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광고
광고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파워인터뷰생활/건강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9.12.07 [09:01]
올바른 집중은 무엇일까? (2)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6]
 
정성민
 

삼매는 불교 수행의 이상적인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올바른 집중을 통해 삼매의 단계에 이르면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 해태와 혼침, 매사의 의심, 분노, 흥분과 회한 그리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점차로 사라져 없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올바르고 순수한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가 바로 삼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 정신통일이 된 상태를 말한다. 결국 삼매는 수행자의 마음이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삼매에 이를 때에 마음의 장애들이 선정의 고리로 점진적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해태와 혼침은 사유로, 매사의 의심은 숙고로, 분노는 희열로, 흥분과 회한은 행복으로, 그리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마음의 통일로 바뀌게 된다.

 

1. 선정과 삼매는 어떤 관계일까?

 

그렇다면 선정은 무엇을 말할까? 선정은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방법을 말한다. 그러니까 올바른 집중을 위한 명상수행 방법인 것이다. 사실, 선정이라는 명상수행 방법은 불교 이전에 이미 고대 인도에서부터 널리 수행되어온 명상이다. 선정은 신체를 안정시켜서 산란한 마음을 멈추고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정신을 통일하는 수행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정은 수행자의 마음이 사물(명상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행이다. 그렇다면 선정과 삼매는 무엇이 다를까? 선정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시도하는 명상수행 방법을 말하는 것이고, 삼매는 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말한다. <불교사상의 이해>은 설명한다,

 

선정,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다.[1]

 

결국 선정은 올바른 집중을 위한 수행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아니면 올바른 집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불교사상의 이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정(올바른 집중)은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이기 때문에 때로는 2가지를 합해서 선정이라고 한다.[2] 

 

이를 정리하자면, 올바른 집중을 위한 구체적인 명상 방법이 바로 선정이고, 선정의 목적이나 결과는 바로 삼매인 것이다. 삼매의 경지에 이르면 다섯 가지 선정의 고리가 나타난다고 한다. 순서대로 말하자면 사유, 숙고, 희열, 행복, 마음의 통일이다. 다섯 가지의 선정의 고리에 관하여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한다. 사유는 명상의 토대가 되는 대상이라는 종을 치는 것과 같으며, 숙고는 그 종의 반향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희열은 명상의 대상에 대한 관심과 흥미에 따르는 기쁨으로 사막을 여행하는 자가 멀리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쁨에 해당하며, 행복은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고 쉬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음의 통일은 마음과 대상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3]

 

2. 근본적 삼매는 무엇일까?

 

명상을 위한 대상은 처음에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사물, 즉 객관적인 물체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을 사용할 수 있다. 아니면 우리의 생각 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어떠한 주관적인 대상을 사용할 수 있다. 마음이 집중되고 깊어지면서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대상이 점차로 사라지게 된다. 그와 동시에 마음을 통해 선명하게 보이는 정신적인 대상(습득상)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점차로 마음이 더욱 집중되면 그 대상이 다시 맑고 깨끗한 밝은 이미지(대응상)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습득상은 구름 낀 달에 비유되고, 대응상은 구름이 사라진 달에 비유되는데, 그 이유는 대응상이 보이면서 선정의 고리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근접적 삼매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서 더욱 깊이 마음의 집중을 이루게 되면 근접적 삼매는 근본적 삼매에 도달하게 되는데, 근본적 삼매는 근접적 삼매에 비해 정신적인 힘이나 견고함이 더 강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4]

 

그렇다면 근접적 삼매와 근본적 삼매는 무엇이 다를까?라훌라에 의하면, 두 삼매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 단지 근접적 삼매는 어린 아이가 힘이 부족해서 곧잘 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고, 근본적 삼매는 힘을 지닌 어른이 절제할 능력도 가지고 있기에 어려움에도 넘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5] 석가는 말한다,

 

깨달은 님들 가운데 뛰어난 님께서 찬탄하는 청정한 삼매는 즉시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이니, 그 삼매와 견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르침 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Stn.226)

 

