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발표문은 14일 오전 7시 서울 영락교회(담임목사 김운성) 50주년기념관 503호실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6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김명섭 교수(연세대 정외과) 발표한 발표문이다.(뉴스파워)
▲ 김명섭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과)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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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후의 대한민국과 세계
I. 머리말
2023년 3월에 이어서 다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의뢰받았던 오늘의 발제 제목은 “6.25 이후의 대한민국의 발전과 세계적 책임”입니다. 제목을 약간 축약하기는 했습니다만 원래 취지에 부합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를 기해 발효된 정전협정에 따라 한반도는 6.25전쟁이라는 열전이 정지된 정전의 시간을 맞이했고, 현재까지 불완전 평화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7월 27일 정전의 시각은 오후 10시로 같았습니다만 1950년 6월 25일 개전 시각은 평양 시각으로는 새벽 4시, 서울 시각으로는 새벽 5시로 1시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서울이 서머타임제도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어로 기록된 정전협상 회의록을 보더라도 1951년 7월 10일 오전 10시로 정전협상 본회의 시작 시간을 정하면서 “your time or our time?”이라고 되묻는 장면이 나옵니다.4) 서로 달랐던 이 한 시간의 차이는 서로가 가지고 있던 역사적 시간관념의 차이와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1시간이라는 크로노스적 시차(時差)에 더해서 카이로스적 시차(視差)가 존재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전면전을 일으킨 조선인민군은 조선민족주의와 결합된 공산주의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고, 이에 맞섰던 한국군은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대한민족주의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습니다.
II. 6.25전쟁 이후 한반도 정전체제와 세계 냉전체제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에서는 정전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그 정전협정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1953년 8월 8일 가조인되고, 10월 1일 체결되었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종이 위의 약속을 지킬 리 없다고 보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을 믿고 미군이 철수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사형집행장과 같은 것이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관철시켰고, 끝까지 통일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쌍둥이로 탄생한 정전체제는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3중 봉쇄적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조선인민군,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 그리고 소련군으로 구성되는 공산군의 전쟁 재개를 봉쇄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대한민족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 국군이 대한민국 헌법 상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군은 정전협정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헌법이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한 영토를 수복해야 하는 의무가 유예되었습니다.
흔히 정전협정에 이승만 대통령의 서명이 없기 때문에 한국군은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정전협정 서명은 현장의 군사령관이 하는 것이지 국가원수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의 경우를 보더라도 정전협정의 서명자는 프랑스와 독일의 군 사령관이었지 참전국 정상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작전지휘권을 완전히 환수한 이후에도 한국군은 정전협정에 기속(羈屬)됩니다.
셋째, 세계냉전 상황에서 부활할지 모를 일본의 우익전체주의를 봉쇄하는 성격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공산진영의 팽창을 봉쇄하기 위해 1945년 종전 무렵 약 7백만 명에 달했던 일본군의 일부를 부활시키고자 했습니다. 이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이 미국을 침공했던 일본군 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일본군 대신 한국군을 육성하되 작전지휘권은 계속 국제연합(UN)군 사령관이 갖는다는 원칙은 1954년 11월 17일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에 앞서 체결된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6.25전쟁 이후 세계 냉전체제 속에서 한반도 정전체제는 [도표1]과 같은 지정학적 상황에 있었습니다.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기반한 정전체제는 세계 냉전체제의 하위체제로서 한반도와 동북아에서의 열전은 물론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 왔습니다. 흔히 “냉전수구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냉전과 정전을 나쁜 것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냉전이나 정전이 따뜻한 평화 보다는 못하지만 열전보다는 나은 상태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은 세계냉전의 시공간 속에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1세계 국가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1919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 수립되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제1세계 국가인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바 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는 모두 식민지를 경영했던 제국주의 경험이 있는 나라들입니다만 미국은 대영제국의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전쟁을 했던 특이성이 있었습니다. 일본제국과 맞서 미국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의 이러한 역사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20세기 한국과 미국의 동맹은 일본제국주의와 공산전체주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중적 동맹입니다. 이러한 혈맹의 배후에는 오랫동안 형성된 개신 기독교 네트워크가 존재했습니다. 그 상징적 인물로 프레데릭 B. 해리스 목사가 있습니다. 해리스 목사는 1939년 이승만, 푸랜시스카 부부가 하와이에서 워싱턴 D.C.로 이주하여 파운드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을 때, 그 교회의 담임 목사였습니다.
