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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7.21 [03:02]
올바른 사유는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37]
 
정성민

1. 과연 올바른 사유는 무엇일까?

 

올바른 사유는 석가가 말하는 자기 구원의 비결의 두번째 덕목이다. 이는 첫번째 덕목인 올바른 견해를 가지게 될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유는 석가가 깨달은 세계관(석가의 견해)을 우리가 동의하게 될 때에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생각의 패턴이나 유형이다.

 

올바른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도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게 한다. 즉 우리가 세상에서 선하고 청정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석가의 사유가 다른 종교 창시자들과 다른 점은 우리가 도덕적인 실천을 해야 하는 그 이유에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들은 선을 행하여야 하는 이유와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신의 심판내지는 사후세계에서의 보상으로 여기고 있다.이에 반하여 석가는 사후세계의 보상에 대한 기대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1]

 

석가는 올바른 사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 첫째가 욕망을 제거하는 사유이고, 둘째가 분노를 제거하는 사유이고 셋째가 폭력을 제거하는 사유이다. 그렇다면 욕망을 제거하는 사유는 무엇일까? 이는 다섯 가지 종류의 감각적인 쾌락의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 그리고 촉각으로 말미암아 발생되어지는 감각적인 쾌락의 위험성을 알아서 피하거나 제어하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세상에는 다섯 가지 티끌이 있으니, 새김을 확립하고, 그 제어를 배워야 하니,

즉 형상, 소리, 냄새, 맛 그리고 감촉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야 한다. (Stn.974)

 

다음으로 분노를 없애는 사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가 욱하고 성내는 것을 점차로 줄이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석가는 분노를 없애는 사유를 하기 위해서 자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자애는 무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즉 자애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편애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자애는 순간적인 동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애정과 같은 감각적인 사랑은 더더욱 아니다. 그 이유는 애정이나 동정심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자면, 애정이나 동정심과 같은 감각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다른 대상에게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가 말하는 자애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 무아적인 사랑을 말한다.[2] 석가는 자애의 마음을 외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낌없이 생명을 바치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비유한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Stn.149)

 

그러므로 자애의 마음을 통해서 분노를 없애는 사유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우리가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사랑을 가진다면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나 미워하는 마음은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으라고 권고한다,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마음을 새기게 하여지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청정한 삶이옵니다. (Stn.151)

그리고 탐욕에서 떠나 죄악을 제거하고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으니,

밤낮으로 항상 방일하지 않아서 모든 방향으로 그 한량없는 마음을 채웁니다. (Stn.507)

 

자애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분노나 증오로 인해 남을 속이거나 헐뜯거나 고통을 주는 행위를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애의 경>에서 석가는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지 말고 헐뜯지도 말지니,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분노 때문이든 증오 때문이든, 서로에게 고통을 바라지 않나이다. (Stn.148)

 

그러기에 올바른 사유를 하는 현자(아라한)는 한량없는 지혜와 더불어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분노를 몰아내고 더 나아가 이기적인 자아조차도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허위나 독단을 지니지 않고, 탐욕을 떠나, 내 것을 두지 않고, 바램을 떠나고,

분노를 몰아내고, 자아를 소멸시키고, 슬픔의 때를 제거한 님이니 (Stn.469)

 

마지막으로 폭력을 없애는 사유는 사랑의 보충적인 개념이다. 이는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연민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즉 잔인하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사고를 제거하려는 비폭력적인 사유를 말한다. 그렇다면 석가가 말하는 자애와 연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이렇게 답변한다,

 

자애가 모든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특징을 지녔다면 연민은 비폭력의 사유로서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특징을 지녔다. 이러한 연민은 자애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같은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노병사의 고통 속에서 속박되어 있다는 깊은 자각에서부터 출발한다.[3]

 

만일 자애가 자기 중심적이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라면, 연민은 다른 대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애의 마음위에 연민의 마음을 더하라는 것이다. 연민은 모든 생명체가 병들 수밖에 없고 또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에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다른 생명체에 대한 폭력적인 태도는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석가가 말하는 자비의 실천은 연민(폭력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성품)과 자애(분노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성품)가 합쳐질 때에 비로소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유는 모든 존재로 향하는 우리 자신의 비폭력적이고 무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4]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를 아끼고 보호하라는 석가의 권고는 바로 비폭력적이고 무아적인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들에게도 삶은 사랑스러우므로 그들의 존재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여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아라.[5]

 

 

2. 석가가 말하는 무아적인 사랑과 예수가 말하는 무아적인 사랑은 무엇이 다를까?

