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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6.25 [00:11]
과연 석가는 신비주의자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32]
 
정성민

1. 신비주의는 무엇일까?


신비주의는 신이라 불리는 초월자와 인간이 서로 하나가 되는 체험을 중시하는 종교적 사상이다. 신은 인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에 신과 인간의 합일은 참으로 신비한 현상이다. 이는 인간이 신에게 흡수되어서 자기라고 하는 정체성이나 틀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우리는 탈아 내지는 망아라고 부른다. 곧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슬픔과 걱정도 사라짐과 동시에 기쁨과 환희에 빠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황홀경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은 신과의 합일을 통해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향은 그 모든 유신론적 종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신과의 합일은 영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신과 하나가 되는 주체자로서 영혼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힌두교나 기독교가 경험하는 신비주의적 현상은 유사한 측면이 있다. 둘 다 유신론과 유아론을 주장하기에 그렇다. 먼저 기독교적 신비주의를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실을 요한복음 15장과 요한계시록 3장이 잘 설명해준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 15:3-4)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이와 같이 예수와 하나가 된 성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아마도 황홀경의 체험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7:37-39)

 

예수를 믿고서 죄사함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임할 때에 그 모든 세상 근심과 걱정은 물러가고 마음의 평안함과 기쁨이 넘친다고 말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6-27)

 

다음으로 힌두교적 신비주의는 요가로 설명할 수 있다. 요가는 어원적으로 자아를 통제한다는 뜻과 자아가 브라만에 흡수되어 하나가 된다는 뜻을 가졌다. 먼저 요가는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진정시키고 고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고요해지는 명상을 통해서 신비한 지식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다. 물론 진정한 자아는 바로 아트만이라 불리는 각자의 영혼이다.

 

그렇다면 신비한 지식은 무엇일까? 수행자가 요가 명상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신비한 지식은 바로 자신의 아트만, 즉 진정한 자아가 바로 창조의 신인 브라흐만과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범아일여 사상을 말한다. 결국 이러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음과 동시에 수행자의 자아가 창조의 신이며 우주의 영인 브라흐만에 흡수되어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신과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과 하나가 되는 동시에 흰두교수행자는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1]아마도 신과 하나가 되어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는 경험을 황홀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과연 석가는 신비주의자일까?


사실 이 질문의 답은 명료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석가는 절대로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자면, 석가는 신비주의를 열렬히 거부한 철학자이다. 보통 종교 창시자들은 신비주의적인 측면이 매우 강한데 반하여 특이하게도 석가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보통 종교라고 한다면 신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나 개인의 영적인 체험들이 그 중심내용이다. 그런데 석가는 그러한 신비한 체험들을 하나의 정신적인 현상으로만 취급한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영혼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현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왜 석가가 신비주의자가 아닌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수행자가 명상수행을 하는 중에 어느 순간 삼매에 들어가게 된다. 삼매는 마음의 통일, 곧 정신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이때에 어떠한 초월적인 정신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월지이다. 그렇다면 초월지는 무엇일까? 초월지는 명상수행을 통해 정신을 통일한 후에 얻게 되는 여섯 가지의 신비한 능력을 말한다. 곧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신족통은 무엇일까? 신족통은 수행자가 자신이 지닌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우주공간을 넘나드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다시 말해, 어떤 장소에나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산이나 강 그리고 어떠한 장벽에도 막히지 않고서 아무리 먼 거리라도 순식간에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초능력을 말한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여러 가지 초월적인 능력들을 즐긴다. 나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하고, 물속처럼 땅 속을 드나들고, 땅 위에서처럼 물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고,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날아다니고, 나는 손으로 이처럼 큰 신비를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고,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친다.[2]

 

그렇다면 과연 신족통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어쩌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능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적인 사고 볼 때에 신족통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신체가 어떠한 물질적인 장애도 없이 이 세상이나 우주 공간 어디에나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것은 정말 비과학적인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석가는 자신이 신족통을 즐긴다고 말하였을까? 더군다나 그 누구보다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철학자가 말이다. 이는 어쩌면 명상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세계, 즉 신체를 초월한 정신세계를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신족통에 대한 서술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체의 존재가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공간, , 성벽, , , , , , 범천, 육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위법적으로 조건적으로 발생된 연생이라고 한다면 무상하고 실체가 없으므로 어떠한 물질적 장애도 실제로 성립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사사무애적 자유가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이유에서 쁘레마씨리처럼 신족통을 염력과 같은 정신적 힘을 수행하는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3]

