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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최영철 전 국토교통부 전 차관보의 증조부 최한경, 1921년 흉년 때 1194호 농가 주민세를 대납해 주었다
전용태 장로(법무법인 로고스 설립자)의 부인 최호자 권사의 증조부로 쌀 271가마 내놓아 대납...후손들 “집과 송덕비 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면”
 
김현성   기사입력  2024/08/05 [23:25]

최영철 전 국토교통부 차관보(잠실회 안수집사)의 증조부 최한경(崔漢京) 선생(1856811(음력)~ 1932821(음력))이 일제 강점기인 1921년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전남 담양군 대전면 1,194호 농가의 호세(戶稅, 주민세)를 대납해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김철영 목사가 최근 후손들로부터 최한경 선생의 아름다운 미담을 듣고 전남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396번지에 소재한 최한경 선생의 생가와 1923년 대전 면민들이 최 선생의 은덕(恩德)을 기려 세운 송덕비 현장을 찾아 아름다운 선행을 직접 확인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30대 후손인 최한경(崔漢京) 선생이 살았던 집은 아들 최순호 선생에 이어 손자 최창언 선생(교육자, 최 전 차관보의 부친)이 살았던 집으로 100여 년 전에 지은 집이다. 당시는 초가집이었으나 1970년 새마을운동 당시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했지만 목재는 처음 건축할 때 사용했던 것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집에 들어서면 마당 오른쪽에 <최씨 삼세 유장비(崔氏 三世 遺庄碑)>가 세워져 있다. 최한경 선생이 남겨준 전답(田畓) 등 소유했던 재산 내용 쓰여 있다. 최한경 선생은 일제 강점기 전답을 많이 소유한 천석꾼이었다고 한다.

 

중옥리에서 출생해 평생 그 마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최한경 선생은 1921년 흉년이 들어 지역민들이 호세(戶稅, 주민세)를 납부하지 못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1194호 농가의 주민세를 대납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194호 농가의 주민세 일천삼백오십구원구십전(135990)에 해당하는 쌀 271석을 대납해 해결해 주었다. 당시 쌀 한 석은 5원이었다. 쌀 한 석은 두 가마니 160킬로그램이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엄청난 금액이다.

 

최한경 선생의 이웃 사랑에 감동한 지역민들은 1923320일 대전면 농협 앞에 송덕비를 세워 아름다운 이웃 사랑을 기리고 있다.

 

중옥리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대전면 대치리 870-4에 소재한 대전농협 앞에는 <慶州 後人 崔漢京 施惠碑>가 있다. <시혜비>열심과 근면검소 정신으로 빈손으로 시작해 가업을 일으켜 1,100호 주민세를 대신 담당했다.”는 내용이 한문으로 쓰여 있다.

 

또한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세워진 송덕비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파손되어 대전면에서 중수(重修)했다. 송덕비에는 최한경 선생의 주민세 대납에 대해 본연의 천성에 善心(착한 마음)發露(발로)된 바라고 칭송하고 있다.

 

이어 신문지상으로부터 사회 공중에 반포되어 우둔하고 욕심 많은 자로 하여금 선심을 고취케 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면민 일동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만구일성(萬口一聲)으로 칭송하고 1923615일에 이 기념비를 세워 삼가 모든 사람이 송덕한 공의(公議)로써 불망의 명성을 영원히 전하노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비각은 1923320일에 건립하였으나 되어 철거함이라고 되어 있다.

 

최한경 선생의 증손자녀들(고운 최치원 선생 선조 35세손(충열공 27세손) 장증손 영선을 비롯해 영옥, 영철, 원경, 영준, 영엽, 황자, 호자, 영신은 지난 2008103일 송덕비 옆에 추모비를 세웠다.

 

증손자녀들은 <증조부께 바치는 추모사>라는 제목의 추모비에 후손된 저희들은 가풍과 유지들을 잘 계승하고 넉넉하신 인품과 크신 기우(氣宇, 기개와 도량) 그리고 자신에게는 엄하고 남들에게는 너그럽게 배려하신 자승최강(自乘最强)의 신념과 실천을 본받아 화이귀(和而貴)하는 생활 속에 선대의 공경, 가문의 기품과 명예를 제고하는 노력과 함께 국가사회의 발전에도 힘써 기여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최한경 선생의 증손녀인 최호자 권사(서울대 약대 CCC 나사렛형제들)교육자이셨던 아버지(최창언, 교육자)로부터 증조부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어릴 적에 광주에 살면서 언니들과 할아버지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며 최한경 선생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최 권사는 어느 날 밤에 도적이 집에 들었는데 증조부님이 밤 손님도 손님이라며 돈 꾸러미를 내놓으면서도 도적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고 계셨다고 한다.”그런데 도적이 감동을 받아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면서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돈을 훔치게 되었다며 반드시 돈을 갚겠다고 했다 한다. 할아버지는 그만큼 어려운 사람의 형편을 이해하셨던 분이라고 밝혔다.

 

또한 할아버지의 근면하고 성실하신 인품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손들도 국가와 사회를 위해 귀한 일을 감당해왔다. 의사가 10여 명, 법조인이 4명 그리고 대학 교수가 배출되었다.”고 밝혔다.

 

최한경 선생의 증손자녀들 중 영선은 화순 동북중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원경은 충남방직에서 재직했고, 영준은 ()대우 임원을 지냈다. 증손녀 황자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유종호 목사(CCC 김준곤 목사 비서실장 역임)의 사모로 남편의 대학생선교 사역을 내조했다. 증손녀 영신은 미국 하와이대 일본어학과 교수를 지내며 CCC 지도교수를 맡아 대학생 선교사역을 협력했다.

 

최호자 권사의 남편 전용태 장로(법무법인 로고스 설립자)는 춘천, 청주, 인천, 대구지검 검사장을 역임하면서 성시화운동에 헌신해 재단법인 성시화운동 이사장과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초대 총재, 대표회장으로 국내외 도시 단위를 순회하며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깨끗한 도시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왔다.

 

전용태 장로는 아내의 증조부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해 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분이셨다.”그 집터와 송덕비가 담양군 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의 정신을 되새기는 교육의 현장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일제강점기를 연구한 학술논문에 의하면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일제가 농민들의 토지를 탈취하면서 소작농의 토지경작권마저 박탈해 반봉건적 지주제를 확립시키고 농촌의 계급구조를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자소작농(自小作農)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약 80에 이르렀던 일제강점기의 소작농들은 평균 5할을 훨씬 넘는 소작료 외에도 지조(地租) 및 각종 공과금, 용수료 및 수리조합비, 토지공사 및 수선비, 마름의 보수, 지주와 마름에의 접대비 및 증여물 등을 제하고 나면 전체생산물의 약 2426밖에 얻을 수 없었다.

 

특히 일제는 1920년대에는 우리 농촌을 일제의 식량기지화하기 위해 두 차례의 산미증식계획은 우리나라의 농민을 더욱 몰락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산미증식은 수리조합건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고, 이에 의한 조합비 부담의 고통은 조합원 농민이 토지를 방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농민의 소작농화 경향과 궁핍화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까지 들어 농민들은 보릿고개도 넘기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민세를 납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춘궁기에는 식량이 모두 떨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농가호수가 1253,000호에 달했는데, 이는 전체농가호수의 48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농민들이 무척 곤궁하고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최한경 선생이 선뜻 쌀 271석을 내놓아 1,194호 농가의 주민세를 대납해주었던 것은 이웃을 자신의 가족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통 큰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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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8/05 [23:25]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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