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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7.17 [01:02]
성 생활에 관한 예수와 석가의 차이는?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0]
 
정성민

1. 석가가 말하는 부부의 올바른 성생활은 무엇일까?

 

건전한 성생활에 대한 가르침은 올바른 행위의 세 번째 덕목이다. 이는 불자들의 올바른 부부생활을 위한 석가의 가르침이다. 석가에 의하면, 건전한 부부생활은 자기의 아내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는 매춘부와 놀아나지 않는 것이며 또한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이다. 즉 부부간의 사랑을 나눔에 있어 간음이나 간통과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그것이야 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젊을 시절을 지난 남자가 띰바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그것이야 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Stn.108-110)

 

결과적으로 석가는 순결하지 못한 성적인 관계를 금하는 것이다. 가장 순결하지 못한 성적인 관계는 남의 아내와의 성적 관계를 말한다. 그는 말한다,

 

때로는 폭력을 가지고, 혹은 서로 사랑에 빠져 친지나 친구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Stn.123)

 

남의 아내와 가까이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 (Stn.242)

 

양식 있는 자라면 타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순결하지 못한 행위를 삼가라.

만일 순결을 닦을 수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 (Stn.396)

 

2. 석가가 말하는 수행승들의 올바른 성생활은 무엇일까?

 

석가는 수행승이 여색에 빠지는 것은 파멸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수행승이나 거룩한 삶을 원하는 불자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 만일 수행승이 성적인 쾌락을 갈구한다면 그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자이다. 어느 날, 띳싸 멧떼이야가 석가에게 성적인 욕망의 문제점에 대해서 질문한다,

 

존자여,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의 고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는 멀리 여읨을 배우겠습니다. (Stn.814)

 

이에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멧떼이야여, 가르침을 잃고,

잘못 실천합니다. 그의 안에 있는 탐닉은 천한 것입니다.

여태까지 홀로 살다가 나중에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수레가 길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속한 자라 부릅니다.

지금껏 그가 가졌던 명예와 명성을 다 잃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성적 교섭을 끊도록 전념해야 합니다. (Stn.815-17)

홀로 유행하는 삶을 지키며 지혜로운 님이라고 여겨지더라도,

성적 교섭에 빠지게 되면, 어리석은 사람처럼 괴로워합니다. (Stn.820)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수행승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석가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린 수행승들이 바로 올바른 길로 걸어가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존재를 뛰어넘어 진리를 꿰뚫어, 수행승이 인간계와 천상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린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유행할 것입니다. (Stn.36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린다는 것은 결국 수행자로 하여금 성적 욕망을 억제하는 독신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수행승들에게 일반 신도들보다는 좀 더 높은 수준의 성적 욕망의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여기에 앞으로나 뒤로나 이러한 재난이 있음을 알아,

굳게 홀로 유행하는 삶을 지키고 성적 교섭을 일삼지 말아야 합니다. (Stn.821)

 

석가는 성적인 욕망을 타오르는 번뇌를 일으키는 지옥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거센 강물과도 같다는 것이다. 이는 성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만큼 어려운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얽매여 있습니다. (Stn.272)

일반 사람들이 집착하는 욕망과 탐욕을 떠나 눈을 갖춘 님이 된다면,

바른 길을 갈 수 있고,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Stn.706)

그래서 사람은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피하고, 그것을 버리고,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 피안에 도달하듯, 거센 흐름을 건너야 합니다.

세상에서 실로 감각적 욕망은 버리기 어렵습니다. (Stn.771-72)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그 넘기 어려운 수렁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Stn.945)

지혜 있는 이가 말하길 애욕은 지옥이라고깊고 견고하여 벗어나기 어렵다 합니다. (법구경, 346)

 

그러므로 석가는 성적인 욕망을 넘어선 수행승은 열반에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제거한 자만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욕망이 없어지고 버려져서, 욕망을 여읜 것이 적멸입니다. (Stn.707)

멀리 여읨을 배우시오. 이것은 고귀한 님들에게 최상의 일입니다.

