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뉴스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박응규 교수] Explo ’74와 한국 교회사적 의미
박응규 교수(아신대, 역사신학)
 
박응규   기사입력  2024/09/07 [20:54]

 이 글은 박응규 교수(아신대, 역사신학)가 엑스플로 '74대회 50주년 기념문집에 기고한 것을 뉴스파워에 재게재한다. 가독성을 위해 각주는 생략하고 싣는다.(뉴스파워) 

▲ 엑스플로 '74대회     ©뉴스파워

1. 여는 말

1970년대 한국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도약을 위한 진통을 겪으면서 미래를 개척하던 시기에 놓여 있었다. 남북분단의 긴장 국면에서 6.25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군부 통치 시대 속에서 경제 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라는 과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서구에서 이룬 경제 발전과 민주화는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그대로 진행될 수는 없었고 한국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1970년대 한국은 경제와 정치의 총체적 문제를 안고 미래를 개척하던 시기였다고 특징화 할 수 있다.이 시기에 한국교회에 일어났던 엑스플로 ’74 대회는 급격한 변화와 위기를 경험하던 상황을 잘 극복하고 한국 민족과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잘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엑스플로 ’74의 역사적 배경을 1970년대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 대회에 미친 김준곤 목사의 영향력을 고찰하며, 엑스플로 ’74의 한국 교회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2. 엑스플로 ’74의 역사적 배경

2-1. 1970년대의 한국 사회

1970년대 초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월남전에 시달린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를 원했고, 또한 미국은 월남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북한은 계속 남침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반정부 운동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했지만,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안보를 염려하고 있었다.

 

또한 현재의 한국 사회와 교회의 특성을 이해하려면, 1970년대의 정치·문화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시대를 미국의 주요 언론보도를 중심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연구한 이영관은 이렇게 언급하였다.

 

1970년대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대통령에 이어 지미 카터 (Jimmy Carter) 대통령까지 주한미군 감 축을 추진하면서 안보에 대한 위협은 물론 미국에 대한 신뢰에 더 이상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동시에 625 전쟁 이후 칩거하던 북한의 김일성이 베이징과 동유럽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외교적으로도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던 시 기였다. 경제력 역시 1970년대 초반에는 북한에 뒤지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의 남침 위협 속에서 안보가 불안한 상황이었지만,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1970년대 한국인들에게 경제발전이야말로 최대의 열망이었고 또한 필수적인 과제였다. 저임금제도에 기반한 경제구조를 통해 추구하는 경제발전 정책은 비민주적 인권유린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사회적인 문제들을 양산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도 이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해 가는 경제적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비민주적 처사들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았다. 한국은 많은 위험성을 안고 있지만, 머지않아 저개발국가에서 개발도상 국가가 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고, 북한의 위협과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으로 비민주적인 정치체제를 묵인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도 존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그 시대의 한국은 민주주의가 파괴된 암울한 시기만이 아닌 생동감 넘치고 희망 또한 공존했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유신이라는 반민주적 체제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함께 가야 하는 가치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그렇지 아니했다. 세계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상황에서도 한국은 1974년 전반기에 15%라는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오히려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한 성장통이 정치보다 한국 내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고, 급격한 인플레이션, 구조조정 등이 사회문제가 되었고, 이런 고통이 정치적 이슈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에서 중산층의 형성에 있어서 새로운 요소가 부각되고 있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사회계층을 구분할 때 자신의 가족이나 교육 배경이 주요한 잣대였으나,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개인의 수입이 사회계층을 구분하는 잣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한강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자신의 노력과 교육을 통해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변화하는 한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한국은 더 이상 농업국이나 저개발국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한국인들에게 경제발전은 가장 중요한 과제였고, 이것을 추진하는 군사정부에 대한 신뢰와 민주주의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에 대한 사회적 과제가 심각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경제적 발전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헌신이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지만, 비민주적 인권유린이 1970년대 중반의 한국의 국가적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이르게 되면, 급속한 경제적 발전은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당시 미국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외국 언론들에 비쳐진 한국의 모습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내용도 많았지만, 대체로 획기적인 경제발전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위상은 경제발전과 함께 재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30년 전 잿더미에서 시작 해 기적을 이루어낸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의 시각이었지만 당시 냉전 시대의 분위기에서 미국의 위상을 볼 때 한국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더 이상 원조를 받아 연명하는 국가가 아니라 모든 저개발국가는 물론 개발도상국에도 모델이 되는 국가로 변모했다.

