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파워인터뷰생활/건강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9.09.23 [03:02]
통일을 논하기 전에 기억부터 치유하라 !
영화<웰컴투 동막골 > 감상기
 
추태화
말도 안되는 영화 동막골


한국어에 종종 등장하는 관용어에 이런 표현이 있다. “말도 안돼!” 관용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의 하나이다. “말도 안돼!” 어떤 경우에 쓰는 것인지 그 용례를 살펴볼작시면 ‘이해가 잘 안갈 때나 억지를 부리는 경우라고 여겨질 때’ 쓰는 용어이다. 영화 동막골(박광현 감독, 정재영, 신하균, 강혜정, 임하룡 주연)을 본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한 장면.     © 뉴스파워

“동막골, 말도 안돼!”


뭐가 말이 안된다는 것일까. 영화에 관해 뭔가 가타부타 말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분명 영화를 봤다는 증거가 성립될 것인즉, 만약 영화도 안보고 그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벗어나는 행위일 것이다. 어느 철학자는 “대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말도 안돼라고 말하는 것보다 때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고상한 행위일 수 있다. 더 솔직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를 적어도 두 번을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도 말이 안된다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동막골, 말도 안돼!라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설정은 어땠든지 그것은 시나리오나 감독의 마음이니 할 말은 없다. 동막골은 1950년 9월의 배경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났다. 동막골은 그곳 주민들이 쓰는 말투가 특이한 것으로 보아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이 아닌가 한다. 강원도가 아니래도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그런 오지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은 순박한 산골주민, 아니 거의 화전민에 가까운 이들로 보인다. “밥은 먹었드래요? 밥은 먹고 하시래요!” 여기서도 예의 그 놈의 밥타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땅에서 생명 연장하는데는 어떤 낯선 우유 제품보다 앞선 것이 밥이 아니었던가. 밥을 따라올 생명 연장의 꿈이 있다면 어디 나와보라고 하드래요! 동막골 촌장님의 막강한 카리스마도 그놈의 밥에서 나온다. “뭘 좀 멕여야지!”


1950년 9월이라면 육이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한 민족이던 남과 북이 철천지 원수가 되어 싸움판을 벌이던 때였다. 인민군 군관 리수화는 전쟁의 시작을 그렇게 인정한다. “우리가 쳐내려왔서.” 남쪽에서는 맥아더를 위시한 연합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북진을 서두르고 있고, 북쪽에서는 중공군의 개입이 눈 앞에 있을 때였다. 전쟁은 사람들에게 제복을 입혀서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도록 가르쳤다. 전쟁에는 아군과 적군이 있을 따름이고 죽느냐 죽이느냐는 두 가지 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전쟁에서 관용이란 아예 성립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군 소위 표현철, 민상사, 인민군 군관 리수화, 그리고 두 명의 인민군,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적이 된 상태에서 동막골에 들어온다. 이에 앞서 불시착한 미군 소속 조종사 스미스가 보호받고 있었다.


얼핏보면 동막골의 설정은 화해할 수 없어 보이는 적들이 한 곳에 모여 어떻게 살육의 난장판을 벌인 것인가 실험하는 실험무대가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액션도 아니고, 스릴러도 아니고 ‘뭐, 적과의 동침?’ 그게 가능하냔 말이다. 그것부터 기분 나빴다. “빨갱이 새끼들 다 죽여버려”라는 심판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뭐, 동막골에서의 동침?’ 그건 말도 안돼. 우릴 쳐들어온 놈들과 한 마을에 있는 것만도 견딜 수 없는 판에 어째 적과 한 솥 밥을 먹는단 말이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그 처절했던 현실을 어찌 잊을 수 있느냐는 반문이다.


두 번째 말도 안되는 설정은 또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다. 그것은 거의 관객모독 수준이었다. 관객모독은 또 뭐드래요? 연극을 관람하러 입장하는 관객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극진한 대우가 보장된다. 관객의 감정을 결코 침해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그것이다. 관객의 감정을 강요할 수 없다는 연출상의 기법이다. 관객이 웃던지 울던지 그것은 관객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관객의 상식에 벗어나는 일은 무대에 올리지 않는다는 철칙이 존재한다. 아직까지 관객에 대한 예의는 유효하다. 그런데 동막골은 어떤가. 관람객의 상식을 무참히 깨버린다. 예를 들면 인민군이 인간적이다. 세상에 인간미를 지닌 인민군이 어디 있을 수 있는가. 거꾸로 국군은 모두 용감하고 인정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워왔다. 한마디로 국군은 ‘좋은 나라’고, 인민군은 ‘나쁜 나라’다. 그동안 이념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게 국군은 언제나 착한 사람들이고, 인민군은 언제나 악한 사람들이어야했다. 헌데 동막골에서는 어떤가. 인민군이 뱀을 무서워할 정도로 인간적이고 주민들을 도와주는 선행국(善行國) 출신의 좋은 나라로 등장한다. 반면 국군 소위는 명령불복종, 탈영에 자살까지 시도하고, 문상사는 시시콜콜 불평을 늘어놓고 제 욕심을 채우다 뒷전으로 물러나려는 양아치 수준으로 평가절하된다.


