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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7.21 [02:02]
예수와 석가모니(2)
초기불교 사상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
 
정성민

두 번째 담론:

과연 석가모니는 무신론자인가?

▲ 사진은 곤잘레스 교회사 4권 표지    

 

 

석가모니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토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성이란 인간이 직면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생각들이었기에 ‘신의 존재’나 ‘우주’ 그리고 ‘사후세계’와 같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들과 거리가 먼 이상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다음은 ‘말룽끼야뿟따’라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그에게 한 우주와 사후세계에 관한 이상적인 질문이다.

 

존귀한 선생님이시여, 제가 홀로 명상할 때에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당신께서 설명하지 않은 것이 있다. 첫째, 우주는 영원한가? 둘째, 우주는 영원하지 않은가? 셋째, 우주는 유한한가? 넷째, 우주는 유한하지 않은가? 다섯째, 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여섯째, 영혼은 육체와 다른가? 일곱째,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여덟째,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아홉째,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열째,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도 하는가? 당신께서는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이 저에게는 못마땅합니다. 저는 존귀한 선생님께 이러한 것을 묻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에게 대답을 주신다면 저는 그 밑에 머물러서 거룩한 삶을 따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알고 계신다면 제게 설명해주십시오. (라훌라,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42)

 

이에 부처는 ‘독 묻은 화살의 비유’를 들어 말룽끼야뿟따에게 대답하였다.

 

말룽끼야뿟따여,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가 와서 그를 외과의사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했다고 하자. ‘나를 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 그가 귀족인지 바라문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그의 이름과 성은 무엇인지, 그의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그의 안색이 검은지 푸른지 노란지, 그가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서 왔는지를 알아야겠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고 하자. ‘나를 쏜 활을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 보통의 활인지 석궁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 말룽끼야뿟따여, 이 사람은 그 사실을 알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룽끼야뿟따여, 만약 어떤 사람이 ‘우주가 영원한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에 해답을 얻고서야 비로소 나는 부처 밑에서 거룩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는 부처로부터 그 해답을 얻기 전에 죽어갈 것이다. (Ibid, 44)

 

결과적으로 석가모니는 이상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인간이 처한 현실적인 괴로움을 풀어주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우주와 사후세계에 관한 그의 제자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인생은 고통 그 자체이기에 이러한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실제적인 방안이나 방법이 최우선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러한 인간의 삶은 우울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또한 절망스러운 것이다. 쉽게 말해, 신이나 자연으로서의 우주가 인간이 지닌 삶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석가모니에 의하면,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멈추는 것이 바로 열반인데, 열반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지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석가모니의 결론적인 입장을 한번 들어보자.

 

그러면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가르친 것이 무엇인가? 나는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했다. 말룽끼야뿟따여, 나는 왜 그러한 것들을 말했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신적인 고귀한 생활과 연관되어 있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그치고 곧바로 알아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가르쳤다.(45)

 

그렇다면 왜 석가모니는 신이나 우주와 같은 이상적인 질문들을 배척했을까?

그 이유는 단순한 것인데, 석가모니는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이 분명했던 것이다. 붓다의 무신론적인 사고에 대해서 라훌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다면 삶의 그 시작점이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삶이란 흐름의 근원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은 이러한 대답에 당혹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부처에게 ‘신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라고 물었다면, 부처는 서슴없이 ‘신은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는 자신의 대답에 결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Ibid, 63)

 

석가모니의 대표적인 가르침의 하나인 십이연기의 법칙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부정되는데, 연기의 법칙은 세상에는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물은 변하고 무상하며, 서로 인과관계로 조건 지워지고 상호의존적이기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연기의 법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여기서 이것이란 하나의 실체로서의 사물이나 대상을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원인과 결과 즉 인과적으로 얽혀있는 사건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잡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어서 해석한다. “이러한 사건이 있으므로 이러한 사건이 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남으로 이러한 사건이 생겨난다.” (Ibid, 162) 그러므로 연기법은 우리의 삶의 생성과 지속 그리고 소멸의 과정 속에서 그 모든 사건들이 서로 원인과 결과적으로 연관되어서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십이연기의 법칙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무명 (진리에 대한 무지, 특별히 부처가 깨달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의도적인 행위와 업이 발생한다.)

2. 형성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나 의도, 이를 통해 의식이 발생한다.)