 

어느 시대나 사회와 같이, 1970년대 한국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모두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던 매우 생동감이 넘치는 역동적인 시기가 1970년대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시기가 현재 한국의 틀을 제공한 시기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시각이 시기와 상황에 따라 변화했지만, 이 시기에 한국의 위상에 대한 재정립의 과정이 전개되고 있었다.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한국은 6. 25전쟁 후 원조로 연명하던 국가에서 무역의 파트너로 성장했고, 미국의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로 성장하는 발판을 제공한 계기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유신체제로 인해 한국의 경제발전보다는 정치적 상황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미국의 시각에서는 유신체제 같은 반민주적 정부 체제에서 경제발전이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시장경제를 대변하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대해 원조를 삭감하거나 압력을 가해 한국정부의 정치개혁을 촉진해야 한다는 여론도 다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에서의 경제발전은 197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지속되었고, 그 영향으로 중산층이 태동하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구조에 변화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태동인 사회변화가 정치적이 아닌 경제적인 현상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중산층의 형성과 확산은 1980년대에 활발하게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산층의 태동과 확산은 한국교회 내의 평신도들에게 활발하게 전도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했으며, 다양한 신앙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2-2. 1970년대의 한국 교회

1970년대는 한국교회 100주년을 앞두고 각 교단이 경쟁적으로 교세 확장 운동을 펼친 시기였고, 이에 따라 교회 성장이 획기적으로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 장로교 합동 측은 1만 교회운동을 전개했으며, 통합 측은 연 300 교회 개척운동을 펼쳤다. 또한 감리교와 성결교도 교세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3년 하나님의 선교 원칙을 채택하여 사회구원에 관심을 보였던 장로교 기장 측도 다른 교단들이 교세 확장에 나서자 양적 성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각 교단은 전도와 교세 확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단 조직도 개편했으며, 교인들에게 전도훈련을 실시하였고, 부흥전도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시기 한국교회의 가장 큰 관심은 양적인 성장이었으며, 각 개교회, 지방회나 노회, 그리고 교단들이 경쟁적으로 다양한 부흥전도집회를 열었다. 또한 초교파적인 대규모 집회도 서울과 지방에서 개최되곤 했다. 1973516일부터 63일까지 지방 주요 도시와 서울에서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주제로 개최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전도대회와 19748월에 열린 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이하 CCC) 주최의 엑스플로 ’74, 그리고 19778월에는 32개 교단이 연합하여 600여 명의 강사를 동원했던 77 민족복음화성회는 각각 참가자가 연인원 수백만 명에 달한 대규모 집회였다. 1980년의 80 세계복음화대회는 한국교회의 성장 속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열린 집회들로서, 1970년대를 거치며 크게 성장한 한국교회의 자신감과 힘이 표출된 인상적인 사건들이었다. 그 후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1984년의 다양한 군중집회도 이와 같은 대형집회의 전통을 이어가며 한국교회의 성장세를 견인해 갔다.

 

특히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우선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고, 범 교단적인 조직을 만들며, 전도훈련을 시키고, 개 교회에 그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도록 조직화하였다. 이러한 조직화의 구체적인 열매는 바로 나타났다. 먼저 이 집회는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으며, 1973516일부터 전국의 9개 도시를 순회하며 집회를 열었는데 연인원 120만 명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530부터 63일까지 여의도 5.16 광장(현 여의도 공원)에서 대대적인 집회가 열렸다. 마지막 날엔 110만 명이 운집했고, 4일동안 연인원 320만 명이 참석하였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사에 있어서도 특별한 사건이다.”이 집회야말로 대중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효율적인 광고를 통해 기획되고 조직화된 대중 집회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야말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참여한 대중전도집회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으며,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처음으로 여의도 광장에 모인 대규모 집회였다. 그래함은 1949년에 열린 로스앤젤레스 전도대회를 통해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으며, 1954년 런던 대 전도대회를 통해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1974년에 이르게 되면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Losanne Congress on World Evangelism)와 엑스플로 ’74를 통해서 그는 세계 기독교의 대변인”(statesman)이 되었고, 각 개인들과 운동들을 통합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새로운 길을 잘 닦은 촉매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이렇게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미국의 복음주의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이자 부흥사인 빌리 그래함 목사의 능력 있는 말씀 선포와 한국 교계를 대표해 전체 조직 위원회를 맡아 지도력을 발휘한 한경직 목사, 미국 CCC 창설자 빌 브라잇(Bill Bright) 총재와 함께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던 김준곤 목사, 그리고 통역을 맡아 빌리 그래함 목사와 빌 브라이트 총재의 설교의 영향력을 드높여 준 김장환 목사와 박조준 목사 등의 역할도 1970년대 부흥운동과 대중전도집회의 긍정적인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대중전도운동의 열기는 단회적으로 그치지 않았다.