세 번째 말도 안되는 설정은 또 있는 듯하다. 그것은 연합군이다. 미군으로 대표되는 또 하나의 좋은 나라가 도대체 어쩌자고 양민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부락을 전쟁논리로 무차별 공격을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군은 남한에서는 절대적 선의 한 표상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우리는 미군에게 신세를 지고 살아왔던가. 그 사실을 잊었는가. 이런 배은망덕한 상상력이라구. 파렴치한 반미세력들 같으니라구. 한 구석에서 양심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부 관객에게 그 소리는 양념에 불과하다고 본다. 연합군은 대대적인 폭격기를 내세워 적이라는 가상의 목표물을 향해 폭탄을 내리 붓는다. 적막강산은 불바다가 되고. “으째 사람이 그래요. 인사할 때 작대기를 들이대고 그래요?”
▲과거를 잊지 못하던 세대의 기억, 체험, 한(恨)을 일거에 뒤흔드는 반전 깊은 영화다.     ©뉴스파워


그래서 영화 동막골은 불편했다. 동막골은 그런 면에서 어떤 관객들을 (요즘 청소년들이 쓰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대따’ ‘졸라’ 기분 꿀꿀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동안 였던 것이다. 반전이 심하면 충격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그들은 동막골이 말도 안되는 영화라고 몰아붙였던 것이다.


 
때가 차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가. 세월이 약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거대한 역사의 품에서 전쟁과 반목으로 얼룩진 상처와 아픔들이 하나씩 속살을 드러내고 생기로운 살갗을 드러낸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야말로 생명이 태동하는 자연스런 흐름이 아니던가. 돌과 암벽을 지나 거칠어진 격류와 격류들이 산 아래로 내려와, 거대한 바다를 앞에 두고 강 하류에서 숨죽이는 형상과 같다. 1950년이라는 시간과 2005년이라는 시간의 만남은 그랬다. 1950년이 격류요 격량의 시대였다면 오늘 2005년은 바다의 시대이다. 모든 것을 품에 안고 한없이 울다가 어느 순간 기쁨으로 비상하는 그런 시대이다. 그 때가 바로 오늘이다.


1950년대가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무시무시한 광신(狂神)이 세계 곳곳에서 죽음의 카니발을 벌리고, 사람을 희생제물로 요구하던 때였다면, 2005년대는 화합과 상생의 살맛나는 멍석을 펼치고 모든 이웃들을 불러다 신명나게 어깨춤을 덩실대는 그런 살판의 마당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도서 3:1-8). 그렇다 1950년대가 우리에게 죽을 때요, 죽일 때요, 헐 때요, 울 때요, 슬퍼할 때요, 미워하고 전쟁할 때라면, 2005년대는 날 때요, 치료시킬 때요, 세울 때요, 웃을 때요, 춤출 때요, 사랑하고 평화할 때이다.


때가 차매 동막골이 열린 것이다. 과거에는 누구도 그 살판의 공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자 해도 발견할 수 없었다. 깊은 산중을 내집처럼 드나드는 심마니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아주 신령스럽다는 산신령조차 그런 평화의 마을 동막골로 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산신령 왈, ‘그런 곳이 있다면 내가 가서 살겠다.’ 그랬을 것이래요. 아니 동막골이 문을 꼭꼭 닫고 열지 않았다. 때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동막골은 무의미한 마을일 테니까. 때를 기다리지 않은 자들에게 동막골은 한낱 소똥냄새나 나는 촌구석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이상(理想)은 결코 헛된 꿈이 아니었다. 때가 차매 동막골은 숲 속 초롱에 불을 밝혀 자신에게 오는 길을 알려주었고, 때가 차매 동막골이 사립대문을 활짝 연 것이다. 그 시간이 거의 반백년이 걸린 셈이다. 어쩌자구 우리는 쉽게 찾을 수도 있었을 동막골 가는 길을 오십 년 가까이 헤메었던 것일까. 우리가 그만큼 우매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역사의 심판이었을까. 하지만 오늘 우리는 행복하다. 동막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 말이 되네 동막골


