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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0.14 [10:01]
석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7]
 
정성민

1. 석가모니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석가는 사람들이 계급사회의 차별과 갈등 속에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내세에 더 나은 세상을 염원하는 모습에도 안타까워하였다. 석가가 꿈꾸는 세상은 바로 계급의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이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더 나아가 석가는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을 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석가는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길 원했던 것이다.

 

도대체 석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은 무엇일까? 석가가 꿈꾸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금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감각적인 쾌락을 대상들, 즉 소나 양, , 땅과 같은 소유물을 모두 내어버리고 무소유의 떠돌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특별히 성적인 욕망을 제어하여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더 이상 무고한 생명들이 태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또한 석가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여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길 원했다. 죽음은 자연의 순리와 이치라는 것이다. 즉 죽으면 끝나는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생무상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그 모든 번민에서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석가는 모든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서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탈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것이다.

 

2. 과연 석가가 깨달은 중도는 무엇일까?

 

사실 석가의 꿈꾸는 이상세계는 그가 수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은 진리에 바탕을 둔다. 바로 중도의 깨달음이다. 중도는 치우치거나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최적의 삶의 이치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양 극단 사이의 중간을 취하는 것이되 수량적인 중간치가 아니라 최상의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중간적인 위치에 서는 것을 말한다.이러한 중도의 깨달음이나 삶은 어쩌면 종교적인 이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는 사람들이 중도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가 말하는 중도는 무엇일까? 석가가 말하는 중도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피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석가가 생각하는 중도는 위치적으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딱 중간에 서있는 것은 아니다. 석가의 중도는 쾌락주의보다는 고행주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는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제어하여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의 중도는 금욕주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석가는 신의 주권이나 숙명적인 윤회론을 거부한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의 자율성이나 주체성을 신적인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석가의 중도는 신본주의를 거부하고 인본주의로 기울었다. 물론 무신론자로서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까 석가의 중도는 숙명적인 운명론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앞세운 인본주의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석가는 영적인 세계를 완전히 부정한다. 그렇다고 오직 물질만이 영원하다는 유물론자도 아니다. 그는 영적인 존재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물질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무아론적 유물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과 같은 영적인 존재나 세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물질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현상 세계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인간의 신체나 자연이 그러한 허무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다. 석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중도의 개념을 통해 세상을 바꾸길 원했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는 이다. 그는 힌두교의 그 모든 신들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신들이나 전생에 의해 종속되어진 인간의 운명조차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중도는 감각적 쾌락을 거부하는 금욕적인 삶이다. 물론 고행을 위한 고행을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그가 고행주의를 거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는 쾌락주의보다 고행주의에 훨씬 가깝다는 것이고,그가 생각하는 중도는 영혼이나 물질 모두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우주와 만물을 모두 공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도 않고, 세계가 물질적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믿지 않고, 윤회가 신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교는 영혼을 부정하면서도 불변하는 물질적 실체도 긍정하지 않았다. 이 세계로 돌아왔으면서도 이 세계 속 사물의 영속적인 실체성을 부인한 것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지도, 인간은 숙명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자아도, 실체도, 업도 연기에 의한 것이므로 허구이다-차후에 개념화된 용어로 하자면 공()하다.[1]

 

그러므로 석가는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허무한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떠돌이 삶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던 것이다. 즉 인생무상을 극복하는 최고의 삶은 바로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거룩한 떠돌이 생활인 것이다.   

 

3. 과연 석가가 꿈꾸는 이러한 이상적인 세상이 실현 가능할 것일까?

 

기독교 신학자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석가의 중도는 너무 인간에게 치우쳐 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만 너무 강조되어지고 신의 주권은 아예 빠졌다는 것이다. 물론 유신론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는 단지 결정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아예 신의 존재나 주권을 부정하였다. 이는 석가의 사상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깨졌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는 다분히 무신론적 인본주의로 치우쳤다는 것이다. 또한 석가의 중도는 너무 금욕적이다. 쾌락과 고행의 중간적인 것이 아니라 고행에 더 가깝다. 먹는 즐거움이나 성적인 쾌락과 같은 인간의 육신적이 즐거움이 죄악시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쾌락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석가의 중도는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육신적인 쾌락을 절제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한도내에서 육신적인 쾌락을 즐기거나 누린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성적인 쾌락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성서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단지 성적인 무질서과 착취를 우려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입장에서 석가의 중도는 결단코 양극단을 피하고 중간적인 위치에 서있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석가가 너무나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다는 주장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사상이 비현실적인 이유는 1) 신적인 존재를 거부하여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가르침, 2) 육신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을 거부하라는 가르침, 3) 매사에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 4) 사후세계의 심판과 보상을 전혀 기대하지 말라는 가르침, 이 모두를 더 한다면 그 누구도 석가의 가르침을 따를 엄두를 못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석가의 이상적인 세계관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역사적으로 볼 때에 단지 소승불교로만 그 명맥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의 이상적인 가르침을 따를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을 위해 대승불교가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다시 힌두교의 유신론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으로 되돌아간 역사적인 현실이다. 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역사적으로 설명한다,

 

 