근본적인 삼매에 이르게 되면 아홉 단계의 선정의 고리들이 나타난다. 첫번째 선정에서 네번째 선정의 단계는 불교만의 고유한 것이다.  불교만의 고유한 선정은 네번째 선정의 단계에서 끝난다는 사실이다.다시 말해 첫번째 선정에서 네번째 선정의 단계를 통해 석가가 말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은 모두 성취된다는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선정이라는 명상수행 방법은 불교 이전에 이미 고대 인도에서부터 널리 수행되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선정의 단계는 영적인 세계의 체험을 강조한다. 이는 선정의 깊은 단계에 들어간 자가 경험하게 되는 비물질적(영적) 세계에 관한 체험이다.[6] 물론 석가도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선정에 대하여 말한다. 하지만 석가가 이러한 영적인 세계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다. 선정의 마지막 단계는 멸진정이다. 이는 우리의 지각과 감각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3. 석가가 가르치는 선정의 단계는 무엇일까?

 

근본적인 삼매에 이르게 되면 아홉 단계의 선정의 고리들이 나타난다. 과연 아홉 단계의 선정의 고리는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석가가 가장 중시하는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선정의 단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1) 첫 번째 선정

첫 번째 선정은 육계를 떠남에서 생기는 사유, 숙고, 희열,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즉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버림으로 발생하는 마음의 기쁨과 행복을 말한다. 첫 번째 선정에 관하여 <중아함경> 43168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마음에서 행하는 대로 태어나는가. 어떤 비구가 탐욕을 떠나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떠나면, 거친 생각이 있고 미세한 생각이 있게 된다. 그리고 육계를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노닌다. 비구는 이 초선정을 즐기며 그곳에 머무르고자 한다.”[7]

 

2) 두 번째 선정

두 번째 선정은 사유와 숙고를 멈추고서 내적인 평안과 마음의 통일을 경험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수행자는 마음을 더 집중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된다. 두 번째 선정에 관하여 <중아함경> 43168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고 비구가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을 쉬면, 내면이 고요해지고 일심의 경지를 성취한다. 거친 생각도 없고 미세한 생각도 없이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노닌다.

 

또한 두 번째 선정에 관하여 [숫타니파타]경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확고한 마음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이, 고따마의 가르침에 잘 적응하는 참 사람은

불사에 뛰어들어 목표를 성취해서 희열을 얻어 적멸을 즐깁니다. (Stn.228)

 

3) 세 번째 선정

이 단계에서는 마음의 희열은 점차 약해지면서 사라지고, 그 대신 육체적인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로 통일된다. 점차로 평정심이 깊어지면서 바른 기억과 바른 지혜를 갖게 된다. 세 번째 선정에 관하여 <중아함경> 43168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고 비구가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떠나 바라는 것이 없이 담담하게 노닐면, 바른 기억과 바른 지혜를 갖추게 되고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제3선을 성취하여 노닌다. 이것이 바로 모든 기억을 담담히 바라보며 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에만 머무는 거룩한 경지라고 성인들이 말씀하신 것이다.

 

4) 네 번째 선정

이 단계에서는 육체적인 행복이 사라지고 그 대신 행복도 고통도 없는 마음의 평정을 누리게 된다. 네 번째 선정에 관하여 <중아함경> 43168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고 비구가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물면, 즐거움도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고 기쁨과 근심의 근본도 멸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모든 생각을 내려놓아 마음이 청정해진다.

 

또한 네 번째 선정의 단계에서 누리는 마음의 평정에 대하여 [숫타니파타] 경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 세상에서 감각적 욕망을 뛰어넘어, 극복하기 어려운 집착을 넘어선 님은

흐름을 끊어, 묶임이 없고, 슬퍼하지 않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Stn.948)

 

이러한 마음의 평정심으로 인해 새김의 활동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결국에는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네 번째 선정의 단계에 관하여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네 번째 선정에 이르러서는 행복의 상태마저 제거되는데, 행복한 몸이나 희열 그리고 고통이나 근심조차도 다 사라지고 단지 순수한 선정의 상태, 즉 마음을 집중하는 가운데 새김활동만을 하는 단계이다. 바로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 상태 그리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러한 상태를 어떤 경전에서는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소멸하게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특이한 현상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선정에서는 언어표현이 소멸되고,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선정에서는 육체적인 행복과 육체적인 호흡, 즉 날숨과 들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네 가지 선정단계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은 마음의 통일인데, 이는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고 한다.[8]

