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야를 휘돌아 굽이치는 강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더군다나 굽이치는 강물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
굽이친다는 것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의 입장에서 보면 갈 길을 가로막고 있는 굽이는 어김없는 방해물이요 거침돌이다. 그러나 굽이가 있기 때문에 속도 조절이 가능하다. 굽이가 없으면 유속(流速)은 점점 빨라진다. 강물이 흘러 갈수록 마침내 그 강 자체가 사람을 헤치는 흉기가 될 수 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액셀러레이터만 있는 자동차와 같다. 자연과 잘 조화된 굽이치는 강물은 뭇 사람의 다정한 생명의 벗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려가듯 살아간다. 힘든 인생살이에서 전진, 진보, 속도, 빠름이 분명 필요하지만 가끔 쉬어간다면 삶은 더욱 윤택해질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끊음을 조화롭게 잘 이루어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향기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대나무는 여느 나무와 달리 한 뼘 정도의 가느다란 두께를 가지고 하늘 높이 치솟으며 자란다. 그런 대나무는 아무리 심한 태풍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형성된 마디 때문이다. 만약 마디 없이 직선으로 무조건 자라기만 한다면 그 대나무는 쉽게 꺾이고 말 것이다. 성장과 마디의 신비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인 다하라 요네꼬 여사가 쓴 자신의 신앙 자서전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라는 책이 있다. 꿈 많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여고 시절에,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방황하게 된다. 결국 고3 때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게 되어 왼손과 양발을 잃는 삼지 절단의 장애인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겪고 난지 50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나이 70세가 되어서 “내 인생은 참으로 황홀했다”고 고백했다. 요네꼬 여사로 하여금 그처럼 황홀한 인생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고 보니 모든 것이 감사였다. 요네꼬 여사는 보지 못했던 영원을 보았고 영생을 얻었다는 고백을 했다. 인생의 상처로 인한 마디는 찢겨진 곳에서 더 큰 사랑이 피어나는 것이다.
강이 아름다운 것은 굽이쳐 흐르게 하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힘겨운 삶을 사는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고난의 굽이굽이가 속도를 제어하는 브레이크 같지만 새생명에 눈을 뜨면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그의 마디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바뀐 인생은 어떤 인생의 상처를 가진 마디일지라도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분이 쓰시려는 인생마다 그의 인생의 길목에 마디를 두셨다.(장석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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