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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6.25 [00:11]
중세를 적신 평화의 오아시스, 수도원
중세교회사 5
 
서요한

‘황혼을 비추인 작은 불꽃’ 혹은 ‘평화의 오아시스’로 불리는 수도원은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 거주장소였다. 이곳은 세상에 있는 교회와 함께 중세 교회를 떠받친 또 하나의 기둥으로,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가난과 정절, 순종을 서약한 후 개인의 신앙 정진과 성결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수도생활의 성경적 실례
 
일반적으로 세속화되면 사람들은 방탕생활에 쉽게 빠져든다. 그러나 바른 종교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절제하며 금욕적 신앙에 힘을 쓴다. 이 같은 사실은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성경이 지속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다. 구약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개인이나 단체의 금욕주의적 전통을 중시하였다. 그 중의 대표적인 나실인 서약은 술과 정결치 못한 것들을 제한하는 현세적 의미의 절제의식이었다.
 
실제로 구약의 모세(출 19:1∼25)와 삼손(삿 13:3∼7), 사무엘(삼상 3:1∼4:1), 엘리사의 선지 생도(왕하 6:1∼7), 다니엘과 세 친구들(단 1:8∼21), 청결파 그룹 레갑의 자손들(렘 35:6∼7)과 신약에서의 세례 요한(마 3:1∼12)과 예수님의 제자들(마 10:1∼42), 사도 바울(행 9:10∼19) 등은 좋은 예라 하겠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예수님도 광야(마 4:1∼11)에서 40일간 금식하셨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들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신앙적 경건을 위해 고독한 생활을 했으며, 메시아로서 예수님도 광야에서 기도하며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셨다.
 
수도원의 교회사적 발전
 
사도 시대 이후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교세 신장과 확산을 가져 왔다. 그러던 중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집단 개종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교회는 급속한 교세 확장으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여 가난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교인 증가와 물질의 팽창으로 교회는 세속화 현상이 현저히 나타났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특징을 상실하고, 성도는 성도로서의 의무를 망각하였다. 지나친 자유에의 갈망은 부패와 타락을 자초하였고, 교회는 오히려 세인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던 일단의 교인들과 성직자들은 부패한 교회 현실과 세속생활을 거부하고, 인적이 드문 광야나 깊은 산에 들어가 독립적으로 수도생활을 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수도사 그레고리 1세의 교황 취임 이후 중세 가톨릭 교회의 놀라운 특징이 되었다.
 
특히, 십자군운동이 한창일 때는 부유한 자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토지와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하였다. 혹 죽어 돌아오지 못할 때는 남은 재산을 모두 수도원에 귀속토록 조치하였다. 이는 수도원을 짓는 자는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를 세우는 것처럼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건축 규모도 대단하여 1245년 클루니수도원은 교황과 프랑스 왕,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들, 그밖에 모든 수행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시설을 갖추었다. 왕들과 귀족들은 사는 동안 여행길로 수도원을 찾았고, 죽으면 그곳에 묻히기를 원하였다.
 
중세 수도원의 여러 형태
 
중세 수도원은 지역상 동방과 서방으로 나뉘어 각각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동방 수도원은 실제적인 경향을 띤 서방보다는 매우 엄격하게 규칙에 따라 생활하였다. 이들은 자기 부정의 전제 아래 육체를 징벌하는 등 금욕생활에 힘썼다. 그리고 고독한 은둔생활을 이상적으로 취급하였으며, 성욕의 제거를 위해 육체를 기진하게 하거나 과도한 경쟁과 금욕주의를 실시하여 육체를 심하게 혹사하였다.
 
이와 달리 서방은 영혼과 함께 육체의 실질적인 훈련으로 세계 복음화의 도구가 되고자 하였다. 특히, 10세기 경 세속 권력의 증대로 교회가 타락하자 몇몇 개혁적 수도회가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는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된 클루니수도원, 시토회와 탁발, 갈멜수도회가 있다. 결국, 중세 수도원은 단순히 어떤 세속적인 동기나 목적보다는 무한자에 대한 추구와 모든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경멸에서 기인했음을 보게 된다.
 
중세의 개혁적 수도원들
 
먼저, 클루니수도원은 중세 교회의 세속적 관습을 거부하고 개혁의 선봉에 선 수도원이었다. 베네딕투스회를 기반으로 출발한 시토수도회는 자기 부인, 가난, 간소함, 은둔과 순결생활, 그밖에 뛰어난 농업기술생활로 유명하다. 이들의 개발된 농업기술은 당시 허기지게 살았던 유럽 사회의 문명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수도생활의 질서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성직복과 교회 가구들을 포함한 전례를 간소화하였다.

한편, 탁발수도회는 십자군전쟁으로 정신생활이 느슨해 진 때에 탁발(托鉢)을 통한 청빈한 삶을 추구하였다. 이들 중에는 1210년과 1216년에 창설된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 1247년과 1256년에 창설된 갈멜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은둔보다는 공동체생활로 사도적 청빈과 교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였다. 이들이 이처럼 청빈을 강조한 것은 개인의 소유뿐만 아니라 일체의 공유권도 포기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정책은 당시 도회지의 가난하여 버림받은 자들에게 큰 효과를 제공하였다.
 
중세 수도원의 공헌
 
신앙생활이란 구속받은 백성이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초기의 그리스도에 대한 숭고한 신앙 전통에서 떠나 형식화,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원은 중세 교회를 정화하고 개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교육자요 의사로, 농업 지도자요 예술가로, 학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림 그리는 수도사를 통해 르네상스 미술을 태동케 하였고, 수녀의 손에서 아름다운 면직물을 생산하였다. 수도원 학교에서는 신앙에 정진하고, 공적으로 대학을 설립하여 학문 연구와 실천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수도생활은 순교와 맞먹는 효과가 있다고 믿고, 엄격히 조직화된 규율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중세에 이르러 정신, 문화생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리 시대의 사명과 역할
 
중세 수도원은 급속히 타락해 간 세상 속의 교회와는 달리 금욕, 절제하며 온갖 불의와 유혹을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사수하였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중세 신앙의 성지요 보루였던 옛 수도원의 정신을 따라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하겠다. 끝없는 자기 개혁과 쇄신이 없이는 몰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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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1/11 [09:0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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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개
간추린 교회사
연재이미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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