1974년 김준곤 목사가 CCC를 중심으로 한국교회를 결집하여 추진한 엑스플로 ’74는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를 통해 촉발된 부흥의 열기를 더 한층 고조시키고, 한국교회의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이 연합하여 대중전도운동과 함께 교회성장의 기운을 확실하게 자리 잡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집회에 대한 소식은 한국 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언론계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대중전도집회는 그 이후의 교회부흥을 견인하며 대중전도운동은 한국교회를 근대화시킨 원동력이었고, 놀라운 교회성장의 촉매 역할을 했으며, 복음주의운동을 발흥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해외선교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한국 교회사와 세계 교회사에 있어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한국 교인들에게 한국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었으며, 더 이상 한국사회의 변두리가 아니라 주류가 되었다는 의식을 갖게 해 주었다. 이 집회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일치를 보여 주었고, 한국인 및 한국 교인들의 저력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일련의 대형집회를 가지면서도 아무런 사고 없이 질서정연하게 치러진 것에 대한 일반 매스컴들의 평가도 매우 긍정적이었다. 또한 이 집회를 통해 한국 기독교가 공산주의에 맞설만한 반공의 보루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고, 북한과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에서 기독교야말로 대한민국의 체제를 수호할 수 있는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음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 집회를 통해서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민주 우방과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한국 기독교의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으며, 정치적으로 한미관계는 긴장과 위기에 처할 때도 있었지만, 양국관계가 상당히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대회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회가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세계 선교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집회를 준비하고 이끌어가면서 한국교회는 정부의 협력을 받으면서 비판의 빌미도 제공했지만,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반공을 매개로 정부와 서로 협력했다.

 

3. 엑스플로 ’74와 김준곤 목사

김준곤은 1970년대를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민족복음화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선포하면서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시대적 소명을 위해 함께 헌신할 것을 촉구하였다.

저는 한국의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복음화가 앞으로 기어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힘쓸 것을 결심하고 선언합니다. 70년대가 가기 전에 한국의 정치와 한국의 경제와 한국의 교육과 한국의 문화가 입체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해서 먼저 농촌 마을에 수천 명의 학생 전도대를 훈련시켜 파송할 것입니다.

 

민족복음화를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초고등학교들과 대학들이 복음의 황금어장임을 인식하고 학원복음화를 통해 이러한 사명을 구현해 나가자고 외쳤다: “추수할 곡식이 익어 있습니다.... 한국의 70년대는 그리스도의 시대가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남북통일도 예수의 혁명으로 이룩하도록 우리는 이 원단에 엄숙하게 결심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원대한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김준곤은 엑스플로 ’74를 개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는 개회사에서 그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여기 모인 단 한 가지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좇아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그 복음을 전할 보다 많은 사람을 보다 효과적으 , 보다 전략적으로, 보다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복음 전도의 최후 최대의 도전적 기회입니다. 인류 운명의 시간은 묵시론적 종말의 시점에 왔습니 .

 

김준곤은 이 시대에 주어진 복음화라는 과제를 단지 한국 민족만을 전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시대적 광기와 정신적 암흑의 정도가 사상 최악의 상황임을 부각시키면서, 이것이야말로 복음전도의 도전적 기회로 포착하고 종말론적 차원의 사명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또한 이러한 사명 완수가 교회사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임을 역설했다: “종교개혁의 주제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종교 개혁적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과 약속 조건만 순종하면 확실히 가능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1907년도에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이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회개운동과 전도운동이었다면, 1974년에 일어난 엑스플로 ’74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오순절이 세계 각국에 복음화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그 꿈과 기도가 훗날 이렇게 평가받기를 염원했다.

 

이것은 우리의 꿈이고 우리의 기도이기 바란다. 한국은 제2의 이스라엘이 되었다. 울시는 제2의 예루살렘처럼 성시화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사도행전이 연장되고 있다. 엑스플로 ’74에 세계 각국과 한국 각처에서 모였던 사람들이 믿음으로 성령에 충만함 을 받아 모든 나라의 문화와 사상과 종교적 장벽을 깨뜨리고 복음의 증인이 되어 일 본과 인도와 공산 진영까지 복음 전도의 불이 퍼져갔다. 한국은 공산주의를 신앙으로 완전히 극복하였다. 그 사건은 정신사의 분수령이었다. 영의 시대를 향한 새 장을 열 었다. 한국은 세계 사상 전례 없는 최초의 이상적 국가가 되었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수출하고 일본은 상품을 수출하고 프랑스는 자유를 수출하고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으 켰고 러시아는 공산혁명을 일으켰고 중공은 문화혁명을 일으켰고 서유럽의 사회는 섹 스 혁명을 일으켰는데 한국은 예수혁명, 성령의 혁명을 일으켰다. 한강변의 기적은 예수의 기적이었다. 그들이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성령의 계절이 그 땅에 왔다.