 

결국 네 번째 단계의 선정은 마음의 통일, 곧 마음의 해탈을 이루는 단계이다. 이러한 마음의 해탈은 수행자로 하여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소유와 무욕의 삶으로 이끈다. 석가는 말한다,

 

모든 존재의 처소에 대하여 잘 알아,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그는 탐욕을 떠난 무욕의 성자이다. 피안에 도달해 다툼이 없기 때문이다. (Stn.210)

 

앞서 다루었듯이, 네 번째 선정의 단계에서 수행자는초월지라는 아주 특별한 정신적 능력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초월지는 무엇인가? 과연 초월지는 신비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자적으로 보면 초월지는 초월적인 지식이나 신비한 지식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본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영적 지식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하지만, 석가의 입장에서는 초월지가 신비적인 지식을 절대로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초월지는 초월적인 실재()로부터 얻는 신비적 직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석가가 말하는 초월지는 수행을 통해 누구나 도달하거나 얻을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다. 어쩌면 이는 수행자가 자기 자신을 객관적인 삼자로 바라볼 수 있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통찰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4.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선정의 단계는 무엇일까?

 

이제부터 영적인 세계의 체험을 다루는 선정의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단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다섯 번째 선정

다섯 번째 선정은 단지 공간만이 무한하게 펼쳐지는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물질을 지각하거나 인지하는 현상이 사라지고 각 사물의 다양성조차도 사라지게 된다. 이는 객관적 대상이 소멸되는 경지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그리고 비구가 일체의 색에 대한 생각을 떠나면, 대상이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어떠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게 되며 끝없는 허공 만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무변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다. <중아함경> 43168

 

여기서 공무변처는 비물질 세계를 이루는 4개의 단계 중에 첫 번째 단계이다. 무한한 허공 속에서 물질적인 요소를 초월한 정신적인 요소만을 갖춘 자들이 지내는 곳이다.

 

2) 여섯 번째 선정

여섯 번째는 수행자의 의식이 무한한 세계에 이르는 단계이다. 이는 무한한 공간을 지각하는 상태에서 의식이 무한한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객관적인 현실의 전환이 아니라 주관적인 의식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그리고 공무변처를 지나면 식무변처가 있다. 비구는 이 선정을 즐기고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여 식무변처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 선정을 즐기며 그곳에 머무르고자 한다. <중아함경> 43168

 

식무변처는 비물질세계의 두 번째 단계로 무한한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는 곳이다.

 

3) 일곱 번째 선정

이 단계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제 의식의 무한성마저 사라진다. 그리고 무소유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무소유의 상태는 객관적이건 주관적이건 아무런 의식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그리고 식무변처를 지나면 어떤 것도 아닌 것인 무소유처가 있다. 비구는 이 선정을 즐기고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여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닌다. <중아함경> 43168

 

4) 여덟 번째 선정

이 단계는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말한다. 이는 일곱 번째 선정의 무소유의 상태에서 수행자의 지각조차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수행자의 지각이 남아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는 아주 미묘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그리고 일체의 무소유처라는 생각을 지나면, 하나라고도 볼 수 없고 둘이라고도 볼 수 없는 비유상비무상처가 있다. 비구는 이 선정을 즐기고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여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닌다. <중아함경> 43168

 

비유상비무상처는 비물질세계의 제4단계로서 육계와 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미세한 생각조차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숫파니타파>는 이렇게 기록한다,

 

지각에 대한 지각도 여의고, 지각에 대한 잘못된 지각도 여의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소멸된 것도 아닌,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 님에게 물질적 형상이 소멸합니다. (Stn.874)

    

5. 과연 선정의 최종단계는 무엇일까?