 

놀라운 것은 석가가 말하는 비폭력적이고 무아적인 사랑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38-44)

 

또한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비폭력과 무저항 정신을 말이다. 마태복음 2645-52절은 이러한 예수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을 잘 보여준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 된 큰 무리가 칼과 뭉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결국 예수가 가르친 비폭력적이고 무아적인 사랑은 석가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석가는 이러한 비폭력적이고 무아적인 사랑을 식물과 동물을 포함한 그 모든 존재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바로 예수와 다른 점이다. 예수의 무아적인 사랑은 좀 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각 개인의 영혼구원에 자신의 사역의 구심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석가의 초점은 삼라만상 안에 있는 그 모든 생명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기에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이 그리 크지 않다. 이러한 석가의 무아적인 사랑은 식물에게 조차도 적용된다는 것이 특이하다. 물론 동식물에게 조차도 적용되는 무아적인 사랑은 자이나교에서도 발견된다.  석가는 말한다,     

 

산 것을 죽이거나 죽이게 시켜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에 동의해도 안 된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폭력을 두려워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Stn.394)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올바른 사유가 바로 지혜의 묶음에 속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올바른 사유는 올바른 견해를 가지게 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생각의 유형이다. 결과적으로 석가가 주장하는 올바른 견해(사성제)가 진정으로 지혜로운 것이며, 이러한 지혜로운 견해를 가진 자는 올바른 사유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올바른 견해를 갖지 못한 자는 그릇된 사유를 하게 된다. 올바르지 못하고 그릇된 사유는 결국 욕망의 사유, 분노의 사유, 폭력의 사유로 이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3. 석가는 다른 종교 창시자들과 무엇이 다를까?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특이한 점은 무신론자이고, 무아론자이며, 사후세계의 심판을 전혀 믿지 않는 석가가 도덕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의 실천은 사후의 심판이나 보상을 의식한 개인의 경건함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사후세계에서 새로운 신분을 꿈꾸며 현실세계의 질서를 성실하고 착하게 지켜 나가는 윤회적인 믿음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석가가 신을 부정하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리고 사후세계의 심판을 부정하기만 하였다면 그는 그저 니체와 같은 무신론적인 철학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석가로 하여금 불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로 거듭나게 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무신론자인 그가 도덕실천을 강조하며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경건한 철학자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주장한 자비와 무아적인 사랑을 평생 동안 몸소 행한 언행일치의 실천주의 철학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도덕철학은 <법구경>에서 잘 드러난다,

 

남을 꾸짖기를 좋아하지 말고 힘써 스스로 자신을 살펴야 하네. (법구경 006)

지으면 근심하고 짓고 나서 근심하나니 악한 짓 하고 나면 이래저래 근심하게 된다네.

저 같은 근심은 생각할수록 두려워서 죄를 보게 될 것이기에 마음이 두려우니라.

지으면 기쁘고 짓고 나서 기쁘나니 착한 일 하고 나면 이래저래 기쁘다네.

저 같은 기쁨은 생각할수록 기뻐서 복을 보게 될 것이기에 마음이 편안하니라. (법구경 015-16)

 

무신론자로서 도덕철학을 가르쳤고 또한 그 도덕을 몸소 실천한 점에서 석가는 다른 종교 창시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의 철학적인 가르침이 종교로 승화될 수 있었던 요인도 바로 이것이다.