 

이것이 김준곤의 간절한 염원이었고, 또한 기도였다.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한국의 참가자들을 향하여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기도와 헌신과 그리고 결속을 다짐해야 함을 촉구하였다. 이 과업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독려하였다: “이것은 클라이막스가 아닙니다. 점화요 봉화요 서곡이요 출발입니다. 폭풍의 눈입니다. 신호의 폭발입니다. 선언입니다. 계속 각 교회마다 각 나라마다 연쇄폭발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불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마음, 자기 도시, 자기 나라의 복음화를 책임져야 하겠습니다.”

 

엑스플로 ’74는 한국 기독교계에 전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하게 심어준 영적 대각성 집회였으며, 학원복음화 운동의 방향성이 민족복음화와 더불어 세계선교로 전이(轉移)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973년에 열렸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에 이어 열린 엑스플로 ’74 대회는 1977년의 민족복음화대성회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197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이 대회로 말미암아 학원선교와 평신도 선교운동이 결합되어 민족복음화운동과 세계선교로 승화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교회성장을 견인해 가면서 그 방향과 목적을 바르게 세워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엑스플로 ’72와 더불어, 엑스플로 ’74CCC운동에 국제적인 정당성”(international legitimacy)을 부여해 주었다는 면에서도 그 역사적 의미가 지대했다.하지만 비판적인 보도도 있었는데, 주로 빌 브라잇이 여의도 광장에 모인 엑스플로 ’74대회 참석자들의 숫자를 과장했다는 점과 보다 예리한 비판은 그가 박정희 정권에 대해 취한 우호적인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김준곤을 비롯한 한국의 대부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유신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는데, 그 주된 이유는 반공에 대한 공유의식”(a mutual commitment to anticommunism)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중반은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남한에서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상황이 심각한 긴장과 갈등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브라잇은 1965년 한국을 방문하는 일정 중에 김준곤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그의 정치적 업적을 치하한 바도 있었다.

 

 

그리고 1971년 빌리 그래함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김준곤이 국무총리를 비롯한 여러 정치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했으며, 박 대통령에게도 영적으로 자문하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 언급하였다. 브라잇과 김준곤이 박 정권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배후에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냉전(Cold War)적 시각에서의 이해와 반공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하는 데에 자유가 보장되는 한, 정권을 굳이 비판하고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엑스플로 ’74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김준곤은 민족복음화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1978년부터는 세계복음화대성회를 준비하면서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의 비전을 꿈꿀 수 있는 작업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런 면에서, 19808월 여의도에서 열렸던 세계복음화대회는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눈뜨게 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결성되었고, 각 교단들마다 선교부가 조직되고 강화되어 수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또한 김준곤은 선교는 반드시 외국에 나가야만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국내에서도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선교는 선교단체나 선교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라도 선교할 수 있다는 새로운 선교개념을 한국교회에 도입하였다.

 

 

또한 대학생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된 단기선교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교회와 여러 기독학생들에게 신선한 선교도전을 주었고, 1990년대 이후 단기선교 여행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배후에는 김준곤과 한국CCC의 선교운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그런 면에서, 김준곤의 생애와 사역의 주기는 한국교회의 전도와 선교운동과 궤를 같이 하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정섭의 회상대로, 김준곤은 1960년대는 학원복음화에 정진하였고, 1970년대는 민족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80년대는 한국교회에 세계선교의 불을 붙였고, 1990년대는 평신도 선교시대를 활짝 여는 데에 줄곧 헌신해왔다고 할 수 있다.

 

CCC는 철저한 전도요원들을 개인전도와 민족복음화에 헌신하도록 철저하게 훈련하였으며, 전도훈련의 대상은 특정대상을 넘어 모든 교인을 전도요원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특히 엑스플로 ’74대회 이후, 한국교회는 전도훈련을 통한 성장의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전도훈련 요원들을 훈련하여 전도를 한 결과 교회 출석인원이 33% 증가했고, 목회자들도 개인 전도를 본격화했으며, 한국교회 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CCC와 함께 전도전략을 함께 사용하고 도움을 받은 합동측 교단에서는 1976년부터 19782년 사이에 교회수가 2,484개에서 3,684개로 약 1,200개의 교회들이 개척되었고, 신자의 수도 이 기간 동안 68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CCC는 미국 복음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중전도집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 한국의 교회들과 신자들이 소속된 교파나 교단을 초월하여 복음주의 신앙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연합하여 국내전도와 해외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세계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세계교회의 복음주의 운동이 자연스럽게 CCC를 통해 한국에 접목됨으로, 대중전도집회를 통해 한국교회의 회개의 역사와 부흥운동이 일어남으로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김준곤과 한국CCC는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상황에 적합한 순() 조직을 통한 성장방법인 사랑방 전도를 널리 보급하여 새로운 신자의 회심뿐만 아니라, 사랑방 조직을 통해 제자훈련을 받고 불신자를 전도할 수 있는 신자로 양육해 나갔다. 순 조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대사명을 소명으로 받아 민족을 완전 복음화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설정한 기한에 성취하려는 조직적이고 집약적인 전략으로 만들어졌으며, 순장은 처음부터 복음화의 사명을 위한 소명에 투철함을 전제로 출발한다. 김준곤은 순의 목적으로 전도, 육성, 파송으로 보았으며, 순은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그물이며, 또한 민족복음화 운동의 성취를 위한 전도와 육성과 파송의 작은 발전소라고 했다.

