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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나의 여인
김윤희 박사의 구약의 조연들
 
김윤희   기사입력  2018/08/01 [10:50]

삼손의 탄생 스토리(13장)를 제외하고 나머지 삼손의 사역 스토리(삿 14~16장)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가 14~15장이고, 두 번째가 16장인데, 각 부분의 끝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15:20; 16:31)는 동일한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두 스토리의 독립성과 연결성을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독립성이라 함은 두 스토리가 각각의 구조와 다른 등장인물과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고, 연결성이라 함은 두 부분이 모두 그의 탄생 스토리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한 대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는 예언의 성취를 기록하고 있다.

딤나의 여인은 첫 번째 부분의 스토리 속에서 등장하며 삼손의 삶 속에서의 첫 여인으로도 명성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주인공은 물론 삼손이며, 그의 적대자(antagonist)의 역할은 블레셋 사람들이며, 딤나의 여인은 어디까지나 조연 중의 조연이며, 두 부류 사이에서 불행한 종말을 맺는 또 다른 이름없는 사사기 속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단순히 ‘딤나에 사는 블레셋의 딸 중 하나’로 불린다.


딤나 여인에게 반한 삼손

이야기의 시작이 진행되기 전에 13장 마지막 절에서 저자는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삼손에게 감동하시니라’(13:25)고 기록함으로 그의 탄생 스토리와 함께 그의 사역에 대한 커다란 기대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14장에서의 진행 상황을 보면 ‘지도자 삼손’이 아닌 ‘개인 삼손’의 이야기가 나오며, 그것을 통하여 그는 사역을 했다기보다는 자기 삶의 욕구에 충실한 인물로 나온다. 이야기의 발단은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그녀를 아내 삼기를 원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가 그녀를 ‘보았다’(3절)든가, 그녀를 ‘기뻐하였다’(원어 그대로 하면 ‘그 소견에 옳았다’; 7절)는 표현은 사사기에서 전형적으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표현한 “모든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는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즉, 저자는 삼손을 통하여 현재 이스라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는’(3:6) 패역함이 일상화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셨듯이, 이번에도 그를 통하여 블레셋을 치려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계획의 손길이 있음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4절은 삼손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 역할을 한다: “이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는 대목이다.

사자를 죽이다

삼손 스토리를 읽는 독자들이 궁금한 것은 어떠한 식으로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시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러한 구성을 조성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삼손과 수수께끼’라는 재미있는 공식이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의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 ‘어린 사자의 공격’이다. 삼손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 어린 사자가 공격을 한다(5절). 이것이 여호와께서 보낸 것인지 우연인지를 구별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사자를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여호와께서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6절)라는 구절이다. 삼손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분명히 한다.

얼마 후에 삼손이 여자를 보기 위해 다시 가다가 자신이 죽인 사자의 주검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목격한다. 파리나 구더기라면 몰라도 벌들이 시체에 거하는 것은 드문 사건이다. 이 자체가 기이한 현상이다. ‘벌떼’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벌 집단’(히브리어로 ‘에다’)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집단’이라는 단어는 주로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일컬을 때에 자주 사용된 단어이다. 저자는 이런 단어 사용을 통하여 사자의 주검과 같이 썩어가는 세상 속에서도 꿀을 낼 수 있는 ‘벌집단’을 보여 주며, 이것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역할이어야 했음을,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명상할 시간도 없이 삼손의 행동은 다시 말초신경적인 것으로 즉각 옮겨 간다. 그는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도 먹게 한다(9절).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의 서원을 한 자들에게 금한 세 가지 요소가 있다(6:1~8). 첫 번째는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라는 것이며, 셋째는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삭도를 머리에 대는 사건은 나중에 나오는 사건이지만, 여기에서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금지된 경계를 마음껏 넘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딤나의 포도원, 주검을 만짐, 주검에서 취한 것을 부모에게까지 전달하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다. 삼손이 이러한 사실을 부모에게 고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9절) 무엇인가 삼손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독자의 고개는 계속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다. ‘뭐 이런 사사가 다 있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사를 통해 어떻게 블레셋을 치시겠다는 것인가?’라는 계속되는 의문들만이 꼬리를 물 뿐이다.