 

4. 석가의 도덕철학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러나 기독교 철학자인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석가의 가르침에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들게 된다. 사후세계의 보상이나 심판이 없는데, 과연 우리가 선한 행위를 실천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보상이 없는 선의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된다. 어쩌면 석가의 도덕실천은 칸트의 도덕법칙과도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도 좌우되지 않는 무조건적인 명령, 정언명령의 두 번째 원리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도덕 법칙은 방법이나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동기가 좋지 못하거나 선하지 않다면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음은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진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또는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그리고 더욱 강한 감탄과 존경의 생각으로 마음을 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 주는 마음속의 도덕 법칙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칸트의 이런 도덕법칙은 사후세계의 심판이나 보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행한 선이나 악이 반드시 보상받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후세계의 심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이는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증명할 수 없더라도 인간의 선과 악이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신이 요청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사실을 니니안 스마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칸트는 실천적 견지에서는 도덕 법칙이 선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덕행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 짧은 생을 살면서 절대적인 선과 도덕적인 완성을 달성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만 거기에 가까이 갈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도덕법칙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적 차원에서 도덕법칙의 요청이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삶을 살아야 하며 결국에 신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온전한 행복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신과 불멸은 도덕법칙에 의해 요청된 실천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도덕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도덕법칙으로부터 신을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이다.[6] 

 

비록 칸트가 도덕법칙에 의거하여 신의 존재와 불멸의 삶을 요청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말하는 신이나 사후세계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거나 천국인지는 밝힐 수가 없다. 어쩌면 칸트가 생각하는 불멸이 힌두교가 말하는 윤회이거나 가톨릭이 주장하는 연옥일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트가 요청하는 신이나 불멸의 세계가 어떤 것이냐가 아니다. 인간이 도덕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보상이나 기대가 없이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신과 사후세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오히려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신과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물론 신이나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은 모두 헛된 것이 된다. 차라리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쾌락주의가 더 합리적인 사고일 것이다. 아무튼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곧 이 땅에서 선한 일을 많이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마태복음 1916-22절은 아주 잘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결과적으로 예수도 석가도 이 땅에서 보물을 쌓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가르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가 있다. 예수는 천국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고, 석가는 그러한 사후세계의 보상은 없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문제는 석가가 가르치는 아무런 보상이나 기대가 없이 행하는 도덕적 실천에 대하여 칸트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이다.[7] 

 

5. 석가가 말하는 무아적인 사랑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석가가 말하는 자애와 연민 등의 무아적인 사랑은 결단코 외부에서 주어지는 초월적인 사랑이 아니다. 이는 무아적인 사랑이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타락을 가르친다. 그것도 전적인 타락을 말한다.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9-12)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할 정도의 선을 행할 만한 내적인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석가는 인간이 스스로 온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한 무아적인 사랑을 드러낼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선이나 도덕적인 실천은 그 모든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심판자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제시하는 기준, 즉 율법에 비취어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석가는 그러한 신은 존재하지 않기에 신을 의식하거나 신의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세상 안에 존재하는 그 모든 생명들에 대한 무아적인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정리해 볼 수 있다.

 

기독교

a) 의로우신 하나님, 심판자 하나님을 전제한다.

b) 전적으로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전제한다.

 여기서의 선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도덕적이고도 거룩한 성품을 말한다.

c) 타락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d)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를 통해서 인간의 죄가 용서를 받고,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

f) 죄에서 용서를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선을 행할 능력(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초월적인 사랑)을 부여받는다.

 

불교

a) 의로우신 하나님이나 심판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b) 비록 인간 내면 안에 이기적인 탐욕이 가득하지만, 무지를 깨닫고 나면 그 모든 내적인 욕망과 갈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c) 탐욕과 갈애로 인해 발생하는 그 모든 번민과 고통으로부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d) 이러한 해탈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세계관, 즉 사성제(고집멸도)를 믿고 따를 때에 가능하다.