동막골은 반전을 가득 품고 있다. 동막골이 말도 안된다고 언성을 높이던 사람들에게 동막골은 웃기는 난장(亂場)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마을에 들어서는 양쪽 군인들이 경직되어 있었던 것처럼 동막골 밖에서는 그랬다. 그들은 동막골 안에서 처음 조우했을 때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대치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무슨 얄궂은 장난인가 싶어 장단을 맞춰주는 척했지만 결국 그들은 처마 밑에 앉아 비를 피하고 실실 미소지으며 제복의 군인들이 대치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들 한 듯싶다. ‘어찌 우리 마을 애들도 저리 쌈박질 안하는데, 다 큰 어른들이 철없는 아 보다 못하게스리 저렇게 싸운대요?’


그들은 경계의 이쪽 저쪽에 있었다. 그들은 팽팽한 힘의 논리에 철저하게 굴복당했고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극한의 대치상황은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결국 수류탄을 터뜨리게 된다. 희생정신을 발휘한 국군 소위가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막으려 한다. 다행히 수류탄이 터진 곳은 곡간. 곡간은 불길에 휩싸이고 하늘로 치솟은 옥수수 알은 팝콘이 되어 눈처럼 마을에 내린다. 동막골에서나 가능한 그림이다. 동막골 주민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같은 뻥튀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관객의 마음에도 감정이입이 이뤄진다. 역설 속에 숨기운 아이러니이다.


동막골은 경계 너머에 있었다. 동막골 밖에는 경계로 인해 긴장이 풀리지 않는 곳이다. 그곳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대립하고, 연합군이 또 어디엔가 합세하여 힘의 균형을 깰 양으로 이동하는 곳이다. 힘의 균형은 마을 아낙의 말에서 시화(詩化)된다. “이 쪽은 2:1이잖아요. 치사하게.” 동막골 사람들은 전쟁도 알지 못했고, 소총도 막대기로 알고, 권총을 들이대고 위협을 해도 화도 내지 못하는 그런 순박한 이들이다. 그들에게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니, 혁명이니, 편가르기, 정치적 살인이니 하는 말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마을 밖 문명은 동막골에서 숙성된 자연성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이들처럼 막자라라는 뜻으로 동막골이 되었다는 말에서 막자란다는 의미는 푸르고 깊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때에 동막골 풍경은 불가능 그 자체였다. 어떻게 국군과 인민군이 총부리를 내리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마루에 앉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방금 전까지 살기를 품고 서로 쫓고 쫓기던 자들이 속죄하는 마음을 갖으며 감자를 캐고, 덤벼드는 멧돼지를 힘을 합쳐 잡으며, 비오는 처마밑에 앉아 이바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가 형, 아저씨 하며 한 방에서 뒹굴고 낮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깊은 밤 저들끼리 바비큐 파티를 열 수 있단 말인가. 그림이 이상하드래요. 그래도 마음은 짠 하드래요.

동막골에선 시간이 멈춘다. 아니 시간이 거대한 치유의 손길로 사람들을 만지기 시작한다. 국군이나 인민군, 그리고 그들을 영화라는 화면으로 들여다 보고 있는 관객들, 모두는 기억의 희생자들이다. 그 기억은 일명 색깔론으로 채색되어 있다. 동막골을 채색한 그런 자연의 색깔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혼합되어진 그런 칙칙한 물감이다. 국군의 카키색, 인민군의 땅색이 그렇다. 동막골 밖에는 색깔론의 영원한 회귀가 존재했었다.
 
니체(nietzsche)적 언어를 빌자면 권력의 영원한 회귀(ewige wiederkehr der macht)라고나 할까. 회귀를 거듭할수록 퇴화를 반복하는 색깔논쟁으로는 분단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했다. 남쪽은 미군의 앞잡이, 북쪽은 모두 사악한 빨갱이라는 이원론적 대립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에는. 그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끊임없는 반복을 계속해 왔다. 아니 복제의 복제를 계속해 왔다. 그래서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시는 과거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기억에 지배당하는 저주의 기억이 되었던 것이다. 기억 자체가 진실이 될 수 없음에도 말이다. 기억의 재생산은 그렇게 이 땅을 저주의 공간으로 퇴화 시켜오지는 않았는지.