그렇게 했다고 자신을 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그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이 있습니다. (Stn.822)

 

결과적으로 석가는 제자들이나 신도들에게 성적인 욕망을 억제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의 가르침이 금욕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면,일반 신도이든지 수행자이든지 간에 청정한 생활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교제가 있으면 애착이 생기고, 애착을 따라 이러한 괴로움이 생겨나니,

애착에서 생겨나는 위험을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36)

감각적 쾌락은 다양하고 달콤하고 즐거우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혼란시킨다.

욕망의 가닥 들에서 이러한 위험을 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50)

믿음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면, 사랑스럽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대상들을 버리고,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사람이 되라. (Stn.337) 

성적 교섭에서 떠나 온갖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적대하지 말고, 애착하지 마라. (Stn.704)

 

3. 구약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성생활은 무엇일까?

 

구약 성경에도 건전한 성생활에 관한 계율이 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가 바로 그것이다. (출애굽기 20:14) 레위기 20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성적인 관계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질서를 지키라는 계율로 볼 수 있다.

 

구약성경은 성적인 관계를 억제하려는 금욕적인 계율보다는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 무질서를 막으려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이는 성적인 관계를 즐기되 성적인 질서를 지키라는 것이다. 결국 구약이 말하는 성적인 계율은 금욕보다는 질서와 절제의 측면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1 7-11절을 보면, 이러한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 질서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그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는 팔지 못할 것이요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할 것이요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 그가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

 

이를 해석하자면, 어떤 사람이 돈이 부족해서 자신의 딸을 어떤 부자에게 팔았을 때 그 부자가 취해야 하는 질서 있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그 부자는 그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든지 아니면 아들의 며느리로 삼든지 해야 한다. 만일 그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여인을 그냥 돌려보내야 한다. 외국인에게 팔거나 그냥 방치하여 음식이나 의복도 주지 않고 동침 하지도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럴 경우에 그 여인은 노예신분에서 자유롭게 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은 주인이나 주인의 아들과 동침할 성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적인 권리가 무시되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한 인간으로서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권리와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단지 정해진 질서 안에서 그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4. 석가의 이성관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물론 석가도 성적인 관계를 맺을 때에 있어서 질서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질서보다는 성적인 관계의 억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수행자나 일반 신도들이 거룩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성관계는 백해무익하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이 금욕적인 측면을 종교의 핵심이나 본질로 여기는 공통적 성향이 있다. 하지만 석가는 다른 종교들에 비하여 성적인 관계를 조금 더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관계를 통해서 자식들이 태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자식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덧없고 무상한 인생, 즉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석가가 야수다라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였을 때에 남긴 말이다,

 

나에게 시집오는 아내는 결코 행복하지 않으리라.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 애들도 불행할 것이다.

인생은 무상하고 인간은 누구든 죽음을 피할 수 없다.[1]

 

석가의 결혼관 내지는 이성관이 이토록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태생의 비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석가의 모친인 마야부인이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로 인해 석가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아픔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의 덧없음에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무샤고지 사네아츠는 말한다,

 

그러나 인생은 무상한 것이다. 마야 부인은 태자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행복했던 이승을 떠나야만 했다. 왕은 부인의 죽음에 몹시 슬퍼했다. 죽은 왕비가 못내 가련하기만 했다. 태자의 양육은 마야부인의 동생인 마하바자바디가 맡았다. 태자는 여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2]

 

5. 그렇다면 예수의 이성관은 석가와 무엇이 다를까?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가 간음에 대하여 극도로 경계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말한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7-28)

 

이는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음탕한 마음을 가진 것만으로도 간음을 한 것이라는 말이다. 눈으로 조차도 음탕한 마음을 갖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석가의 금욕적인 계율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가지 문제가 생긴다. 과연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면서 음탕한 마음을 갖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러한 우리의 의구심에 예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던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3-11)

 

결국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눈으로 그리고 생각으로 우리 모두가 음탕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들이 지닌 성적인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로 타락한 세상에서 말이다. 결국 예수는 우리에게 타락한 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성적인 욕망에 사로 잡혀서 음란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죄악된 성향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받으라는 것이다. 예수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이러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 45-26절에 잘 나타나 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는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사마리아 여인의 도덕성이나 죄를 그렇게 문제삼지 않는 듯하다. 예수는 그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여인이 자신의 잘못된 생활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간음이라는 성적인 무질서를 문제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죄를 고백하지 않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수는 우리 자신의 음란한 마음을 인정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그에게 고백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음란한 마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고서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라는 것이다.  

