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 (1)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인생을 어떻게 하면 극복을 할 수 있을까를 진정으로 고민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에 의하면, 이러한 고통스러운 인생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가 취하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선택이 있다고 한다.
그 첫째는 인생의 고통을 피하기를 선택하는 쾌락주의다. 이는 고통을 직면하지 않고 오직 회피하려고만 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육체가 줄 수 있는 그 모든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쾌락주의를 정죄하였는데, 그 이유는 쾌락주의가 육체를 사용하여 건전하지 않고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인생을 극복하기 위한 두 번째 극단적인 선택은 바로 고행주의인데, 이는 육체의 쾌락보다는 오히려 고행을 선택하는 것이다. 고행주의는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직면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자신의 육체를 즐겁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괴롭히고 고통을 더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고행주의 현상을 모든 종교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금욕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는 어쩌면 동의어로 볼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신적인 거룩함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절제, 제어 또는 억압하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행주의는 영혼은 순결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지고서 육신 안에 갇힌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한없이 괴롭히고 제어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인 선택 모두를 전적으로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선택들이 번뇌와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열반에 이르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감각적 쾌락에 관해 탐착하는 것을 일삼는 것이니 저열하고 비속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성현의 법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괴롭힘을 일삼는 것이니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90.에서 재인용)
이와 같이 석가모니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비결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는 이를 중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깨달음이 바로 열반과 해탈에 이르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성제, 즉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거룩한 진리의 네 번째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중도에 관한 가르침인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고요함,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Ibid, 91.에서 재인용)
중도에 대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불교성전>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부처님은 다섯 사문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였다.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사문들아,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는 길이 있다. 사문은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 치우친 길이란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쾌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너무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사문은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배워야 한다. 여래는 바로 이 중도의 이치를 깨달았다. 여래는 그 길을 깨달음으로써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여래는 육체의 쾌락을 따르는 길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의 길을 넘어선 곳에서 가장 올바른 길을 찾아낸 것이다. (윤병상, 종교 간의 대화, 142-43.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어떻게 해탈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중도를 깨달았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석가모니가 고행을 통해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서 중도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어떠한 고행의 길을 걸었으며, 왜 고행의 길을 중단하고 중도의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불교성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몸과 마음이 탐욕과 집착을 떠나 고요히 자리 잡고 있어야 그 고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싯다르타는 참담한 고행을 다시 시작했다. 싯다르타는 그 당시 인도의 고행자들이 수행하던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했다. 먹고 자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고 몇 톨의 낟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는 때도 있었다.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 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직도 완전히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넘지도 못했다.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고행을 계속했다...... 고행을 시작한지 다섯 해가 지나갔다. 지독한 고행을 계속해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고행에 대해 문득 회의가 생겼다.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괴롭히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맑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고요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고행을 중지하고 단식도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란자라 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씻었다.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소녀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를 얻어 마셨다. 그 소녀의 이름은 수자타였다. 우유를 마시고 나니 그의 몸에서는 새 기운이 솟아났다. (종교 간의 대화, 140-41에서 재인용.)
그 후로 숲 속에 들어가 석가모니는 그가 간절히 바라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중도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상태나 정도를 말하는 것이고 또한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도는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일상적인 삶의 이치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BC428-348)은 인간행위의 준칙으로 절제·용기·지혜·정의의 4덕(德)을 말하고 있는데, 이 덕은 균형과 조화라는 중용의 사상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충동과 욕망이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인간생활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며, 부족과 과도(過度)의 중간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는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양 극단 사이의 중간을 취하는 것이로되 수량적인 중간치가 아니라 최선성(最善性)의 위치에 서는 것을 말한다.
구약성경에도 이러한 중도를 가르치는 내용이 상당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신명기 5:32-33)
또한 잠언 30장 7-9절에 보면 잠언기자가 중도의 삶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어쩌면 이러한 중도의 깨달음이나 실천이 모든 종교의 이상이거나 공통분모라고 볼 수도 있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중도의 길을 가기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적절한 방법을 소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 Noble Eight-fold Path)이다.
팔정도는 사성제의 마지막 가르침으로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혹은 열반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 수단 또는 실천 덕목이다. 여덟 개의 길이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길은 나머지 일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여덟 개의 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일곱 개의 길이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기 때문에 서로 포용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팔정도, 즉 열반에 이르기 위한 여덟 가지의 올바른 길은 다음과 같다.
1. 올바른 견해
2. 올바른 사유
3. 올바른 언어
4. 올바른 행위
5. 올바른 생활
6. 올바른 정진
7. 올바른 새김
8. 올바른 집중
위의 여덟 가지 수행은 순서대로 하나를 수행하고 나서 다음 것을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덟 가지의 수행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각각의 수행은 다른 것의 수행을 서로 돕기 때문이다. 물론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어느 정도 동시적으로 수행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여덟 가지의 수행은 불교에서 세 가지 배움을 닦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92)
이 여덟 가지의 각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순서적인 묶음으로 구분된다.
