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CCC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CCC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무서운 비바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그대로 몸을 맡겼고, 또 어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신속하게 대피했습니다. 여의도의 비바람은 순식간에 수천 개의 텐트를 집어삼켰습니다. 그런데도 열악한 환경을 탓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의도광장은 기도의 열기로 후끈거렸고, ‘성령 폭발’이라는 글귀처럼 곧 뭔가가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예수 이름으로 한데 어울렸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출신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본적은 이미 하늘나라였습니다. 1974년 8월 13일 여의도광장. 엑스 플로‘74의 풍경입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저는 참 많이 망설였습니다.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 이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던 친구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슬금슬금 교회를 떠났고 은근히 그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갈등하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라. 며칠 공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더 풍성히 채워주실 것이다.’ 광주에서 출발한 버스는 여섯 시간 만에 여의도에 도착했습니다. 아, 그 기도의 열기…. 한국에 이렇게 많은 크리스천이 있었던가.
저는 난생처음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고, 빗속에서 통성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병아리가 껍질을 뚫고 나오는 파란(破卵)의 감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 처음으로 어렴풋한 청사진을 그려보았습니다.
소년은 그때 한 어른을 만났습니다. 폭포수처럼 말씀을 전하며 끊임없이 꿈과 비전을 부르짖던 소년 같은 종을 만났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그대로 한편의 서사시였으며, 그의 비전은 한편의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그의 음성은 가슴속 찬송가요, 탈무드였습니다.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 그것은 이 민족의 희망가였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은 그 어른을 ‘큰 바위 얼굴’로 여겼습니다. 소년 같은, 시인 같은, 때로는 철학가 같은 그 종의 이름은 김준곤 목사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소년은 중년의 가장이 되어 그 감동의 여의도광장을 정원처럼 내려다보며 일하고 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감동이 곧 복음입니다. 논리적인 메시지보다 분위기에 더 은혜를 받습니다. 필자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 분이 김준곤 목사님이십니다.
김준곤 목사님과는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영· 호남 갈등이 극에 이르렀을 때, 김 목사님은 그것을 무척 걱정하셨습니다. 지역감정이 곧 망국병이 될 것이라며 나랏일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때 경상도 총각과 전라도 처녀가 화개장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까지 내려가 주례를 맡아 보셨습니다. 목사님은 비행기 안에서 “이 나라가 지역감정 때문에 험해지는 꼴이 두렵다.’라고 걱정하셨고, 그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섬진강에서 은어를 드시면서 ‘물고기 이름이 참 예쁘오. 그래서 물고기를 먹기가 좀 미안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목사님은 상처받기 쉬운 여린 마음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김 목사님은 항상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셨습니다. 기독교 21세기 운동을 시작했을 때, 목사님은 한 사람이 오후 1시에, 1분씩 기도하는 ‘111기도 운동’을 제안했고, 국민일보에 기도 제목이 매일 소개됐습니다. 오후 1시가 되면, 길을 걷다가 멈추어 서서 기도를 드리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병원의 원장님은 오후 1시가 되면 기도실에 들어가 111 기도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가끔 밤늦게 필자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잘 지내고 있소?”
‘‘예, 목사님….”
목사님은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검증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전화해서 그것을 확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받아 적어 보시오. 기독교 21세기 운동이 꼭 성공해야 합니다. 지역별 모임을 만들 것이오. 어떤 목사님을 대표로 모시는 게 좋겠소? 서울은….”
목사님은 여러 목사님의 이름을 주욱 열거하셨습니다. 필자는 수화기를 들고 목사님의 말씀을 목묵히 경청했습니다. 목사님들의 이름과 집회 일정을 메모할 생각은 처음부터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김 목사님이 확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기자, 내가 말한 목사님들 이름을 한번 불러보시오.”
그 부끄러움이라니…. 목사님의 치밀함에 저는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는 목사님의 말씀을 반드시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자신의 비전이 방해받는 것을 몹시 못 견디어 하셨습니다. 한번 은 한기총에서 임원 및 교단 총회장들과 기독교 21세기 운동에 관한 설명회가 열렸습니다. 목사님의 순수한 뜻이 점점 교단의 정치 논리에 함몰돼 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얼굴이 조금씩 상기되는 것을 보면서 ‘오늘 무슨 일이 터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순수한 선교 운동이 정치 논리의 희생물로 변하려는 순간, 목사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목사님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이는 것을 저는 감지했습니다.
“한기총을 해체하시오. 정말 실망했소. 교회와 선교회에 도움이 안 되는 연합기관은 아무 소용이 없소. 우리를 돕든지, 해체하든지 하나를 택하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저 나약한 분에게서 어떻게 저런 카리스마가 나오는 것일까요? 한기총 임원들과 총회장들은 더 이상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운동을 한기총 후원사업으로 채택했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목사님은 몇몇 목사의 손을 잡고 미안함을 표현하셨습니다. 강한듯하면서 여리고, 여린 듯하면서 강한 목사님의 모습을 그때 보았습니다.
2003년 봄, 저는 태국 파타야에서 목사님을 다시 뵈었습니다. CCC 동아시아 지역 수천 명의 간사가 모인 자리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때 건강이 좋지 않으셨는데, 저를 조용히 방으로 불러 새로운 비전들을 밝히셨습니다. 목사님은 아직도 소년이었습니다. 비전을 밝히면서 얼굴에 홍조가 돌았습니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끝없이 쏟아지는지 그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각국의 간사들은 의자에서 내려앉아,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목사님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이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김 목사님은 한국 교회가 개교회주의로 치닫는 것에 대해 매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목사님이 계획하는 일들에 대해 협조하지 않는 것을 서운해하셨습니다. 한번은 긴 한숨을 쉬시면서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임기자, 내가 목회를 안 한 것이 후회스럽소. 나도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해야 했는데….” 저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았습니다.
“목사님은 한국 교회를 목회한 것입니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키운 제자들이 교회와 사회 곳곳에서 얼마나 훌륭하게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김 목사님은 아직도 이 땅의 수많은 사람에게 큰 바위 얼굴입니다. 목사님께 지역과 교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민족을 가슴에 품고 애통해하는 종에게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 마련해 있을 것입니다.
임한창 기자는 광주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를 졸업했다. <신앙계>의 기자로 입사해 다시 1988년 국민일보 창간과 함께 국민일보 기자로 입사해 편집국 부국장, 종교국장, 미션에디터, 선교홍보국장, 국민일보 이사를 지냈다. 국민일보에 7년 동안 매일 ‘겨자씨’와 ‘모퉁잇돌’을 연재해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 저자의 신간. 감동적인 예화에 신앙적 의미를 부여한 짧은 칼럼은 방송과 설교 강단에서 자주 인용될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2023년 1월 4일 소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