 

이러한 순 전도방법은 철저히 개인화된 육성법, 사랑의 모성법으로 사도행전적 분위기 속에서 육성하며, 순은 어머니 태처럼, 나룻배처럼, 학교처럼 많은 사람이 그곳을 거쳐 가는 동안 생산되고 키운다. 그리고 순은 사랑과 친교의 장소이며, 교육의 장소이기도 하다. 순은 반드시 세포처럼 무한히 번지고 들풀처럼, 고구마 순처럼 뻗어가는 생리와 힘을 가졌다.이와 같은 전도방법을 통하여 CCC의 순모임 운동은 한국에 복음의 토착화에도 지대하게 기여했다. 사회가 계층화되어가고, 인간적인 정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순이라는 작은 모임을 통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복음을 전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전당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리하여 복음을 교회의 건물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랑방으로 옮겨서 기독교 신앙을 한국인의 문화와 심성에 잘 맞도록 체화시켜 나갔다. 사랑방 전도는 사랑방 성경학교 운동으로 발전되어 전국 59천여 개의 농어촌 부락에 예수의 혁명이 일어나도록 하였다.

 

 

김준곤 목사가 엑스플로 ’74를 통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먼저, 김준곤은 무엇보다도 1970년대 청년대학생 전도와 한국교회의 전도와 부흥운동이 활성화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창립하고 청년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한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가 역동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년대학생들의 전도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피뭍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 주었고, 엑스플로 ’74를 전후한 대학생선교회의 활동으로 청년 대학생 전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공헌에 대해 이상규 박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당시 훈련에 참가한 청년대학생이 32만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60만 군대가 조국의 영토를 지키는 외적 방위 세력이었다면, 대학생선교회는 청년대학생들의 정신을 지키 는 내적인 방위군이었다. 비록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적 네오막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적 혼합주의로부 터 한국교회를 지키고, 이런 정도의 건실한 사회 국민 도덕의식을 견지하게 된 것은 대학생선교회의 기여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김준곤은민족복음화 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의 신념체계, 행동양식을 결정한 중요한 삶과 사역의 지향점은 민족복음화였다. 엑스플로 ’74의 표어였던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주장은 그의 민족복음화에 대한 간절한 열망의 표현이었으며, “모이게 하소서, 배우게 하소서, 전하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강력하게 이끌어 갔다. 결국 엑스플로 ’74의 기본정신은 철저하게 민족복음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 결실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가 그토록 외쳤던 예수 혁명과 성령 폭발은 민족복음화를 위한 핵심 표어였다. 엑스플로 ’74에 이어 1977년의 민족복음화대회, 그리고 1980년의 세계복음화대회를 통해 김준곤 목사는 “1907년 전후의 대부흥을 능가하는 1970년대 이후의 교회성장을 이끌었다. 그가 발의한 국가조찬기도회, 전군신자화운동, 성시화운동, 그리고 그가 주도한 대형집회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줄기찬 시도였고, 이런 노력이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 성장을 이끌었다.”

 