1. 지혜의 묶음: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2. 계율의 묶음: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3. 명상의 묶음: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
첫째로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는 지혜의 묶음으로서 바로 여덟 가지 수행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올바른 견해는 수행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종착점이라는 것이 놀랍고도 새로운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은 수레바퀴와 같은 원형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팔정도는 올바른 견해로 시작해서 올바른 집중으로 끝나는 직선적인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 모든 8가지 수행의 길을 거쳐서 다시 올바른 견해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팔정도에서 올바른 견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동의하고 따르는 것이 팔정도의 근본이요 결말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세상을 바라보는 석가모니의 관점, 즉 세계관을 우리가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바로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해탈의 길이라는 것이다.
자, 이제부터 팔정도의 첫 번째 길,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첫 번째 길, 올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에 관하여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에는 번뇌를 수반하며 공덕을 갖추고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 있으며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에는 성스럽고 번뇌 없이 세상을 뛰어넘는 길의 고리인 것이다.
(Ibid, 94-95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우리는 석가모니가 말하는 올바른 견해는 결국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두 가지가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행위의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도덕적인 선과 악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업과 업보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행하는 각각의 행위들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행위의 주체자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지한 자에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겨난다면, 그가 만든 그러한 업은 크거나 작거나 무릇 자신이 받아야 하며 남이 받을 수 없다. (Ibid, 95.에서 재인용)
앞서 말했듯이 업은 정신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정신적인 의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업을 하나의 단순한 행위나 행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업은 바로 ‘의도적인 행위나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Ibid, 71), 더 나아가 ‘업보’는 단순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적이거나 의지적인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각자의 업에 대한 업보, 즉 그 책임이나 결과 혹은 보상은 그 행위의 주체자인 각자가 감당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가 곧바로 해탈의 길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업과 업보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윤회의 한계 안에서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추구하고 보다 높은 존재 상태를 얻는 데 합리성을 제공할 뿐이라는 것이다.” (Ibid, 95)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우리가 행하는 선과 악에 대한 도덕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도덕법칙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는 자연법칙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주체자인 각자가 자신이 행한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인데, 이는 궁극적인 해탈로 이어진다.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사성제, 곧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를 깨달아 석가모니가 주장한 세계관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발생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통찰하는 것,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라고 부른다.
(Ibid, 95.에서 재인용)
결국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 즉 사성제를 직관적인 통찰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 혹은 지식은 우리를 윤회의 전 과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해탈의 경지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성제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나 통찰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착점인 것이다. 결국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 곧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통찰력은 “진리를 꿰뚫는 올바른 견해”라고 부른다. (Ibid, 96) 한 가지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진리를 꿰뚫는 올바른 견해는 깊은 집중의 삼매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Ibid.)
결과적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사성제의 진리에 대해 우리가 이성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동의하고 따를 때에 시작되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 즉 인생무상, 무신론, 무아론, 사후세계의 부재 등에 대한 이성적인 동의를 한 자들만이 해탈의 길, 열반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무지의 탈출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무지(미신적이고 기복적인 힌두교적 신앙/저자 해석)로부터 탈출은 바로 유신론, 유아론, 사후세계의 존재, 실존적인 윤회사상과 그에 따른 인생의 무상하지 않음 등에 대한 힌두교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무신론, 무아론, 사후세계의 부재 그리고 상징적인 윤회사상과 그에 따른 인생무상에 대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석가모니를 구원자로 믿고 따르라는 그런 종교적인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독교 신앙과 비교한다면, 기독교는 예수라는 구원자를 믿는 것이 우선이지만, 불교는 석가모니가 가르쳐준 세계관이나 사고, 즉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길, 올바른 사유
올바른 사유는 올바른 견해를 가지게 될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유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세계관을 우리가 동의하게 될 때에 자연스럽게 지니게 되는 사고의 구조라고 볼 수도 있다. 올바른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도덕적인 실천의 주체자로 만들게 되는데, 석가모니의 사유가 다른 종교 창시자들과 다른 점은 바로 도덕적인 실천을 하는 이유에 있다.
보편적으로 종교들은 선을 행하여야 하는 이유와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님의 보상내지는 사후세계에서의 심판으로 보고 있는데 반하여 석가모니는 이러한 보상에 대한 기대나 처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Ibid, 97.) 석가모니에 의하면, 우리가 도덕적인 실천을 하는 이유는 단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무아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들에게도 삶은 사랑스러우므로 그들의 존재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여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아라. (Ibid, 97.에서 재인용)
석가모니는 올바른 사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그 첫째가 욕망을 제거하는 사유이고, 둘째가 분노를 제거하는 사유이고 셋째가 폭력을 제거하는 사유이다.