 

결국 신족통은 초월적인 신비한 능력으로 보기보다는 인간의 지닌 정신적인 능력의 확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천이통은 무엇일까? 이는 신들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다. 하늘나라와 지옥중생의 소리를 포함하여 모든 소리를 분별하여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청정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귀로

멀고 가까운 신들과 인간의 두 소리를 듣는다.[4]

 

과연 석가가 신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그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철학자인데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과연 신들의 소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만약 신들의 소리를 마음 속 깊은 곳에 들려오는 인간 내면의 소리로 해석한다면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마음의 통일을 이루어 해탈을 한 자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청명하게 들을 수 있다는 주장은 심리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설명한다,

 

이 능력은 별반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감각기관이 지극히 청정해지면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텔레파시나 전파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들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신들은 우리의 정신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화생으로서 마음에서 조건적으로 생겨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얼마든지 청정한 마음으로 그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5]

 

만일 라훌라의 주장대로라면, 신들의 소리는 마음의 소리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석가가 말하는신들의 소리를 듣는 능력은 심리학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천이통은 더 이상 신비한 능력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타심통은 무엇일까? 이는 다른 사람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두 꿰뚫어 보는 신비한 능력이다. 즉 모든 생명체의 마음을 읽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 이에 대해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여래는 중생들의 갖가지 성품을 여실히 안다…. 또 여래는 세간 중생들의 갖가지 경계를 여실히 안다…. 또 여래는 일체의 수행에 의해서 도달하는 각각의 경지를 여실히 안다. [잡아함경 제26684]

 

타심통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나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이해하고 난 후에 가능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타심통은 사람의 마음이 비슷하고 일정하다는 전제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이 지금 겪고 있는 속박과 고통, 그리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의 속박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해탈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타심통이다. 라훌라에 의하면, 타심통도 그렇게 신비한 능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타인의 마음의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로 숙명통은 무엇일까? 이는 자신의 무한한 과거의 삶을 모두 알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 즉 숙명통은 전생에 자신이 저지른 행위와 업보를 기억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즉 자신의 전생에 관한 초월지이다. 숙명통에 관하여 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또 여래는 과거 세상의 갖가지 일을 기억한다. 한 생에서 백 생, 천 생, 한 겁에서 백 겁, 천 겁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때 그곳에서 태어나서, 어떤 종족, 어떤 성, 어떤 이름이었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았으며, 얼마나 오래 살았고, 얼마나 오래 머물렀고, 어떤 신분으로 살았으며, 이러한 행과 이러한 인과 이러한 방식으로 그곳에서 죽어 이곳에 태어났고, 여기에 태어나서 저기서 죽었다라는 과거의 일을 여실히 안다. [잡아함경 제 26684]

 

그렇다면 과연 석가가 자신의 전생을 믿었을까? 과연 석가가 윤회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을까? 과연 윤회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실제적인 자연현상으로 믿었을까?  사실 석가가 윤회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에 대해 휴스톤 스미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는 영혼의 단독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윤회설을 믿기는 하였지만 당시 브라만 교도들이 믿는 대로의 윤회설을 믿지 않았다. 그는 같은 영혼이 영원히 존속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자기가 보는 바 윤회설을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등불을 켜서 그 불을 또 다른 등불에 옮기고 또 옮긴다고 하자. 그 때 맨 마지막에 옮겨진 불꽃은 틀림없이 처음의 그 불꽃과는 동일한 불꽃이 아니다. 그와 같이 같은 영혼이 영원히 존속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로서의 개체의 영혼은 그것으로 그치고 다만 한 등불이 다른 등잔에게 불씨의 역할을 하여 주는 것과 같이 다른 또 하나의 존재의 원인이 되어주며 원인-결과의 유대를 가질 따름이다...... 결국 윤회과정에 있어서 부처는 물체설을 부인한다. 물체설을 부인하는 까닭은 삼라만상의 생성 윤회 과정에 있어서 물체는 유한되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6]

 