부처는 신인가? 전통적인 설명에서 불교는 무신론이다. 신이라는 정의가 울고 웃는 인격성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자라면, 불교에는 신이 없다. 부처 자신도 깨달은 자 곧 붓다일 뿐, 그가 곧 신은 아니다. 게다가 깨달은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라서 유일성도 없으며, 불교도는 모두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 원칙적으로 내가 각성하는 종교이지 남이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인류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자력종교의 성격을 띠고 탄생한다. 부처도 깨달음 이후에 그 깨달음을 알려주려 하지, 내가 구세주라고 나서면서 나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앎과 믿음의 다름이 여기서 벌어진다. 그것은 곧 자력과 타력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밀교에서 부처는 곧 신이다. 그는 초인적인 역량이 있으며 이 세계와 인류의 구원자이다. 대중들은 신비하고 마술적인 종교를 원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욕망도 긍정했고, 부처를 시좌하는 여러 신들도 원했으며, 주술적인 방식도 채택했다. (해설: 이는 바로 불교의 힌두교화를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힌두교의 재현이다)…. 주문을 외움으로써 입이 저지른 죄를 씻고, 손의 동작으로 몸이 저지른 죄를 씻고, 부처를 중심으로 여러 나한(사도)을 배치한 그림에 마음을 쏟아 뜻이 저지른 죄를 씻고자 했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육체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태도였다. 정신의 기쁨이 아니라 육신의 기쁨도 수행의 방법이 되었다. 성생활이 적극적으로 용인되며, 나아가 성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도 등장한다….

기원후 10세기경 인도의 불교는 이처럼 힌두교와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일신 또는 다신과 상관없이 초월적인 신을 상정하는 힌두교가 대중들에게 강하게 다가오자 불교는 나름대로 자기의 형태를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력신앙에서 타력신앙에로의 전환이다. 밀교는 불교사적으로는 대승 후기 불교의 면모이다. 대승불교가 상정했던 여래장이 신격화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너와 내가 불성이 있다면, 그 불성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가 개별 불성을 갖고 있는 것은 보편 불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여러 작은 불성들은 큰 하나의 불성으로부터 나온다. 그 큰 불성이 곧 여래이며, 그것은 초월적이고 인격적이며 절대적이다. (해설: 이는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힌두교의 아뜨만 개념이 불교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인간의 영혼인 아뜨만과 창조의 신인 브라흐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이다. 곧 범아일여이다.) …… 부처의 가르침을 많은 사람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대승의 의지는 결국 실천의 방안으로 부처를 신격화시키는 방향으로 귀착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소승과 다르지 않았고, 모두를 깨우친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권능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수레가 너무 컸다. 사람이 이끌기에는 너무 컸다. 끌지 못할 수레이기에 사람을 뛰어넘는 신격화된 절대존재가 필요했다…. 대승불교는 이렇게 자력에서 타력으로 옮겨간다.[2]

 

사실 대승불교는 힌두교 신앙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헤겔이 말한 역사해석의 원리인 정, , 합에 해석하자면, 힌두교의 기복신앙은 정이고, 석가의 종교 개혁은 반이라면 대승불교는 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전생의 업에 따라 결정되어진 숙명적인 윤회론을 석가가 거부하고 개혁하였지만, 결국에는 석가를 따르는 후대의 제자들은 결국 다시 숙명적인 윤회를 주창하는 힌두교로 회귀하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석가를 그들의 신으로 추앙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새롭게 거듭난 힌두교 신앙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신적인 힌두교가 석가의 종교개혁을 거친 후로 더욱 정교해지고 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헤겔의 역사해석의 원리인 정반합이 적용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를 따르는 한국불교는 어떤 모습일까? 과연 한국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을까? 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만나고 있는 불교의 모습이 외견상으로는 힌두교를 닮고 있고, 내용상으로는 자이나교를 닮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절마다 만나는 수많은 신상은 힌두교를 닮고 있고, 신비하고 신화적인 윤회이론은 자이나교를 닮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 한국불교는 자이나교처럼 실제적인 업과 업보 사상을 믿으며 니르바나라는 열반내지는 극락의 세계를 실체로 받아들인다.) 종교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서로 교섭하고 변통하는 것이지만, 한국 불교인들이 불교라는 정체성을 진정 갖고 싶어 한다면 불교와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차이에 주목해야만 한다.[3]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한국 불교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왜 한국불교가 힌두교적 신앙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원인분석을 하자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석가의 중도 개념이 너무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기에 그를 따르는 후대 불교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후대불교는 다시 신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지나친 금욕주의보다는 인간의 육체를 중시하면서 어느 정도 쾌락도 추구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인간 내면의 불멸의 자아(불성), 내지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사후세계 조차도 인정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를 따르던 후대의 불자들은 왜 석가의 가르침을 포기해야만 했을까? 그 해답은 석가의 중도개념이 실제로는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석가는 신보다는 인간 쪽으로 기울었고, 인간의 영혼보다는 인간의 몸으로 기울었고, 쾌락주의보다는 고행주의로 기울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는 석가의 자연 과학적인 세계관과 합리적 이성주의는 일반인들이 종교를 통해 간절히 바라는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종교의 의무에 해당하는 도덕주의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신의 보상과 사후세계도 부정하는 가운데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석가의 가르침은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높은 이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후세계의 보장과 현실의 삶에서의 부귀영화이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이러한 타락한 본성을 거스른 석가의 가르침이 일반인들에게 오래도록 수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석가가 사람의 본성은 타락하여 정신적인 수행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 못했거나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현재는 악하고 더러운 마음일지라도 언제든지 그러한 마음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타락한 본성을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석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은 결단코 인간의 명상수행으로나 도덕적인 선행으로는 도저히 성취될 수 없다고 믿는다.

 

 

 



[1]윤회와반윤회, 182-83.

[2]윤회와반윤회, 86-88.

[3] Ibid,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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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12 [14:1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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