독교에 헌신된 자들은 종교적 열정에 의해, 정치적 야욕에 의해 왕들은 반항적인 귀족들을 전쟁을 통해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고 귀천(貴賤)을 막론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기대, 개인적인 영예와 욕심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였다.
 
또 하나는 전쟁의 승리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도자들은 교황청에 쇄도하는 비난을 외부로 돌리고자 십자군을 소집하였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사면과 세속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지리적으로 빼앗긴 기독교 성지를 회교도의 손에서 탈환하여 자신들의 독립된 봉건 왕국을 건설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끝으로 장기간 계속된 전쟁에 수많은 사람의 희생뿐만 아니라 군비와 해군력을 제대로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군비 충당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기도 했으나, 종교적 목적이 군사적 목적과 혼동되어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그 결과 성지 탈환을 통해 얻으려던 종교적 열망이 식어지고, 재물의 약탈을 위한 불순한 동기가 작용하여 전쟁은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 이로써 성지 탈환은 실패하였고, 결국 교황권이 급속히 쇠퇴하며 봉건 제후의 몰락을 가져왔다.
 
십자군 운동의 의의
 
 십자군 원정은 초대 교회 이후 서구 유럽의 기독교권을 이교로부터 구출하려는 이상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열렬한 것 중의 하나였다. 이 운동의 참여자들은 기독교 성지의 회복을 위해 정열과 생명, 모든 재산을 바쳐 헌신했다. 따라서 십자군 원정은 역사상에 있었던 신앙적 경건과 모험, 기사도, 교황권 같은 교회의 권력 추구, 정치적 음모, 경제적 이해관계 등이 독특하게 결합된 사건이었다.
 
처음 이들의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던 모슬렘을 물리쳐 비잔틴 제국을 구원하고, 동서방으로 분리된 교회를 재결합하려는 일련의 구원 운동에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십자군의 참여를 영혼 구원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신도들을 선동하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로써 분열된 동서 교회의 화합은 상호 이질화를 낳았으며, 그렇지 않아도 세속화의 경향을 보이던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다. 하지만 이 운동은 당시 참여한 모든 자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이상과 현대적 교훈
 
 우리는 여기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 소위 성전(聖戰)을 합리화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는 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불의와 부정이 자행되고 있는가? 당시 십자군에 참여했던 수많은 기사들과 젊은이들은 지도자의 유혹에 끌려 귀환하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단지 소박한 인간적 열정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려는 인간들의 야망을 보게 된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의의 나라는 이렇게 건설되지 않는다. 오직 겸손과 온유, 관용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칼로 싸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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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1/18 [21:1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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