스미드의 주장대로라면, 석가가 말하는 숙명통은 자신의 전생에 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생에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생과 지난 생을 이어주는 매체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석가는 이생과 전생을 이어주는 매체로서 영혼이라는 실체를 하나의 객관적인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전생의 기억이 현재의 기억으로 이어주거나, 아니면 과거의 의식이 현재의 의식으로 이어준다는 주장은 영혼과 같은 매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7]

 

다섯째로 천안통은 무엇일까? 이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력이다. 쉽게 말해,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일체의 생사고락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천안통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조차도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이다. 특별히 자신의 행위와 업보에 미루어 다른 사람의 행위와 업보조차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또 여래는 사람 눈보다 뛰어난 청정한 하늘의 눈으로 중생들이 태어나는 때와 죽은 때,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 천한 몸과 귀한 몸, 좋은 곳에서 태어남과 나쁜 곳에서 태어남은 다 그 업에 따라 받는 것임을 여실히 안다. [잡아함경 제26684]

 

숙명통은 자신에 관련된 업보를 기억하는 능력이라면, 천안통은 다른 사람의 과거의 업보를 알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숙명을 알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숙명조차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월폴라 라훌라에 의하면,천안통은 초월적인 능력, 즉 영적인 능력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곧 천안통은 육안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비록 수행자가 높은 수준의 선정(정신통일)의 단계에 들어가서 신족통이나 천안통의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8]

 

여섯째로 누진통은 무엇일까? 누진통은 명상수행을 통해 자신의 미래에 관한 가장 확실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이는 사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내지는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또 여래는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여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얻어 현법에서 증득한 줄을 스스로 알아, 나의 생은 다하고 범행은 갖추었고 할 일은 마쳐, 다시는 다음 생을 받지 않는 줄을 스스로 안다. [잡아함경 제26684]

 

라훌라에 의하면 석가는 앞서 말한 다섯 가지의 신통한 능력을 사실상 신비한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가 과거와 미래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초인적인 능력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교의 초월지는 동시대인들이 주장한 이것 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전지(모든 것을 안다)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결정론과 관계된 것으로 부정한다. 초월지의 체험 내용은 나중에 언급할 누진통을 제외하고는 일반적 감각내용과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지 않은 누구라도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9]

 

결과적으로 석가에게 있어서 초월지는 인간이 지닌 감각적인 능력의 계발과 확장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이통이나 타심통과 같은 신비한 능력은 신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확실한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이한 사실은 석가가 누진통만은 미래에 관한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가르쳤다는 것이다.[10]왜 그럴까? 아마도 그가 누구나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죽고 난 후에 있다고 믿는 사후세계나 윤회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상수행을 통해 선정(정신 통일)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 바로 석가의 주장이다. 이러한 석가의 입장을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붓다에 의하면 신이나 영혼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환상이며 공허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복잡한 형이상학이나 철학의 옷을 입고 있는 극도의 미묘한 정신적 투영에 불과하다.[11]

 

결론적으로 초월지는 시각능력과 청각능력 그리고 정신능력의 계발을 통해서 얻게 되는 아주 비범한 능력을 말한다. 하지만 초월지는 수행자가 자신의 감각능력을 스스로 계발하여 극대화 시킨 지극히 인간적인 능력이다. 이는 결단코 초월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수행자가 초월지라는 여섯 가지의 신비한 능력을 가졌더라도 자신이나 타인의 과거와 미래를 직접 지각하는 초월적인 능력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초월지의 체험내용은 일반적 감각내용과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지 않은 누구라도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12]

 

결론적으로, 초월지는 초월적 존재와 교통을 통하여 얻게 되는 그 어떠한 영적이고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지닌 감각적인 능력의 계발이다.[13]

 

3. 왜 석가는 전혀 초월적이지도 않은 초월지를 마치 아주 신비한 능력인 것처럼 가르쳤을까?