 

물론 석가도 우리 자신의 음탕한 마음을 인식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음탕한 마음을 스스로 고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닌 음탕한 마음내지는 감각적 쾌락의 욕구때문에 고통스러운 세상에 애매한 생명들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간음을 바라보는 예수와 석가의 시각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다를까? 예수는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생겨날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생명의 탄생은 신비한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새로운 생명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보내주시는 목적이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이 땅에 머물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목적이 있는 존재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2-4, 14-15)

 

결과적으로 석가는 성적인 욕망과 같은 죄 자체를 문제시하고 그 죄를 어떻게 하면 스스로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면, 예수는 죄 자체보다는 그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더 문제시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죄인식을 통해서 죄를 자백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원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력적인 종교(불교)와 타력적인 종교(기독교)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예수는 세리와 창녀와 같은 사회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에게 매우 관대하다. 예수는 스스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석가와 같은 의인보다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어찌할 수 없어 탄식하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고 찾으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가복음 217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결국 죄의 크기나 성향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2131-31절은 잘 설명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6. 기독교는 성적인 면에서 자유로운 영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에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길 수 있다. 먼저 석가의 가르침에 대한 질문이다. 과연 석가가 생각한대로 우리가 지닌 감각적 쾌락의 욕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까? 만일 모든 사람들이 성적인 욕망을 제거하여 인류가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인류의 미래일까? 다음은 기독교에 대한 질문이다. 간음을 행하고서 죄를 용서받은 자가 또 다시 반복적으로 간음죄를 행한다면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의 피가 그러한 반복적인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의구심은 아니다.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성적인 죄와 그로 인한 책임이 간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무책임한 사람들에게 혹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성적인 범죄와 그로 인한 책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적인 책임과 배상을 중시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적인 도리로서 자신의 욕망을 잘못 분출한 것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출애굽기 22:16-17)

 

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신명기 22:28-29)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음행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에 던져진다고 경고한다. 이는 간음한 죄를 용서받고도 무한 반복으로 음란한 죄를 거듭해서 지는 자들은 지옥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 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는 말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음란한 마음을 벗어날 수 있을까?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고 나서도 생각나는 음탕한 마음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물론 석가의 방법은 명상수행이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의 더러움이나 죽은 시체를 명상함으로써 자신 내면의 정욕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먼저 우리 내면의 성적인 욕망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 다음이 문제인데,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는 육체적인 욕망을 제어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석가가 제시하는 방법은 마인드 컨트롤과 같은 심리적인 제어법이라면 예수가 제시하는 방법은 매우 영적인 것이다. 이는 육신적인 욕망을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5, 17-20)

 

하지만 이러한 감당할 수 없는 육신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을 따르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1-10, 12-13)

 

그러므로 기독교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권고한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16-17)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22-23)

 

사도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말하면서 성령과 성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피조물이 허무한 데 (성적인 욕망, 세상적인 부귀와 영광 등)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성적인 노예, 물질의 노예 등)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리라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14,16,20-21,26)

 

이상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성적인 욕망을 극복하는 비결은 오직 성령을 의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초월적인 힘을 의지하여 우리 내면의 욕구를 잠재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와 불교는 성적인 욕망을 자유롭게 분출하는 무절제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와 석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을 절제할 것을 권고한다. 문제는 예수와 석가가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방법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석가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라고 가르친다. 바로 명상수행을 통해 정신을 하나로 통일해서 인생무상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성적인 욕망은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영적인 힘으로 육체적인 욕망을 제어하라고 가르친다.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성적인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석가의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방법과 예수의 영적이고 신비한 방법은 너무나 극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만일 당신이 성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때에 그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극복할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방법으로 극복할 것인지는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선택에 달린 것이다.  

 

 

 

 

 

 

 

 



[1]무샤고지 사네아츠, 붓다, 25.

[2] Ibid,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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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28 [08:2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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