셋째로, 김준곤은 복음주의자로서 한국에서의 복음주의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신앙적 배경이나 신학교육의 여정을 고찰해 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복음주의자였다.그가 박정희와 전두환 등 군사정권 하의 시절을 살아가면서, “정치적 변혁보다 복음에 의한 변혁을 우선시했고, 제도의 개선보다 심령의 변화를 우선시했다. 그는 기도운동, 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전도자를 양성했다. 그가 개발한 전도지 사영리’(四靈理)는 복음주의 신앙을 보여주는 표준 전도지였다고 할 수 있다.”그는 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자유주의나 진보주의를 배격하고, 소위 민주민중운동, 진보주의 운동의 와중에서도 한국교회를 건실한 복음주의 교회로 세우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넷째로, 김준곤은 복음주의 신앙에 근거한 반공주의 형성과 통일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와 그의 가족은 해방과 6.25 동란을 겪으면서 공산주의자로부터 숱한 고난을 당하였다. 그의 부친이 전쟁 중에 공산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의 아내도 24세의 나이에 피살당하는 비극을 경험했다. 그 자신도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체험적으로 공산주의 유물론과 기독교는 병립할 수 없음을 절감하였다. 그는 남북을 가르는 38선을 영적 분계선으로 이해하여 유물론적인 무신론 공산주의와 유신론적인 기독교 신앙을 대칭적으로 이해했다. 북한 공산주의 김일성 정권을 가장 악랄한 반신적(反神的) 집단으로 간주하였다.그는 반공주의야말로 기독교 신앙을 수호를 위해 필요한 가치로 여겼으며, 복음화 운동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초라고 인식하고 복음전파를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간주하였다. 사회현실의 개혁은 복음화 운동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고 믿고 군부정권이라도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한 일정 거리를 두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또한 국제정세를 주시하면서, 지속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서도 경고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제기될 수 있는 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특히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 직후에는 금식기도회와 구국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우리나라가 복음국가로 건설하며 구국운동으로 극대화될 수 있기를 염원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영적 싸움으로 인식했고,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복음밖에 없다는 확신과 민족복음화에 대한 이상으로 분단 시대를 살아갔다. “김준곤 목사는 한경직 목사와 더불어 이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 반공주의자였고, 우리나라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형성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 특히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남긴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보루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반공사상에 철저하면서도, 예수 사랑에 근거한 통일운동을 지향하였다. 그의 다양한 통일을 위한 행동은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인도주의에 기초한 사랑이었고, 민족 간의 화해시도이자, 궁극적으로는 민족복음화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김준곤 목사는 분단 이후의 상황에서 민족 통일을 예견하면서 민족복음화를 통한 기독교 건국론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4.엑스플로 ’74가 한국교회사와 선교운동에 미친 영향

4-1. 한국교회 평신도운동의 토대와 교회연합운동의 발판 마련

엑스플로 ’74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평가는 김의환 박사에 의해 내려졌다. 그는 이 대회를 획기적인 교회사적 사건으로 주장하면서,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세 가지로 언급하였다. 먼저, 주최 측의 계획, 조직, 진행, 홍보 등의 성과가 일익을 담당했음을 인정하면서, 극단의 보수주의자들이 혼합주의라는 비난을 퍼붓고, NCC가 반대 성명을 내는 상황 속에서도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의 잠재력을 동력화한 의의가 크다고 강조하였다. 둘째, 이번 대회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적어도 전도나 선교 문제에 있어서는 연합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증명했으며, 셋째, 이번 대회를 통해서 만인제사장이라는 위대한 종교개혁 유산을 계승하여 평신도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것이다.이러한 배후에는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중산층 확산과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전도와 훈련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를 기점으로 시작해서 엑스플로 ’74를 거쳐, 1984년 한국선교 100주년대회까지 일련의 대중전도운동은 연합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한국교회에 해외선교운동을 촉진시키는 전기를 마련했고, 국내에서 하나의 복음주의 운동이 역사에 등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토양을 제공했다. 그 결과 통일찬송가, 100주년기념사업회,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한기총과 같은 연합운동의 결실이 맺혀졌고 복음주의운동이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한국교회 역사에 등장했으며, 국내선교와 해외선교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신학적으로도 한국복음주의신학회와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결성되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ACTS)이 설립되어 한국교회 안에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양립 구도 속에서 복음주의 세력이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할 수 있는 틀을 다져주었다. 미국에서 근대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대중전도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한국의 대중전도운동도 서구의 복음주의운동과 초교파 학생운동 그리고 로잔운동의 영향으로 부상한 일종의 근대부흥운동이었다.

 

4-2. 대중전도운동과 교회성장의 기반 조성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즈음에, 당시 한국 교계의 대표적인 선교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지도자들의 논문들을 노봉린 박사와 말린 넬슨(Marlin L. Nelson) 박사가 편집하여 한국교회 성장폭발(Korean Church Growth Explosion)이라는 영문 저서를 출판하 였다. 이 저서에서, 김준곤 목사는 엑스플로 ’74를 비롯하여 민족복음화운동에 대해 영문 논문으로 자세히 작성하여 세계교회에 알리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논문은 여러 논문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논문이었고, 이 책은 한국교회의 획기적인 성장의 과정과 방법, 특징들을 밝혀 세계 여러 나라의 교회들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판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르게 되면 한국 내의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약 20%에 이르고 있었으며, 특히 18세부터 24세까지의 청년들의 비율은 30%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만큼 1970년대의 다양한 전도대회와 복음화운동을 통한 전도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1970년대의 민족복음화운동과 전도운동은 한국 선교역사에서뿐 아니라, 세계 선교역사에서도 주목받는 대상이 되었음을 강력하게 반증하고 있으며, 그러한 배후에는 김준곤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지도자들이 협력하여 진행한 엑스플로 ’74의 영향이 가장 지대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엑스플로 ’74 대회는 이전의 전도대회의 결과를 흡수하여 이후의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와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의 기반이 되었고, 한국교회의 성장과 세계선교의 동력을 제공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또 한 차례 놀라운 교회부흥과 획기적인 교회성장을 맞이하였다. 이와 같은 획기적인 성장은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나 엑스플로 ’74 대회가 민족복음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복음전도에 초점을 맞추어 모든 행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준곤 목사는 전도 없는 부흥은 존재할 수 없다는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대회가 폭발적인 교회 성장으로 이어진 것은 단순히 집회로만 끝나지 않고 전도 요원들에게 철저한 전도훈련을 실시하고 또한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도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한 결과였다.