 

그 답은 아마도 석가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신과 합일을 꿈꾸는 힌두교적 신비주의가 대세인 고대 인도문화를 통해서 바라본다면, 신들의 존재나 윤회사상 그리고 신비주의에 관한 석가모니의 애매모호한 입장들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인도의 미신적이면서 신비주의적인 민간신앙을 잘 보여주는 신문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도에서 10대 소녀가 저주를 피하기 위해 반강제로 유기견과 결혼한 해괴망측한 일이 발생했다. 2014 9 3(현지시간) 바크로프트 미디어에 따르면 망글리 문다(18)는 지난달 30일 부족장의 뜻을 받들어 이 같은 엽기적인 결혼을 했다. 문다는 일반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면 그의 가족과 부족이 파멸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게 됐다. 하지만 유기견과 결혼한다면 모든 액운이 남편(강아지)에게로 옮겨갈 것이라는 해결 방안도 함께 들었다. 결국 소녀는 가족과 마을을 위해 희생하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 소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유기견과 결혼을 했고, 친족을 비롯한 모든 마을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문다는 "마을 사람들은 액운이 벗어났다고 기뻐했다"면서도 "강아지와는 정말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전했다. 한편 문다는 강아지의 이름을 쉐루로 짓고 함께 살아가게 됐다. 

 

이러한 힌두교의 민간신앙을 바라보는 석가의 입장은 어땠을까? 아마 참담하면서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석가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볼 때에 이러한 미신적인 신앙은 정말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신앙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가엾은 중생들을 가르치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신비주의를 인정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을 것이다. 이는 석가가 역사적이고 실체적인 윤회설을 믿지 않고 단지 상징적인 윤회설을 주장하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록 석가가 신족통, 천이통, 천안통, 숙명통, 타심통 그리고 누진통과 같은 초월지를 실제적으로는 인간적인 능력의 계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당시 힌두교 수행자들 가운데 유행하는 신비주의를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힌두교 수행자들은 신과 하나가 되는 영적인 체험을 믿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신비한 지식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창조주인 브라흐만과 아트만과 같은 영적인 존재를 하나의 실체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과의 합일을 이루고 난 후에 벌어질 다양한 신비적 경험이 따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빠니샤드의 사상가들은 요가체험의 기초 위에 이러한 지식을 신비한 직관으로 여겼고 그것이 아트만이나 브라흐만과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를 계시하는 것으로 여겼다.[14]

 

4. 성경에 나타난 초월적이고 신비한 경험들

 

신기한 것은 초월적인 지식이나 능력은 성경에서는 너무나 흔하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거나 신의 음성을 듣는 일, 아니면 사람의 앞 일을 예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의 세계이다. 유신론과 유아론을 믿는 종교들에게 있어 초월지와 같은 신비한 능력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유신론적 종교들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과 하나가 된 자들에게 영적으로 신비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일 수 있고, 미래를 예언하는 일이 될 수 있고,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영적이고 신비한 사건들은 힌두교나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독교는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능력을 성령의 은사라고 부른다. 성령의 은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곧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과의 합일을 이룬 자들에게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신비한 은사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으로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4-5, 7-11)

 

하지만 석가가 기독교가 말하는 신비한 은사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신과의 합일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신비주의적인 입장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초월지의 신비한 능력을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입장에서 해석하지 않고 단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가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석가는 합리주의자이다.

 

 

 

 

 



[1] A.L. Herman, A Brief Introduction to Hinduism (Boulder: Westview Press, 1991), 80-87.

[2]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150-51쪽에서 간접인용.

[3] Ibid, 151,

[4]Ibid, 151쪽에서 간접인용.

[5] Ibid, 152.

[6] Ibid, 86-87.

[7] Ibid, 154.

[8] Ibid, 156.

[9]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156-57.

[10]Ibid, 156.

[11]Ibid, 160.

[12] Ibid, 156-57.

[13] Ibid, 150.

[14]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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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11 [05:40]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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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개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연재이미지1
예수와 석가가 꿈꿨던 세상의 차이는?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2)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1)
석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올바른 집중은 무엇일까? (2)
올바른 집중은 무엇일까? (1)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2)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1)
올바른 정진은 무엇일까?
올바른 생활은 무엇일까?
성 생활에 관한 예수와 석가의 차이는?
올바른 행위는 무엇일까?
올바른 언어는 무엇일까?
올바른 견해는 무엇일까?
올바른 사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팔정도란 무엇일까?
건강한 금욕주의는 무엇일까?
석가가 깨달은 중도는 무엇일까?
과연 석가는 신비주의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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