3. 의식

4. 명색 (정신물리적인 현상)

5. 감역 (여섯 가지 감각기관)

6. 접촉

7. 감수

8. 갈애

9. 집착

10. 존재

11. 태어남

12. 늙고 죽음

 

이러한 십이연기는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살다가 죽는가의 실상을 인과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러기에 만약 십이연기의 과정을 거꾸로 살펴본다면, 모든 것들이 원점으로 돌아가기에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원점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삶과 죽음, 질병과 고통 등의 모든 괴로움은 자동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무명, 즉 무지가 사라지면 의도적인 행위나 업이 사라지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태어나고 죽는 인생의 고통이 더불어 사라지게 된다. 이로서 무지의 문제만을 해결한다면 궁극적으로 모든 괴로움과 고통이 사라진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또한 연기의 법칙은 그 모든 사물이나 사건이 서로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 혹은 존재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그 어떠한 존재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최초의 원인이나 변하지 않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데, 이는 최초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지는 창조자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인생은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것이다. 더 나아가 석가모니는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길 원했던 것이다.

 

인도의 신들은 자연종교적인 신들로서 의인화된 신들이다. 예를 들면, 우뢰의 신, 물의 신, 태양신, 폭풍의 신 등 수도 없이 많다. 이는 마치 그리스신화를 통해서 알려진 그리스의 신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신들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의인화된 신들인 것이다. 이들은 자연현상을 주관하는 각각의 신들이기에 인간들이 숭배하는 대상들인 것이다. 어쩌면 농경사회 속에서 풍요를 갈망하는 인간들의 토속적인 신앙이 이러한 자연종교를 가능케 했다고 본다. 다분히 기복적이고 미신적이지 않을 수 없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자연종교적인 신들을 부정하면서도 신의 존재에 관하여는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는 불가지론적인 무신론을 가르쳤던 것인데, 이는 힌두교의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기복신앙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현실과 타협하는 타락한 종교, 즉 힌두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종교철학자 파니카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전통 힌두교의 의인화된 신들을 인정하길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화신들처럼 의인화된 신들은 결국 신인동형설(anthropomorphism)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취향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신을 자기들 멋대로 규정하고 만드는 것을 거부하였다. 만일 궁극적인 초월자가 정말로 유신론자들이 말하는 바로 그 신이라면, 궁극적인 초월자로서의 그 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악과 부조리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석가모니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인 이유는 바로 신정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신정론의 문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에 발생한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이 세상에 악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성적인 논리가 성립이 되는데,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그 정반대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인간들이 범하는 도덕적인 악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재앙과 같은 비도덕적인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삶은 질병과 죽음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슬프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도대체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는 아우성을 들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관을 바꾸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유혹을 경험하게 된다.

 

다음은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 종교철학자 폴 니터의 주장이다.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현실이기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문제가 있거나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지난 2004년도에 인도네시아, 인도 그리고 태국을 강타하여 수십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쓰나미를 들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자연적인 대재앙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자연재앙도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자연재앙이 하나님의 높으시고 선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거나 혹시 막을 수 있는데 막지 않으셨다면, 이는 정말이지 비도덕적인 것이다. 쓰나미라는 엄청난 자연재앙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당화하기에는 너무나 비이성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이러한 비도덕적인 것으로부터 면제시켜준다면,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다. (니터, Without Budda, I could not be a Christian, 30)

 

이런 면에서 석가모니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에 대한 그 모든 책임으로부터 하나님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석가모니는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악이라는 아주 미묘한 실체를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기에 마침내 신의 존재를 포기해야만 하는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는 현실의 참혹함으로 인해 "신의 죽음"을 선포했던 19세기 무신론 철학자 니체의 실존주의와도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어쩌면 석가모니는 현대무신론 철학의 선구자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문제에 관한 석가모니의 입장에 대해 폴 니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석가모니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말하기를 꺼렸을 뿐만 아니라 악에 관하여도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리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문제에 관한 불교의 입장은 너무나 복잡하고도 논쟁적이다. 불자들은 어떤 사람이나 물건들 혹은 사건들을 악하다고 부르길 원치 않는다. 아마도 불자들이 어떤 사람이나 사건들을 악하다고 부르거나 규정을 짓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거나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나 상황을 악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그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 상황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될 것을 불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인 악에 관한 입장이었다면, 자연적인 재앙과 같은 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는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의한 것인가? 이에 대한 불자들의 답변은 기독교인들을 아주 놀라게 할 것인데, 바로 ‘우연히’ 아니면 ‘단지’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재해는 단지 바람의 움직임이나 지질층의 변화 아니면 온도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나 짐승들에게 전해지는 유전자적 결함조차도 마찬가지다. 그냥 그런 것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이유가 찾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거나 그냥 발생하기 위해서 발생된 아주 뜻밖의 일일 뿐이다. 그 어떠한 특별하거나 구체적인 이유는 없는데, 이는 그 어떠한 신적인 의지가 작용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연재앙이나 유전적 결함은 그냥 우연히 발생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냥 맞서야만 한다. 여기서 불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고통들을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니터, 39-40)

 

파니카는 석가모니의 무신론적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만일 우리가 유신론자로서 신에 관한 이미지나 개념에 집착하여 그것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한다면 석가모니는 그렇게 하라고 말할 것이지만, 역시 최고의 종교는 다신론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이라고 주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Raimundo Panikkar, The Silence of God: the Answer of the Buddha (New York: Orbis, 1989), 23.)