 

 

엑스플로 ’74 전도대회 후에 1년간 1,000 교회 주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 대회 이전까지는 연평균 7-8% 성장했던 교회들이 대회 후에는 출석수가 33%로 증가했고 헌금도 64% 증가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교회도 하루에 6개씩 생겨났고, 전도의 열풍이 교회의 급성장으로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70년대부터 80년 중반까지 한국의 경제도 급성장하여 비슷한 시기에 교회의 영적 부흥과 국가의 경제적 부흥이 함께 이루어졌는데 상관성이 있는지는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4-3. 김준곤 목사의 한국교회 결집과 민족복음화운동 및 세계선교운동의 저변확대

김의환 박사에 의하면, 박형용 박사가 신학교육에 가장 [] 교회사적 업적을 남겼다면, 김준곤 목사는 지성 복음화 및 민족 복음화에 가장 큰 교회사적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한 바 있다.김준곤의 영향력은 수많은 대학생들에게 민족복음화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열정적 신앙을 품게 하였다.그리고 한국 CCC의 중심된 구호가 된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구호를 그들의 마음에 새기며 국가적 구원관을 형성케 하였다.그런 면에서, 김준곤 목사야말로 한국의 지성인에게, 특히 대학생들에게 지난 50년 동안 한국 캠퍼스와 복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설교가요 기독교 사상가라는 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김준곤은 엑스플로 ’74 전도대회를 교회사적으로 성령의 제3폭발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는데, 1폭발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2)이고, 2폭발은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고 했다. 빌리 그래함도 엑스플로 ’74가 열리기 직전에 이 대회를 가리켜 한국교회의 정신혁명의 큰 횃불,” “기독교 역사상 획기적인 성회이며 아시아와 세계복음화를 위한 총진군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한경직도 이 대회를 통해 한국과 아시아와 전 세계에 큰 빛을 던지는 사건이 되리라는 전망도 피력하였다. 실로 엑스플로 ’74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한국 민족복음화 운동을 결집하여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본격적으로 세계선교운동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대회는 민족복음화운동에 있어서 핵심전략이 되었고 한국교회와 사회에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캠퍼스복음화운동이 더욱 가속되었고, 민족의 입체적 구원, 즉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복음주의적 관심을 증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민족복음화운동의 핵심역할을 하게 된 엑스플로 ’74대회를 평가하면서 김준곤은 세계복음화운동의 꿈을 가지고 도전하면서 춘천성시화운동, 80세계복음화대성회, ’84세계교회기도대성회, 뉴라이프2000마닐라대회 등을 주도해나가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을 보다 강력하게 확산시켜 나갈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와 함께, 엑스플로 ’74에 대한 비판적인 신학적 평가는 진보적 신학자들을 통해 제기되었다. 먼저 안병무 박사는 이 대회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대전제가 성령인데 현대사회가 사용하는 대중의 동원방법 전략을 사용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며, 매스콤을 통한 홍보와 성령에 절대의존한다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느냐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구원 등의 개념들이 현대문화와 상황 속에 사는 청중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인식되고 수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개인 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두고 사회구원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비판하였다.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김준곤 목사는 폭발이나 혁명이라는 단어는 이미 미국에서 예수 혁명이니 영적 혁명이니 하며 1960년대후반부터 매스콤을 통해 확산된 용어이고 이것을 빌려다 사용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혁명에는 내적인 인간적인 혁명도 있고 사회혁명도 있지만 우리는 인간혁명을 통해 사회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한국에서 학생운동을 해본 경험을 토대로 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웨일즈의 부흥운동에서 예를 찾아 볼 수 있듯이, 부흥운동을 통해 도덕적이고 사회적 변화가 수반되는 것이며, 토착화에 대한 용어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토착화는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을뿐더러 문화 속에도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복음이 인간의 마음에 영접되고 이해되고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된다면 그것이 곧 토착화의 방법이라고 했다.

 

5. 닫는 말

197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김준곤 목사의 민족복음화에 대한 갈망,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났던 EXPLO ‘72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등이 연계되어 일어났던 사건이 바로 엑스플로 ’74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의 주제는 예수 혁명, 3의 폭발이었다. 그가 소개한 이 대회의 취지문을 읽어보면, 인간성의 부패와 문화의 파국을 절감하면서 인류는 시한폭탄 같은 파국적 종말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고 절규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최후의 운동, 최후의 이데올로기, 최후의 혁명은 영의 혁명, 즉 예수 혁명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그의 절박한 시대 인식은 민족복음화운동을 더욱 집약화, 조직화, 그리고 동력화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엑스플로 ’74 대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며 진행해 나갔다. 

