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대수롭지 않게 다니던 동네 뒷산이다. 등산로 입구에 구멍이 나서 곧 쓰러질 것 같고 죽을 것만 같은 늙은 나무가 눈에 쏙 들어온다. 사람이었다면 영락없이 요양병원으로 가야 할 처지다.
산의 좌우를 살펴보니 어린나무, 청년 나무, 우람한 나무들만 있는 게 아니라, 허리가 부러진 나무, 밀어뜨리면 곧 쓰러질 것 같은 늙은 나무, 이미 쓰러져 잠자는 나무까지 천차만별이다.
나무의 세계는 공존이 무엇인지를 이론이 아니라, 실제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무들의 세계는 늙고 병든 나무라고 해서 뽑거나 격리하지 않는다. 어리고 젊은 나무 곁에서 잠이 들 때까지 함께 산다.
본래 사람들도 그랬었다. 병원에 있다가도 임종이 가까워지면 집으로 돌아왔었다.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다.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가족과 마을 공동체가 집을 떠나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간다. 돌아올 기약이 없이 내 집을 떠나야 한다. 큰 아픔이다.
실제 수용시설에서 살다 보면 상상외로 깊은 외로움에 빠지게 된다. 버림받았다는 생각, 역할 상실, 돌봐주는 이들의 사무적인 태도, 낯선 자들과 공동체 생활 등. 적응이 좀체 쉽지 않다.
나무들처럼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젊을 때도 그렇지만 노년의 때야말로 더더욱 그렇다. 늙으면 익숙한 환경에서 낯익은 사람들과 사귐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 요즘엔 마을 경로당이 이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
가까운 분 중 요양병원에서 지내다가 천국 간 분들도 많거니와 지금도 수용된 분들이 있다. 면회마저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돌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몸도 수척해지고, 마음도 흐려지고 믿음도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런 폐단을 줄이려면 의료상의 도움이 필요한 노인이 아니라면 가정에서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더 좋은 정답은 앞서 말했듯이 나무처럼 어린이, 청년, 중년, 노년이 더불어 사는 것이다. 가족도 여러 세대로 구성되면 좋거니와 마을도 그러해야 한다. 농어촌 마을의 현실은 운이 좋으면 노부부 아니면 독거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노인들끼리 살다가 외롭게 죽어야 하는 실정이다.
뾰족한 방법이 없다. 미래는 더 비관적이다. 노인의 고독은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마을교회가 외롭고 쓸쓸한 노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면 어떨까? 교회가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끄나풀이 되었으면 싶다. 지옥으로 떨어져가는 강도에게까지 희망이 되어주셨던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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