 

사실 인간이 신인동형설과 같이 하나님을 의인화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제거해버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꿈이나 소망을 성취하길 원하고, 또한 죽음과 질병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자연적인 재앙들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길 원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본능이기 때문이다. (Raimon Panikkar, The Rhythm of Being, 304.)

 

앞서 말했듯이 석가모니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든지 아니면 악의 최초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들은 우리의 실존적인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적인 생각들이기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고통스런 삶을 해결해줄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철학이나 사상이 아닌 그 이외의 형이상학적인 논쟁들은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이단적인 사상이라는 것이다.

 

비록 석가모니가 하나님의 존재를 침묵하면서 부정하거나 긍정하지도 않았지만, 소승불교를 중심으로 한 불교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그 어떠한 시도나 증거물들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모니의 사상이나 철학이 무신론적 체계로 간주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라훌라, 218.)

 

그러므로 불교가 어떤 초월적인 신이나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면에서 본다면 불교는 어쩌면 종교라기보다는 사상체계로 볼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만물은 저절로 생겨나서 변하다가 저절로 소멸되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간다고 가르친다.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종교라 말할 수도 있다.

 

19세기 미국의 철학자이며 심리학자인 윌리암 제임스는 불교를 무신론적 사상체계라고 정의한다.

 

세상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하나의‘신’을 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흔히 종교적이라고 부르는 사상체계들이 있다. 불교가 그런 경우이다. 물론 대중적으로 붓다 자신은 신의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불교체계는 무신론적이다...... 신을 추상적 관념성 안으로 증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신이나 초인간적 인격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주의 영적 구조에, 즉 만물 속에 내재하는 신성은 초절주의자들의 예배대상이다. (윌리암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90.)

 

파니카는 불교도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불교도는 어떠한 종류의 신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처럼, 사실 석가모니는 신의 이름을 제거하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하였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인간이 신처럼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신을 부정하면서 인간 내면세계를 파헤치고 관찰하는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측면’과 인간이 신처럼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종교의 신비적인 측면’이 서로 모순되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여 도에 이를 뿐만 아니라 신적인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 그 모든 독립적인 사람들에게 상당히 매혹적인 종교로 여겨질 수 있다. 윌리엄 페이든은 그의 저서 <종교의 세계>에서 불교를 욕망을 넘어서 순수함에 이르려는 자기정화의 길로 묘사한다.

 

초기 힌두교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불교는 자기 정화의 길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총체적인 종교체계이다. 불교의 체계에서는 신의 범주가 중요하지 않다. 불교도의 명상 안내서 <비수디막가/정화의 길>는 순수와 열반을 동일시한다. 불교의 체계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욕망을 제거한 상태인 열반이다. 욕망은 정욕, 탐욕, 성냄, 망상으로 향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올바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제시하는 팔정도는 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분별과 완전의 길이다. 팔정도에는 올바른 지식,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올바른 행동, 올바른 생활수단, 올바른 노력, 올바른 정신과 생각, 올바른 명상이 포함된다. 아마도 다양한 형태의 정신적인 불순함에 대해 불교만큼 체계적으로 분석한 종교 전통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좌부불교 전통에서는 승려가 순수의 길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상징이다. (종교의 세계, 203-04.)

 

결과적으로 석가모니는 세상과 구별되어 따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무신론적 세계관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탐욕이나 욕망을 제거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이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이 하나님을 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적 세계관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 인간과 자연의 분리, 인간과 인간의 분리라는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비춰진다. 그러기에 석가모니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제거할 화해 자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더 나아가 후대 불교에서 나타나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과 같이 중생들을 보살피는 보살들조차도 석가모니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존재들로 여겨질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자신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우리도 하나님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에 세상과 구별되어 존재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정말로 실재한다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진실여부는 바로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결국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진실성은 유신론이냐 아니면 무신론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면 면에서 석가모니의 사상은 기독교의 유신론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무신론적인 철학사상으로 간주되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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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0/21 [22:57]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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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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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미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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