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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9.16 [17:02]
자아종교로 가는 길, 코엘류 문학의 매혹
포스트모더니즘을 담고 있는 문학 <연금술사> 비평
 
추태화
 



다시 문학에 묻는다, 너는 누구냐?
 
지금은 디지털 시대이다. 디지털에 의존하여 기억을 저장하고, 생각하고, 대화하며 ‘인간성’을 나눈다. 디지털은 그러나 차가운 기계일 뿐, 거기에는 감성도 감정도 스며들 틈이 없는 무색무취의 금속이다. 따스한 피를 가진 인간이 냉혈적인 기계를 통해 체험을 나눈다는 것이 역설(paradox)이다. 전자책이니 e-literature이니 하는 디지털 문학 분야가 탄생하긴 했지만 문학은 아직 따스함을 가진 인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연금술사     ©뉴스파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문학은 그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음이 확실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이 문학에도 불어와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의심하고, 부정하고, 심지어 파괴적으로 해체하려 한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정면에서 가톨릭과 기독교 교리를 비판하고 있기에 뚜렷한 반기독교 정서를 읽을 수 있지만, 본래 허구(fiction)로 구성되는 문학은 작품에 따라 그 전략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코엘류의 허구 역시 그러한 속성을 띠고 있다. 최근 많이 읽히고 있는 코엘류의 『연금술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코엘류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담고 있으며, 역으로 코엘류는 이 작품으로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스트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




연금술의 매력으로
 
『연금술사』는 스페인 남부 한 지방에 목동으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순박한 청년 산티아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떻게 산티아고가 고향을 떠났으며, 우여곡절의 삶을 살았으며, 꿈에 ‘계시된 피라미드’를 찾아 갔는지. 소설은 산티아고가 겪은 내면 세계의 성숙을 통하여 현대인들에게 ‘삶이란 이런 것이다’는 삶의 지혜를 잔잔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성인동화이다. 동화가 그런 것처럼 이야기(narrative)는 사실주의적인 서사기법에 의존하지 않고 상당 부분 독자의 환상에 호소하고 있다. 예를 들면 목가적인 산, 모래바다처럼 펼쳐진 사막, 그 가운데 오아시스 등이 그렇다. 여기서 독자들은 자신들이 몸부쳐 살아가고 있는 살인적인 현대사회의 환경으로부터 탈출감을 맛보게 된다.
 
여기에 연금술이라는 신비한 마법과 같은 기술이 등장한다. 연금술은 보통 금속을 금과 같이 보이도록 변화시키는 기술이다. 이 기술이 소설에서는 생의 예술(art of life)로 비유된다. 현대인들이 생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 상상한다면 생의 연금술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단어임에 틀림없다. 납이나 철은 보통 쇠붙이를 금처럼 번쩍이게 만드는 기술. 이 연금술은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인생을 금처럼 빛나게 만드는 생의 연금술로 은유되고 있다. 일상의 권태스러운 반복과 경쟁에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 연금술의 의미는 마치 사막에서 만나는 신기루와 같고, 애타는 목마름을 해갈케 하는 시원한 물과 같이 보여진다. 연금술의 매력, 자기만의 생의 예술로 현실에 투신하라는 속삭임은 코엘류의 메시지이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어느 누구도 너를 도와줄 수 없다. 오직 자신을 믿고 우주가 선물하는 표식(sign)을 따라 한 발자국 씩 나아갈 때 인생은 의미의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코엘류가 발견한 연금술은 그렇게 소설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그는 말한다, 교회는 낡았다고
 
작가는 자신이 세운 인생의 연금술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목동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작품을 자세히 읽으면 이 목동은 베두인 유목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소설은 곳곳에 성경적 모티브를 산재시키므로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족장들의 순례의 삶을 알레고리적으로 중첩시키려는 느낌을 준다. 아브라함, 멜기세덱, 십일조, 우림과 둠빔 등등. 코엘류에게 기독교적 배경이 깊게 배어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코엘류는 광활한 사막 속으로 산티아고를 들여보낸다. 사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연단을 받았던 현장이 아닌가. 하지만 산티아고는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난다. 그 출발 지점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래된 교회이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산티아고가 출발을 선언한 곳은 “버려진 낡은 교회”에서였다. 그 교회의 “지붕은 무너진 지 오래였고, 성물 보관소 자리에는 커다란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소설 첫 부분에서 만나게 되는 이 문장을 교회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고 지목한다면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고 거꾸로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엘류가 얼마나 예술적으로 그것을 장치해 놓았는지 나중에 오히려 경악하게 된다. 소설 마지막에 산티아고는 다시 그 “버려진 낡은 교회”에 돌아온다. 그러나 순박한 목동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순박한 자신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얼마나 자비로운지 새삼 신의 뜻에 고개”를 숙이는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신봉하는 신앙인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이렇게 자신에게 되물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신학교에서 신을 찾겠다는 걸까?”
 