첫째로, 욕망을 제거하는 사유는 다섯 가지 종류의 감각적인 쾌락의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 그리고 촉각으로 말미암아 발생되어지는 감각적인 쾌락의 위험성을 알고서 피하거나 제어하는 것이다. (Ibid, 98)
둘째로 분노를 없애는 사유는 우리가 욱하고 성내는 것을 점차로 줄이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분노를 없애는 사유를 하기 위해서 자애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는데, 자애는 무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자애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자애는 순간적인 동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애정과 같은 감각적인 사랑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애정이나 동정심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좀 더 심리적으로 분석하자면, 애정이나 동정심과 같은 감각적인 사랑은 자아,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다른 대상에게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석가모니가 말하는 자애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는 무아적인 사랑으로서 분노를 없애는 사유를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다. (Ibid.)
마지막으로 폭력을 없애는 사유는 사랑의 보충적인 개념으로서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연민의 마음을 가지는 것인데, 이는 잔인하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사고를 제거하려는 비폭력적인 사유를 말한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말하는 자애와 연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불교학자 라훌라는 이렇게 답변한다,
자애가 모든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특징을 지녔다면 연민은 비폭력의 사유로서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특징을 지녔다. 이러한 연민은 자애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같은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노병사의 고통 속에서 속박되어 있다는 깊은 자각에서부터 출발한다. (Ibid, 98)
결과적으로 석가모니가 말하는 자비의 실천은 연민(폭력을 없애는 사유에 필요한 요소)과 자애(분노를 없애는 사유를 위해 필요한 요소)가 합쳐질 때에 비로소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유는 모든 존재로 향하는 우리 자신의 비폭력적이고 무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Ibid, 96)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올바른 사유가 바로 지혜의 묶음에 속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올바른 사유는 올바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사고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왜 올바른 사유가 올바른 견해와 함께 지혜의 장르에 속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올바른 사유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인 어떤 영역에서든 진정한 지혜는 이러한 고귀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기적인 탐욕, 악의, 증오, 비폭력의 모든 생각은 지혜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Ibid.)
결과적으로 석가모니가 주장하는 올바른 견해(사성제)가 바로 진정으로 지혜로운 것이며, 이러한 지혜로운 견해가 가진 자는 올바른 사유를 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반대로 올바른 견해를 갖지 못한 자는 그릇된 사유를 하게 되고, 이러한 그릇된 사유는 욕망의 사유, 분노의 사유, 폭력의 사유로 이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특이한 점은 무신론자이고, 무아론자이며, 사후세계의 심판을 전혀 믿지 않는 석가모니가 도덕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의 실천은 신을 심판이나 보상을 의식한 개인의 경건함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사후세계에서 새로운 신분을 꿈꾸며 현실세계의 질서를 성실하고 착하게 지켜나가는 윤회적인 믿음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석가모니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리고 사후세계의 존재나 심판을 부정하기만 하였다면 그는 그저 니체와 같은 무신론적 철학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석가모니로 하여금 불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로 거듭나게 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무신론자인 그가 도덕실천을 강조하는 경건한 철학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주장한 자비와 무아적인 사랑의 실천을 평생 동안 몸소 행한 언행일치의 실천주의 철학자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석가모니를 다른 종교 창시들로부터 차별화시키고, 그의 철학적인 가르침이 종교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자인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여러 가지 모순점이나 의문점들이 들게 된다. 그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사후세계의 보상이나 심판이 없는데, 과연 우리가 선한 행위를 실천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보상이 없는 선의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회의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석가모니의 도덕실천은 칸트의 도덕법칙과도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도 좌우되지 않는 무조건적인 명령, 즉 “정언명령”의 두 번째 원리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즉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도덕 법칙은 방법이나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동기가 좋지 못하거나 선하지 않다면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음은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진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또는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그리고 더욱 강한 감탄과 존경의 생각으로 마음을 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 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 주는 마음속의 도덕 법칙이다.
여기서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칸트의 이런 도덕법칙은 사후세계의 심판이나 보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행한 선이나 악이 반드시 보상받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합리적인 사고이고 이성적인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후세계의 심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인 것이다. 이는 신의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증명될 수 없더라도 인간의 선과 악이 보상되어지기 위해서는 신이 요청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니니안 스마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칸트는 실천적 견지에서는 도덕 법칙이 선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덕행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 짧은 생을 살면서 절대적인 선과 도덕적인 완성을 달성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만 거기에 가까이 갈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도덕법칙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적 차원에서 도덕법칙의 요청이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삶을 살아야 하며 결국에 신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온전한 행복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신과 불멸은 도덕법칙에 의해 요청된 실천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도덕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도덕법칙으로부터 신을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니니안 스마트, 종교와 세계관, 178.)