1950년과 2005년은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그동안 족보처럼 애지중지 품에 안고 살아온 우리 자신들의 기억 속에 기억을 먹고 자라난 분노와 복수, 저주와 심판의 고리를 끊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국군과 인민군은 대치하다가 결국 동막골에 피해를 입히고 만다. 예전같으면 그들은 끝장을 보고 말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곳은 동막골, 거대한 포용의 손길로 감싸안는 힘에 그들은 드디어 옷을 갈아입는다. 국군도, 인민군도, 모두 군복을 벗는다. 동막골에서는 제복을 벗게 되어있나 보다. 그들은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빨랫줄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제복들은 하릴없어 보인다. 푸른 하늘, 푸른 계곡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타고 국군의 제복도, 인민군의 제복도, 동막골 사람들의 남루한 옷 사이에서 제 색깔을 벗어던진다. 그냥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빨래감일 뿐이었다.

제복을 갈아입은 사람들은 어깨에 메었던 소총을 벗어던지고 지게를 진다. 놓칠세라 권총을, 수류탄을 움켜쥐었던 손은 호미를 든다. 요대로 긴장했던 허리춤은 넉넉한 한복으로 자유를 얻는다. 하늘도 웃고, 땅도 웃고, 감자밭 감자꽃들도 흥겨움으로 흔들거린다. 감자를 캐는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꽃밭에서 똥을 누다 멋쩍게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거기엔 국군이나 인민군의 경계가 사라진 곳, 정치적 이념의 대치가 한낱 장난이 되어버리는 곳, 관객은 꿈을 꾸게 된다. 통일이 온다면 저렇게 와야하지 않을까. 어, 그러고 보니 말이 되네, 동막골. 우리의 꿈이야기였잖아. 안 있드래요?
▲그동안 우리가 꿈꿔왔던 통일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뉴스파워


코드명 나비, 나비의 암호를 풀어라


동막골에는 꿈이 있었다. 그토록 이론과 논쟁, 이념과 권모술수로 이익을 나눠먹던 통일, 통일로 배를 불리려던 부류에 의해 착취당했던 통일, 그 추상명사를 구원하려는 영화가 동막골은 아닌지. 그런데 왠 나비?

영화엔 나비가 자주 등장한다. 나비는 비록 허상의 그림자가 되어 그래픽으로 날아다니지만 단지 엑스트라는 아니었다. 나비는 이 영화를 환타지로 분류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나비의 존재는 어디서 시작된 걸까. 그래픽일까, 미술가의 손끝일까. 아니면 감독의 장난일까. 차라리 영화에 나오지 않았어야할 유치한 키취였을까. 나비 때문에 영화의 현실감에 먹칠을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비는 영화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나비는 그 어떤 초월적인 이미지다. 우리 모두를 기억의 포로로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폭력을 구원하고 치유한다. 가소롭지 않는가. 하잘 것 없는 나비 한 마리가 파도같이 출렁이는 상처를 치유하려한다니.

나비는 힘이 세다. 영화 처음에 나비는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산 바깥과 안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국군이 있는 곳에도 인민군이 있는 곳에도 나비는 날아다닌다. 나비는 감자꽃 위에도 비행기 위에도 날아다닌다. 나비는 경계를 뛰어넘는다. 나비는 경계를 뛰어넘는 이미지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는 곧 영화를 이끌어갈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장치다. 나비는 영화의 흐름을 예고해준다. 나비는 스미스가 몰고가는 비행기를 떨어뜨릴만큼 힘이 세다. 나비는 연합군 특공대가 동막골을 접수하기 위해 하강할 때 기특한 힘을 발휘하여 마을을 보호한다. 어디선가 무수한 나비가 모여든다. 한 마리 나약한 나비가 무리를 지어 날아오를 때 나비는 힘이 셌다. 나비는 아마 금속성 무기를 싫어하나 보다. 끝내 나비는 제 몸을 던져 전쟁을 막으려 한다. 스미스가 발견한 추락한 비행기에서도 나비의 주검은 그곳에 있었다.