삼손의 수수께끼

삼손의 결혼 잔치가 베풀어진다. 여기에서도 ‘잔치’(히브리어로 ‘미쉬테’)라는 단어는 ‘술 잔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삼손의 위험한 장난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술기운 때문일까? 삼손은 자신이 경험한 기이한 사건을 가지고 수수께끼를 낸다. 내용은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14절)이다. 히브리어에서 자주 사용하는 평행법을 이용해서 보면 ‘먹는 자와 강한 자’가 서로 짝이고 ‘먹는 것과 단 것’이 서로 짝을 이룬다. 그러니까 강한 자는 사자이고 단 것은 꿀이라는 답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삼손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만들어 낸 것이므로 억지적인 요소가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유희가 아닌 물질을 건 내기라는 것이다. 지는 쪽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로 번지고 있었다. 그 증거가 15절에 잘 포착되어 있다. 수수께끼에 참여한 잔치의 손님들은 답을 찾지 못하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며 그녀에게 답을 알아내도록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녀와 그녀의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15절)고 윽박지른다. 여기에서 보면 ‘소유를 취한다’는 단어는 여호수아에서 가나안 땅을 ‘취한다’(‘정복한다’) 할 때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단어로써 저자는 은근히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취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결혼 잔치라는 여흥 속에서 협박을 당한 삼손의 아내가 될 여인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살기 위해 삼손을 조르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딤나의 여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녀는 울면서(왜 이럴 때 여인들은 주로 울음을 사용하는 것일까? 그 만큼 효과가 있기는 있는가 보다.)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16절)라고 말한다. 마치 신파극의 한 장면처럼 울며불며 자신을 사랑한다면 답을 가르쳐 달라고 애걸한다. 남자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펴 가며 울음의 강도를 적당히 조절해 가면서 연기하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극단적인 두 단어를 대조시켜 가며, 그것을 수수께끼의 정답과 연결시키는 약간 유치한 듯한 설득 작전을 읽으며 이런 방법이 삼손에게 먹혀 들어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녀의 말 속에서 몇 가지를 관찰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딤나의 여인은 ‘우리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삼손과의 한계선을 분명히 긋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충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간의 긴장감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사건이 어떠한 결론으로 이어질 것인가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다.

두 번째, 삼손이 여인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음을 엿볼 수 있다. 딤나의 여인은 ‘사랑한다면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삼손의 말을 인용해 따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삼손과 여인의 사랑의 두께이다. 그야말로 피부 두께 정도의 피상적인 관계이다. 두 사람 사이에 애정과 신뢰가 있다면,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삼손을 남편으로 진정 생각한다면, 오히려 진실을 터놓고 삼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비록 협박을 당하기는 했지만, 삼손에 대한 배신과 거짓이 유일한 방법은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결국 ‘적과의 동침’의 한계성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삼손의 결혼의 모습을 통하여 저자는 당시 이스라엘과 가나안 백성의 연합에 대해 간접적으로 부정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딤나의 여인의 논리에 대해 삼손도 반박은 한다. 부모에게도 밝히지 않은 비밀을 어떻게 그녀에게 밝히겠냐는 것이다. 이 말 또한 분석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가 있다.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므로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다는 이야기도 되고, 또한 부모보다도 그녀는 덜 중요하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또한 사랑하는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 사랑하는 아내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이 사랑의 여부를 결정할 이슈는 아니라는 논리도 성립된다. 어쨌든 딤나의 여인은 사투를 건 필사적인 노력을 했을 것이며, 그 결과 삼손은 백기를 들었다. 딤나의 여인은 그것을 ‘그녀의 민족’에게 알려줌으로 일단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7절). 이것이 더 화근이 될 줄은 짐작도 못하고 말이다.