s.베케트가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기다림에 지친 현대 서구인들, 기독교인들을 희화했다면 코엘류는 서구의 기독교를 낡은 지붕을 가진 버려진 교회로 형상화 하고, 오래되어 퇴락해 보이는 기독교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아의 신화를 좇으라
 
산티아고가 외지로 여행을 떠난 것은 우연히 꾼 꿈 때문이었다. 그 꿈이 하도 신기해서 점쟁이 여인을 찾는다. 그리고 피라미드가 있는 이집트로 떠나는 것이 신이 내린 예언임을 믿게 된다. “인생을 살맛나게 해주는 건 꿈이 실현되리라고 믿는 것이지.” 산티아고의 아버지는 그가 신부가 되길 바랬다. 하지만 본인은 목동이 더 좋았다. 현인으로 보이는 노인은 이런 말을 해준다. “어쨌든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산티아고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기성세대가 원하는 것을 해야하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가여운 존재. “어리석게도 사람들에게는 꿈꾸는 것을 실현한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한 거야.”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신의 꿈은 상실하고, 남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타인의존적 존재.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무척 빨리 배우는 것 같아. 아마도 그래서 그토록 빨리 포기하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게 바로 세상이지.” 이러한 상황에서 온 우주가 꿈과 신념을 가진 자에게 어디로 가라는 표식(sign)을 준다는 말은 기도의 응답처럼 들린다. 미지의 땅을 향해 자아의 신화(self-mythos)를 찾아 길을 떠날 수 있었던 산티아고의 용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신앙, 자아종교를 세우다
 
여행길에서 산티아고는 영국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찾는 연금술사를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된다. 사막에 은둔하여 지내는 현인 연금술사는 이런 가르침을 말한다. “연금술이라면 그대도 이미 알고 있네. 만물의 정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 만물의 정기가 우리 각자를 위해 예정해둔 보물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걸세.”
 
산티아고는 사막을 지나는 여행을 통해, 마치 한 편의 순례여행을 하는 듯했다. 목동의 삶에서 사막과 우주를 꿰뚤어 보는 혜안을 가진 현인으로 거듭나는 듯했다. 목동의 내적 성장은 연금술사를 만나면서 절정에 이른다. 그가 지나온 길들은 모두 신에 의해 예정된 표지를 따라 온 것이며, 그것을 이슬람 용어로 “마크툽”이라 했다. 모든 것은 신에 의해 결정되었다. 인간은 단지 그 길을 말없이 갈 수 있을 뿐이다. 산티아고는 서서히 자아의 신화를 지나 우주와 합일되는 한 새로운 종교를 만나게 된다. 자아종교(self-religion)가 그것이다.
 
소설에서 보듯 코엘류의 문학적 상상력은 서구의 기독교적 배경에서 시작한다. 『연금술사』는 몇 가지 기독교적 코드와 그 비유가 들어 있다. 산티아고의 여행은 믿음의 족장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순례길에 언듯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갔다면, 산티아고는 자아의 내면에서 울리는 우주적 계시를 따라 갔다는 점이 분명히 구별된다. 생의 의미를 찾아 발버둥치는 현대인들에게 연금술이란 매력적인 용어임에 틀림없다. 자아의 신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현대인들의 내적 강박관념을 연금술이라는 이미지로 녹여낸 것 또한 예사롭지 않다. 누구든지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산티아고처럼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길 바랄 것이다. 그런 수사학적인 차원에서 생의 연금술은 수긍할만하다. 하지만 소설은 자아종교를 가지라고 설득한다. 나아가 한 자아가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그 기원이 이뤄지도록 돕는다는 상상은 범신론 함정에 속한다. ‘나와 우주가 하나이다’는 느낌은 ‘인간이 신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멀지 않다. 소설의 설정이 사회와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는 동화 속에서 그려지고 있다. 문제는 동화가 현실을 모두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동화적 세계관이 기독교 사실주의(christian realism)에서 역사와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태화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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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1/03 [11:4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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