 

김준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피 묻은 복음으로 강조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희생으로 우리가 복음을 받았으며, 그 복음을 위해 피 흘리는 정신으로 살아야 하며,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피 흘리는 희생이 있어야 함을 외치며 평생을 살아갔다.그는 살아있는 순교자의 한 사람으로 순교적인 각오와 자세로 민족복음화운동에 매진해 왔으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피 묻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값싼 복음을 전한다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값싼 그리스도인이 양산되고,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시대적 선지자의 역할도 잘 감당하였다.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그가 그토록 외쳤던 순수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인의 가슴마다 피 묻은 복음이 심겨져 그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몸소 가르쳐 주었다. 이 길만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요, 침체되고 성장이 둔화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길임을 그는 민족복음화운동을 통해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김준곤 목사는 민족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전도자요,” 또한 한 교회의 목사가 아니요, 어느 교파에 속한 교단의 목사가 아닌 오직 민족의 목사요, 한국교회의 목회자요, 이 역사를 살려내기 위해 세우신 예수님의 사도였다.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감정을 초월한 진정한 신자였으며, 개교회주의와 교권주의를 극복하며 민족복음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한국교회의 지도자이자 목회자들의 목회자였다.

 

김준곤 목사의 생애와 사역은 민족복음화운동을 위한 일관된 헌신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는 누구보다도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인 선교정신을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잘 계승해 왔으며, 또한 초기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신학전통을 가장 잘 구현하고 적용한 인물이다.초기의 귀한 신앙적인 특성과 전통을 해방과 6. 25전쟁 이후에도 한국교회와 사회에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구국적 교회 지도자였다. 초기의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한 개화와 민족운동, 복음전도를 강조하며 부흥을 이루어 나가면서도 사회참여를 통해 한국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아름다운 유산들을 김준곤은 그의 민족복음화운동에 담아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준곤 목사의 민족복음화운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문화명령(1:28)과 선교전도대사명(24:18-20)을 한국교회사 속에서 가장 잘 구현한 운동 중의 하나이며, 엑스플로 ’74는 그러한 좋은 역사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 엑스플로 '74 50주년 기념 희년학술대회에서 아신대 교회사 박응규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뉴스파워

 

 

참고문헌

김준곤. C.C.C.와 민족복음화운동. 서울: 순출판사, 2005.

 

김준곤. 순론노트. 서울: 순출판사, 2004.

 

김준곤 목사 제자들 엮음.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 서울: ()출판사, 2005.

 

박명수. “민족복음화운동과 한국교회, 1965-1974.” 성결교회와 신학34 (2015): 118-146.

 

박응규,유성(遊星) 김준곤 목사의 민족복음화운동과 역사·신학적 의미,” ACTS 신학저널42 (2019): 9-52.

 

박용규. “대중전도운동과 민족복음화운동 1970-1980.” 역사신학논총30 (2017): 8-56.

 

백종구. “한국대학생선교회의 민족복음화운동: 신학과 실천(1960-1980년대).” 성경과 신학64 (2012): 191-218.

 

이상규. “한국교회사에서 본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 10주기 기념 학술발표회 논문집, 2019, 9, 28).

 

이상규 외. 한경직 목사와 한국교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이영관. “미국 신문을 통해 본 1970년대 한국- Los Angeles TimesNew York Times를 중심으로.” 韓國思想文化71 (2014): 141-166.

 

웨커, 그랜트. 빌리 그래함: 한 영혼을 위한 발걸음. 서동준 옮김. 서울: 선한 청지기, 2021.

 

세계성시화운동본부, 김준곤 목사 선양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서울: 세계성시화운동본부, 2022.

 

전석재, “CCC가 한국교회 성장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 선교신학27(2011): 313-336.

 

하드먼, 키드. 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 역사. 박응규 옮김. 서울: CLC, 2006.

 

정진홍·김준곤·안병무·김의환. “엑스플로 ’74를 말한다.” 기독교사상197 (1974, 10): 83-84.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Kim, Joon-Gon. “Korea’s Total Evangelization Movement.” in Korean Church Growth Explosion한국교회 성장폭발:Centennial of the Protestant Church(1884-1984). Edited by Bong-Rin Ro and Marlin L. Nelson (Seoul: Publishers Word of Life Press and Asia Theological Association, 1983), 17-50.

 

Pollock, John. To All Nations: The Billy Graham Story.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85.

 

Turner, John G. Bill Bright & Campus Crusade for Christ: The Renewal of Evangelicalism in Postwar America.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8.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24/09/07 [20:54]   ⓒ newspower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