 

 이제 아홉 번째 선정, 즉 선정의 최종단계이다. 이는 지각과 감수가 모두 다 사라지는 멸진정의 단계이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그리고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를 지나면 상수멸(멸진정)이 있다. 비구는 상수가 멸함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지혜로써 보고 모든 번뇌가 다하였음을 안다. 그는 모든 선정 가운데 이 선정이 제일이고 으뜸이며 가장 위 되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묘하다고 말한다. <중아함경> 43168

 

멸진정은 비물질계의 선정에서 가장 초월적인 존재의 상태를 말한다. 이는 지각과 감수조차도 완전히 사라지는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숫타니파타>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에게 이 세상에서 본 것이나 들은 것이나 감지된 것으로 만들어진,

티끌만한 지각도 없습니다.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 그 거룩한 님을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판단하겠습니까? (Stn.802)

 

여덟 번째 선정까지는 비록 지각(생각이나 판단)과 감수(느낌이나 감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면 이제는 아예 지각도 감수도 없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멸진정 단계는 지각이나 감수하는 기관이나 능력조차도 아예 사라지는 초월의 단계다.

 

그렇다면 멸진정이 석가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해탈의 단계일까? 비록 멸진정이 선정의 가장 높은 단계는 맞지만 석가가 생각하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해탈은 아니라는 것이다.[9] 앞서 말했듯, 사실 첫번째 선정에서 네번째 선정의 단계를 통해 석가가 말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은 이미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만의 고유한 선정은 네번째 선정의 단계에서 모두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선정의 단계는 브라만교나 중국의 도교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종교들이 주장하는 영적인 체험을 다룬다.이 단계는 존재의 영역으로는 하늘의 신들이 사는 영역, 즉 범천계에 속한다. 범천들은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저절로 태어난 영적인 존재들이다.[10] 물론 석가가 이러한 영적인 세계를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는 다섯 번째부터 아홉 번째에 이르는 선정의 단계를 스스로 수행하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석가가 힌두교가 주장하는 실체로서의 윤회를 거부하면서도 상징적이고 윤리적인 윤회설을 주장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석가가 주창한 무아설은 브라만교 윤회설의 무근거성을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으로 설파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브라만교는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나를 규정하고 현생의 내가 내생의 나를 규정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생을 거듭하는 나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나라는 것조차 없다면 윤회의 근본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자기동일성이 있음을 부정함으로써 윤회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다. 내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윤회도 없게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에게 우리의 윤회는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었다.[11]

 

6. 그렇다면 과연 석가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해탈은 무엇일까?

 

과연 멸진정(선정의 최종단계)과 석가가 말하는 궁극적인 해탈은 무엇이 다를까?

석가에 의하면, 멸진정은 단지 열반의 일시적인 측면에 불과하다. 이는 비록 수행자가 멸진정이라는 초감각적 지각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열반에 대한 궁극적인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멸진정은 세상의 그 모든 감각이나 지각을 초월한 마음 상태이지만 열반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반은 해탈을 위한 지혜나 지식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12] 그래서 석가는 말한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선정이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자, 그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이 있다.[13]

 

평정과 새김으로 청정을 확보하고 가르침에 대한 탐구가 앞서가면,

이것이 무명을 부수는 궁극의 앎에 의한 해탈이라고 나는 말한다. (Stn.1107)

 

진정한 열반은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올바른 견해, 즉 지혜를 통하여 완성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수행자가 여덟 가지 거룩한 길(팔정도)를 실천하고 그리고 그 중에서도 9가지 선정의 단계(올바른 집중)를 다 통과를 한 후에도 만일 그가 석가가 제시한 올바른 견해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해탈하지 못한 것이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팔정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을 위한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지혜는 바로 팔정도의 첫번째 길인 올바른 견해다. 여기서 우리는 팔정도를 실천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통찰력(명지, 궁극적인 앎)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7. 그렇다면 석가가 말하는 궁극적인 지혜는 무엇일까?