나비는 어디서 온 걸까. 나비의 집은 어디일까. 나비는 제복의 사람들이 동막골에 들어설 때 펄럭펄럭 춤을 춘다. 동막골이 나비의 집이었다. 그러면 나비는 무엇일까. 왜 나비는 동막골 주변을 맴도는 것일까. 나비는 동막골 사람들의 영혼이었을까.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꿈이었을까. 나비는 기억으로 상처입은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려는 꿈이었나 보다. 나비는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을 날아다니며 살며시 속삭이는 음성이었나 보다. 전쟁은 나쁜 것이드래요. 전쟁은 막아야 하는 것이드래요. 전쟁을 두려워하기 보다 먼저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드래요. 동막골 사람들처럼, 마이, 마이......


다시 때가 차매


우리는 어쩌면 타자의 표상이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억의 희생자들이다. 동막골 밖의 현실이 그랬다. 그러나 시간도 흐르고, 역사도 흐르고, 그 사이에 나비도 날아간다. 나비는 우리를 천신만고 끝에 동막골로 가는 길을 찾게 해주었다. 우리는 동막골의 실체를 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의 기억만은 흐르지 않는다고 강변할 수 있는 것일까. 왜 기억은 변할 수 없는 것일까 반문하지 않는가. 아니 반문도 하려하지 않는가. 과거의 기억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것일까.


이제 남은 것은 동막골을 지키는 일이다. 그것은 누가 대신 세워주는 나라가 아니다. 순박한 사람들의 고을이 폭격기로 무참히 사라질 위기 속에서 누가 그들을 지켜줄 것인가. 제복의 차별인가, 출신의 차별인가, 남과 북이라는 차이인가, 아니면 스미스인가. 스미스도 울부짖고 있지 않은가. 과연 누가 동막골을 지킬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지킬 것인가.
▲옛때가 지나고 새때가 다가온 현실 앞에서 이념이냐, 장엄한 미소이냐.     ©뉴스파워



백색의 설원, 모든 것이 하얗게 뒤덮여 더 이상 순결을 요구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정말 순결한 행동은 무엇인가. 전투기와 폭격기가 그 백색의 설원을 공격대형으로 날아오고, 우리의 동막골이 사라질 위기에서 과거 화해할 수 없었던 제복들이 손을 맞잡는다. 죽음이 그들을 향해 와도, 몸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 폭탄이 눈송이처럼 떨어져도 그들이 있기에 동막골은 안전했다. 그들의 장엄한 미소가 있기에 폭탄의 화염조차도 무섭지 않았다. 동막골은 지나온 자들은 그 장엄한 미소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웰컴투 동막골”은 여운을 남긴다.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 앞에서, 그러나 옛때가 지나고 새때가 다가온 현실 앞에서 이념이냐, 장엄한 미소이냐.



 
 
추태화 박사는 단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독일문예학/기독교문학, 철학, 사회학(m.a)을, 그리고 아우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독일문예학과 신학(dr. phil.)을 공부했다. 문학과 문학 비평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그는, 우리 사회가 건강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맑고 풍요로워지기를 꿈꾸는 기독교 문화운동가이다. 현재는 안양대학교 신학대학 기독교문화학과 교수로 있으며, (사)기독교윤리실천 문화소비자운동본부, 기독교학문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영화, 그 의미에 길을 묻다』, 『상상력의 유혹』,『대중문화 시대와 기독교 문화학』,『기독교 영성에 비추어 문학 새롭게 읽기』,『21세기 기독교 인문학의 전망』,『광장에서 문화를 읽다』,『101가지 이야기 신학』등이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05/09/12 [10:21]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연재소개
영화평
연재이미지1
오락의 쿨한 표면공학 영화, <놈.놈.놈>
'뻔뻔한' 공권력 앞에 선 '무례한' 강철중
미개(?)한 문명 속에 던져진 하이테크 인간
<영화평> 영웅의 부재를 가로지르는 영웅?
윌버포스 다룬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
"27번의 들러리가 시집가던 날"
<영화평> 주인공 네빌에게 쓰는 편지
뭉클한 인간들의 사랑, 희생의 폭이 너무 크다
십계명과 생활원리 ③
<영화평>'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감상
영화 한반도의 문제점
<영화평>'녹색의자'가 보여준 사랑의 경계선
한국적 느와르의 실험영화, '짝패'를 보고
<영화평>맨발의 기봉이
<영화평>'자기희생' 기독교의 영원한 가치
<영화평> 사랑은 기억보다 강하고
아버지의 응원가
흙은 아직 죽지 않았다
영화 성룡과 김 희선 주연---신화를 보고
통일을 논하기 전에 기억부터 치유하라 !
광고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9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