비록 칸트가 도덕법칙에 의거하여 신과 불멸을 요청한다고 할지라도, 그 신이나 사후세계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과 천국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칸트가 생각하는 불멸이 힌두교가 말하는 윤회이거나 가톨릭이 주장하는 연옥일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트가 요청하는 신이나 불멸의 세계가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인간이 도덕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보상이나 기대가 없이 한다는 것은 실천이성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신과 사후세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모니의 아무런 보상이나 기대가 없이 행하는 도덕적 실천에 대하여 칸트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을 할 수 있다.
2. 다음은 올바른 사유의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무아적인 사랑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올바른 견해의 결과가 올바른 사유라면, 이는 우리가 석가모니의 세계관인 사성제의 가르침에 이성적으로 동의하게 될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가 바로 무아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국 무아적인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을 넘어설 때에 우리의 내면, 즉 성품으로부터 우러나올 수 있는 자비로운 마음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무아적인 사랑이 현실적으로 정말 가능한가에 있다. 석가모니가 말하는 자애와 연민 등의 무아적인 사랑은 결단코 외부에서 주어지는 초월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무아적인 사랑이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타락을 가르친다. 그것도 전적인 타락을 말한다.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9-12)
결국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할 정도의 선을 행할 만한 내적인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하나님이라는 대상과는 상관이 없이 인간이 스스로 온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한 무아적인 사랑을 드러낼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선이나 도덕적인 실천은 그 모든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심판자를 의식하면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기준, 즉 율법에 비취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석가모니는 그러한 신은 존재하지 않기에 신을 의식하거나 신의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아의 집착을 버릴 때 세상 안에 존재하는 그 모든 생명들에 대한 무아적인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정리해 볼 수 있다.
기독교
1) 의로우신 하나님, 심판자 하나님을 전제한다.
2) 전적으로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전제한다.
여기서의 선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도덕적이고도 거룩한 성품을 말한다.
3) 타락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 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4)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를 통해서 인간의 죄가 대신 용서를 받고,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
5) 죄에서 용서를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선을 행할 능력(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초월적인 사랑)을 부여받는다.
불교
1) 의로우신 하나님이나 심판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비록 인간 내면 안에 이기적인 탐욕이 가득하지만, 무지를 깨닫고 나면 그 모든 내적인 욕망과 갈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3) 탐욕과 갈애로 인해 발생하는 그 모든 번민과 고통으로부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4) 이러한 해탈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세계관, 즉 사성제를 믿고 따를 때에 가능하다.
5)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린 무아적인 사랑을 통해 온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생명들에 대한 자비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석가모니가 말하는 무아적인 사랑이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보도되는 뉴스를 보자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무아적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모든 종교들에서 등장하는 성자들을 본다면, 대부분이 초월적인 사랑에 이끌려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지 그 아무런 초월적이거나 신비한 능력을 힘입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석가모니가 보여준 무아적인 사랑이 거짓이라고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비록 석가모니가 보여준 인본주의적인 자비의 실천이 사실이더라도 그것은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어쩌면 돌연변이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석가모니의 무아적인 사랑의 실천은 무신론적인 신비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인데, 과연 무신론주의자와 신비주의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가 또 다른 의문인 것이다. 한마디로 석가모니가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한 그 무아적인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 신비한 것이고, 이러한 신비한 현상이 초월적인 사랑, 즉 외부적인 힘을 배제한 채로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석가모니가 실천한 무아적인 사랑은 우연히 나타난 돌연변이적인 사랑이라는 논리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가 행한 무아적인 사랑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고 너무나 희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반인들이 석가모니가 제시한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대승불교에 그대로 전달되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힌두교적인 초월적인 사랑이나 신비가 대승불교를 통해서 다시 재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연세대학교 윤병상 교수는 이렇게 표현한다, “대승불교의 두드러진 특색은 유신론적 경향이다. 그것은 정토신앙과 약사여래 신앙과 관음신앙 등과 같은 기복적인 타력신앙과 밀교 등이다.” (윤병상, 종교 간의 대화, 155)
결과적으로 석가모니가 가르친 무아적인 사랑은 일반인들이 실천할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 소수의 남다른 도덕주의자들이나 실천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하고 희귀한 현상에 속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신이나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이 행하는 선함이나 도덕적 실천이 전혀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세상에서 무아적인 사랑을 보여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회의감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악인들의 악행조차도 심판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보여줄 수 있는 그 무아적인 사랑이 과연 가능하겠는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사실 석가모니가 설파한 그 무아적인 사랑이란 것이 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그 초월적인 사랑(고전 13장)과 전혀 다르지 않기에, 깨달음을 얻은 자연인(부처와 아라한을 포함한)이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아적인 사랑을 이 세상의 그 모든 존재와 생명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실천이성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과연 가능하겠는가의 의문은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다음 7번째 담화에서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즉 팔정도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