 

석가가 말하는 궁극적인 지혜는 바로 연기법에 대한 완전한 통찰내지는 깨달음을 갖는 것이다. 이를 명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명지, 곧 궁극적인 지혜일까? 석가가 말하는 궁극적인 지혜는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무아론이다. 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말한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연기로 집약된다…. 붓다의 깨달음은 모든 것이 연기라는 제법의 실상을 본 것이었다. 따라서 원리의 구체적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무아설조차 연기에 기초한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다. 나는 내가 고정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 따라서 나라는 실체는 없다. 그래서 무아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론적으로는 무아설은 연기설의 주요 결론 가운데 하나이다. 이론적 증차에서 볼 때 최고의 상위에 연기설이 있다. 불교의 많은 이론은 연기설로부터 파생되거나, 그 바탕에 연기설을 두고 있다. 업의 실체성이 부정되는 것도 연기 때문이다. 연기에 따르면 영원한 영혼도 없다. 연기설은 모든 고정불변하는 실체성을 부정한다.[14]

 

다시 말해 올바른 견해는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무아론이다. 이로 인해 인생무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무상을 인정하므로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올바른 깨달음이나 지혜를 얻고자 팔정도의 거룩한 길을 걷는 것이다. 좀 더 급진적으로 표현하자면, 만일 당신이 석가가 제시한 이러한 지혜를 어떠한 방법으로 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당신은 굳이 팔정도를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무명이란 크나큰 어리석음인데, 이로 말미암아 오래도록 윤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지에 이른 뭇 삶들은 다시는 존재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Stn.730)

 

무명이 머리인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새김과 삼매와 더불어,

의욕과 정진을 갖춘 지혜가 머리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Stn.1026)

 

결국 윤회의 원인은 무지이고, 이러한 윤회에서 해탈하는 길은 바로 명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명지라고 말하는 지혜는 우리를 해탈로 이끄는 궁극적인 앎이다. 그러므로 석가가 가르쳐준 그 깨달음(명지 혹은 궁극적인 앎)을 수행자 자신이 스스로 깨우쳐서 그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도따까여,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의혹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해탈을 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다만 으뜸가는 가르침을 안다면, 스스로 거센 흐름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Stn.1064)

 

그러므로 석가가 가르쳐준 궁극적인 지혜를 깨우치고서 그 가르침에 따라 무소유와 무욕의 삶을 산다면 수행자는 그 모든 인생의 고통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정신적인 해방을 말한다. 사실 올바른 견해는 팔정도의 첫 번째 단계이다. 바로 여기 첫 번째 단계에서 불자인지 아니면 힌두교도인지 아니면 도교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인지가 이미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가 말하는 올바른 견해는 힌두교나 도교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해탈을 위해서는 부처가 제시한 올바른 견해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는 부처가 생각하는 세계관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가 말하는 올바른 견해는 무신론적인 시각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과학적인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견해 외에 나머지 일곱 가지 거룩한 길은 올바른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고 확신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지혜와 지식의 종교라는 것이다. 즉 석가는 세상과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추구한다. 바로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무아론이다. 이런 면에서 불교는 신과 사후세계 그리고 영적이고 신비적인 체험들을 추구하는 다른 종교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종교라는 것이다. 만약 종교의 속성을 신의 존재 그리고 영혼과 관련을 짓고 또한 그와 관련된 신비한 체험으로만 생각한다면, 아마도 불교는 종교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도덕철학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불교사상의이해, 56.

[2] Ibid, 95.

[3]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46.

[4] Ibid, 147.

[5] Ibid.

[6] Ibid.

[7] Ibid, 148쪽에서간접인용.

[8] Ibid, 149.

[9] Ibid, 157-58.

[10] Ibid, 141.

[11]윤회와반윤회, 49-50.

[12]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57.

[13] Ibid, 158쪽에서간접인용.

[14]윤회와반윤회, 51.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09/11 [05:41]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연재소개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연재이미지1
예수와 석가가 꿈꿨던 세상의 차이는?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2)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1)
석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올바른 집중은 무엇일까? (2)
올바른 집중은 무엇일까? (1)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2)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1)
올바른 정진은 무엇일까?
올바른 생활은 무엇일까?
성 생활에 관한 예수와 석가의 차이는?
올바른 행위는 무엇일까?
올바른 언어는 무엇일까?
올바른 견해는 무엇일까?
올바른 사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팔정도란 무엇일까?
건강한 금욕주의는 무엇일까?
석가가 깨달은 중도는 무엇일까?
과연 석가는 신비주의자일까?
광고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9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