희생당한 딤나의 여인

본문은 “제 칠일 해 지기 전에”라고 함으로 수수께끼의 약속된 시한의 마지막 순간까지 블레셋 사람들이 기다렸음을 알려 주고 있다. 삼손에게는 더욱 약이 오르는 순간이다. 그들은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18절)라고 하며 삼손의 수수께끼 내용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하여 답을 준다. 어떤 성경 학자들은 여기에 깔려 있는 복선의 의미로써 삼손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무엇이 삼손보다 강하겠으며 무엇이 사랑(꿀)보다 달겠는가?’라는 것이다. 사자의 경우에도 강한 것이 단 것에 의해 점령당했듯이 삼손의 경우에도 사랑하는 여인에 의해 본인이 당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삼손도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고 응수한다. 암송아지로 밭 가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답을 알아냈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부당함 때문에 화가 난 삼손에게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크게 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수께끼 내기에 건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마련하기 위해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주고는 아비 집으로 올라가 버린다. 드디어 삼손과 블레셋의 접전의 1라운드가 시작과 동시에 삼손의 승리(30명의 죽음)로 끝이 난다. 삼손이 집으로 가버리자  장인은 그 딸을 결혼식에 참석했던 자 중의 하나에게 주고 만다. 이것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지를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얼마 후 삼손은 염소새끼를 선물로 가지고 다시 자신의 아내를 찾아온다. 결혼식 끝에 떠나 버렸기 때문에 아직은 부부의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침실로 들어가 아내를 보고자 한다’는 삼손의 말 속에서 결혼식의 마지막 행사를 치르겠다는 의도로 들린다. 문제는 결혼이 취소된 것으로 생각한 장인이 그 딸을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낸 데에 있다. 그러나 장인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딤나의 여인의 동생을 대신 아내로 취하라고 제안한다(15:2). 이것이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들을 취급하는 방법이다. 어찌 되었든 이 사건은 삼손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상하게도 삼손의 분노는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민족적인 분노로 분출된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는 말 속에 충분히 함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여호와의 신’이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이것이 블레셋과의 접전의 2라운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5장 1절에 ‘밀 거둘 때에’라는 표현은 삼손이 300마리의 여우 꼬리를 둘씩 묵어 불을 붙인 홰를 달아 곡식 밭으로 내어보낸 배경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추수 때를 가리킴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생계에 치명적인 행동이다. 여기서부터 연쇄적으로 블레셋과 삼손과의 접전이 계속 일어난다. 엄청난 피해를 본 블레셋인들이 삼손의 행동의 원인의 진상을 조사해 본 결과 그것이 바로 그 딤나의 여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들은 삼손을 잡는 대신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살라 버린다(5:6). 그녀가 강조했던 ‘그녀의 민족’에 의해서 그녀가 피하려고 남편까지 속인 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결국 자기민족에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에 대해 복수를 해 주는 쪽은 삼손이다. 분노를 느낀 삼손은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8절) 본인은 일단 몸을 숨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또 다른 접전으로 이어지며 천 명의 블레셋인을 나귀 턱뼈로 쳐 죽이는 라맛레히의 놀라운 신화를 창조한다. 삼손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딤나의 여인의 이야기는 그녀와 그녀의 아비의 죽음으로 여기에서 일단락된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폴진(Polzin)이라는 학자는 본문을 분석하며, 등장인물 모두가 나름대로 확신에 차 있지만 모두가 진실에서 벗어나 있음을 지적한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에게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14:3)고 확신에 찬 불만을 나타냈으나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14:4)이라는 진실에는 무지함을 보여 준다. 삼손은 수수께끼를 말하며 그들이 답을 맞추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14:12~13), 그들은 결국 답을 알아내었다(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블레셋인들은 딤나의 여인을 협박하며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14:15)고 반문하며 자신들의 소유를 보호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이것이 삼손에게 블레셋을 칠 수 있는 봇물을 열어 준 결과가 되어 버렸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 될 여인에게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14:16)라고 반문하며 자신의 입장의 옳음을 주장하였으나 곧 그 입장을 바꾸어 버리고 답을 누설한다. 삼손은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14:18)고 말하지만 이 경우에는 삼손 자신이 ‘하나님의 암송아지’임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대화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사는 모습’에 대한 판단을 내려 주고 있다. 그들이 자기 확신을 가지고 삶의 해결 방식을 제시할 때에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계획하심을 철저히 진행시켜 나가고 계심 또한 보여 준다. 그 분만이 진정한 주인이시고 주권자이심으로 그 분의 계획만이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분석을 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조명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하지 않은 목적을 설정해 놓고, 그 분의 방식이 아닌 삶을 살면서도 자기 확신에 차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 기만’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경기 방식대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누구의 계획과 경기 방식을 좇아 살고 있는지 각자 반문해 보자.