e)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에 무아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온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생명들에 대한 자비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석가가 말하는 무아적인 사랑이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보도되는 뉴스를 보자면, 사람들이 무아적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모든 종교들에게서 나타나는 성자들을 본다면 대부분이 초월적인 사랑에 이끌려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어떤 초월적이거나 신비한 능력을 힘입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석가가 보여준 무아적인 사랑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석가가 보여준 인본주의적 자비의 실천이 사실이더라도 그것은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돌연변이적 현상일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석가가 말하는 무아적인 사랑의 실천은 무신론적인 신비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

 

과연 무신론주의자와 신비주의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또 다른 의문인 것이다. 한마디로 석가가 외치는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한 그 무아적인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 신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비한 현상이 초월적인 사랑, 즉 외부적인 힘을 전혀 의지하지 않은 체로 인간 스스로 실행한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될 수가 있다. 그것은 석가가 실천한 무아적인 사랑은 우연히 나타난 돌연변이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가 가르치고 실천한 무아적인 사랑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고 너무나 희귀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반인들이 석가가 제시한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석가의 가르침이 그대로 후대에 전달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힌두교적 초월적인 사랑이나 신비가 대승불교를 통해서 다시 재현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연세대학교 윤병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승불교의 두드러진 특색은 유신론적 경향이다. 그것은 정토신앙과 약사여래 신앙과 관음신앙 등과 같은 기복적인 타력신앙과 밀교 등이다.[8] 이에 대해 충북대학교 정세근 교수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배경을 설명한다,

 

7세기의 중국의 현장과 8세기 한국의 혜초(704-787)가 본 대승불교는 분명 그렇게 힌두교화 하고 있는 불교였을 것이다. 비록 불교의 전성기에 어렵게 인도를 찾아갔지만, 그들이 목도한 것은 보리수 아래 정각을 얻은 단순하고 소박한 불교가 아니라 이미 여러 신상으로 현란하게 장식된 불교였을 것이다. 브라만교와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 낸 청정과 화합의 공동체는 점차 그 기본정신과는 거리가 멀게, 오랜 전통 속의 신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는 힌두의 여러 신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부처가 최고의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신의 화신으로 설명된다. 무한의 영역 속에 있는 신들이 역사 속에서 현존한 석가를 단연코 앞지른다. 부처를 믿지만 그는 절대강자 비슈누의 현신일 뿐이다. 끊어졌던 브라만의 전통이 회복되는 것이다. 화신은 화신일 뿐이다.[9]

 

결과적으로 석가가 가르친 무아적인 사랑은 일반인들이 실천할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수의 남다른 도덕주의자들이나 실천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하고 희귀한 현상에 속한다. 그 이유는 신이나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이 행하는 선함이나 도덕적 실천이 전혀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세상에서 무아적인 사랑을 보여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악인들의 악행조차도 심판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는 그 무아적인 사랑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회의감이 든다는 것이다.

 

사실 석가가 설파한 그 무아적인 사랑이란 것이 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그 초월적인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고전 13)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은 불자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아적인 사랑을 이 세상의 그 모든 존재와 생명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가능할까? 합리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지속적으로 무아적인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97.

[2] Ibid, 98.

[3]Ibid, 98.

[4]Ibid, 96.

[5] Ibid, 97쪽에서간접인용됨.

[6]종교와세계관, 178.

[7]다음은사후세계의보상이나심판이없는데, 과연우리가거짓말이나이간, 그리고남을은밀하게속이는악한일들을멈춰야정당한이유가있는가의문제이다. 물론사회질서를유지하기위해서불법적인것들, 특별히남에게피해를주는폭력이나사기, 도둑질등은제어당해야하겠지만, 외의눈에보이지않는악한것들에대해서우리가하지말아야정당한이유가없다는것이다. 그야말로국제사회의원리가하나는힘의원리이고, 다른하나는실리주의인데과연우리가그러한현상들을정죄할정당한근거가있는가에의문이든다. 나아가가난해서먹을것을훔치는자들을감옥에가두는일들이정당화될있는가에의문이다. 이러한현상들은도덕법칙의준수보다는사회질서의유지라는사회학적인이유가정당화될것이다. 

[8]종교간의대화, 155.

[9]윤회와반윤회,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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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25 [03:40]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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