둘째, 딤나의 여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여성해방 신학자 (Feminist Theologian)의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 중에는 딤나의 여인의 운명에 대해 동정표를 던지며, 그녀를 ‘자신의 운명에 결정권이 없었던 여인’, ‘말 한마디 항거하지 못하고 동족과 복수 사이에서 희생된 여인,’ ‘남자들의 싸움에 말려 강요된 유혹을 요구 받은 여인’, 또한 그러고도 ‘배반녀, 유혹녀라는 억울한 누명을 다 뒤집어 쓰고 매도 당한 여인’으로서 평가받는 부당함에 항의를 던지며, 본문에 나오는 남자들은 이 여인에 비해 얼마나 더 악한가를(삼손을 포함하여) 부각시킨다. 사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여인에게 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도 이 여인의 죽음이 억울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각자의 인간적인 기준과 동정과 입장으로 주관적인 해석을 내려서는 안 된다. ‘억울하다’라는 관점으로 따진다면 그녀의 아버지도 만만치 않게 억울하다(15:6). 여우 꼬리의 불 때문에 당장 식량난에 허덕여야 하는 블레셋인들도 못지 않게 억울하다(15:5). 말 한마디 못하고 그야말로 졸지에 죽임을 당한 아스글론에서 살았던 30명의 블레셋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억울하다(14:19).

결국 본문의 사건을 누가 더 억울하고 누가 더 희생을 당했느냐로 풀어서도 안 되고, 단순히 ‘남녀평등’의 논지로 풀어서도 안 된다. 여러 신학적인 주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나안인의 멸망’과 그것에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과 그것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징계와 거기에도 무감각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삼손 부모의 영적 둔감성과 삼손의 방자한 충동적인 행동도 문제지만 당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던 블레셋인들의 간악함도 잘 부각되어 있다.

딤나의 여인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의존했던 ‘자기 민족’에게 배반을 당했으며, 삼손은 오히려 그 여인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위해 복수를 단행했고, 그 혼돈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고 계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거나 떠난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는 서로를 이용하고 희생시키는 악행만이 만연함을 보아야 한다. 그런 속에서 살 때에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으며, 딤나의 여인의 운명이 남의 일이라고 볼 수만은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끝이 올 때까지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셋째, 삼손의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먼저 본문에 나타난 혼인 관습에 대하여 소긴(Soggin)이라는 학자는 아랍 사회에서 통용되던 ‘차디카’ 제도와 연결시킨다. 사위가 신부의 부모와 모든 것을 결정하며, 신부는 친정집에서 살고 신랑은 일정하게 아내를 방문하여, 올 때마다 선물을 준비해 오는 제도이다. 본문의 내용과 이 제도가 비슷한 점이 많아서 제시된 것이지만 반대 의견도 많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여기에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지된 결혼을 하고 있으며(신 7:1~3; 삿 3:6), 이것이 영적 타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삼손의 결혼은 당시 시대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것을 보며 우리의 현재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결혼의 측면에 있어서도 영적인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서로의 인생의 반려자를 고르느냐는 우리의 영적 우선순위를 가름하는 잣대가 된다. 삼손은 외모적인 감각에 의해 딤나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러한 외적인 요소(외모와 세상적 조건 등)에만 이끌려 배우자를 결정하고 영적인 요소를 소홀히 한다면 거기에 따른 ‘눈물과 한숨’이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삼손의 결혼, 나의 결혼, 냉정한 영적 현실 평가가 필요하다.

▲ 『CRU2』의 공동 번역을 진행한 김윤희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가 교재 활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스파워


김윤희 박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신학교 석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FWIA(Faith&Work Institute Asia) 대표로 ‘일의 신학’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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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01 [10:50]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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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목사는 1982년 로마한인교회를 부임하여 지금까지 목회하고 있으며, 1993년 유럽목회연구원을 설립하여 선교사와 목회자들의 영적 재충전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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