얼마 후 해리스 목사는 미국 상원의 원목이 되어 상원의장이자 부통령인 해리 S. 트루먼과 친교를 맺게 됩니다. 1945년 4월 루즈벨트 대통령이 갑자기 별세하자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합니다. 해리스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과 이승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한반도 해방, 대한민국 독립정부 수립, 6.25전쟁과 그 이후 전후 복구 기간에 해리스 목사는 비공식 대사처럼 한국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6.25전쟁 발발 직전 방한했던 미 국무부 고문 존 포스터 덜레스도 목사의 아들로서 한미 개신 기독교 네트워크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방한 기간 중에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대한민국 국회에서 연설하고,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등 기독교인들을 만나고,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덜레스는 “코리아가 먼저 도발하지 않은 무력 공격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좌시하는 것은 세계대전으로 가는 재앙적 연쇄사건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조언했습니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국제체제 수립 당시부터 주권독립 사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던 개신 기독교 네트워크를 통해 항일 독립투쟁과 6.25전쟁 기간 중에 형성된 미국과의 혈맹관계, 그리고 한미동맹에 기반한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시간대는 제1세계의 시간대에 접속되었습니다.
III. 대한민국과 제1세계, 제2세계, 그리고 제3세계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1990년 서독의 동독 흡수통일, 그리고 1991년 소련의 해체로 한국이 운명을 같이 했던 제1세계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속한 제2세계에 대해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대한민국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제1세계의 냉전 승리에 기여했고, 함께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운명을 같이 했던 제1세계는 제2세계와의 냉전에서 승리했지만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국제회의로 대표되는 제3세계가 존재했습니다
1955년의 비동맹권 지도와 2012년의 비동맹권 지도를 비교해보면 제2세계 공산권의 몰락 이후에도 제3세계의 비동맹연대는 이른바 글로버 사우스(Global South)를 포괄하면서 꾸준히 확대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3세계란 프랑스의 인구학자 소비(Alfred Sauvy)의 명명으로서 프랑스대혁명 당시 귀족, 가톨릭 고위 성직자와 달리 다수의 평민으로 구성되었던 제3부에 빗댄 표현입니다. 1955년 반둥회의에 참석했던 29개 국가들은 인도,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포함하여 제국주의의 피해를 경험했던 국가들로서 경제적으로는 약소국들이었지만 세계 인구의 다수인 54%를 차지했습니다. 세계적 민주화의 흐름과 더불어 다수의 인구를 가진 제3세계 국가들은 꾸준히 세계적 발언권을 성장시켜왔습니다. 제3세계주의는 자본주의 진영의 제1세계, 공산주의 진영의 제2세계와 달리 제3의 길을 추구하는 국제연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발전한 제3세계주의는 비동맹운동(NAM, Non-AlignedMovement)으로 이어졌습니다. 냉전시기 공산주의 국가들이 속한 제2세계는 물론 비동맹을 표방한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한국은 제1세계와 동맹을 맺은 나라로서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1975년 4월 베트남 공산화 통일이 이룩된 직후 같은 해 8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 평양정부의 가입신청은 받아들여졌고, 대한민국의 가입신청은 거부되었습니다.
한국외교사에서 ‘리마의 참패’라고 불리는 이 사건 직후 당시 페루까지 출장갔던 한국 외무장관이 경질되기도 했습니다.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성공7)에 이은 1988년 서울올림픽은 당시까지의 올림픽 역사상 최다 국가들8)이 참여한 올림픽으로서 제2세계와 제3세계 국가들이 직접 대한민국의 실상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세계적 이벤트였습니다.
한 외국 학자는 이 순간을 대한민국의 “외교적 역전”(diplomatic reversal)이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9)대한민국은 냉전 종식 직후인 1992년 중화민국(현재 대만)과의 ‘비외교적 단교’와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및 베트남인민공화국과의 수교를 통해 경제발전을 촉진시켰지만, 일찍이 아시아에서 중화민국 및 남베트남과 같은 이념을 채택했던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에 대한 도전에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IV. 맺음말
피식민지 경험이 있던 한국은 제3세계 국가들, 그 중에서도 자원이 없는 제4세계 국가와 흡사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1세계와의 접속을 통해 발전한 대한민국 모델은 제3세계는 물론 제4세계 국가들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들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확대하고, 해외개발원조(ODA)를 늘려왔습니다. 2024년 6월 초 서울에서 제1회 한-아프리카정상회의가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제1세계와 제3세계 및 제4세계를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모델로 삼았던 제1세계가 제3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많은 과거사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협력모델을 제시할 필요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제1세계로부터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제3세계 및 제4세계 국가들에게 원조를 주는 국가로 성장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물고기를 나누어 주는 국가가 아니라 6.25전쟁 이후 한국이 제1세계와의 접속을 통해 발전시켰던 그물 만드는 법을 전파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먼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K-음악, K-시네마, K-푸드, K-의료, 그리고 K무기 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K-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대한민국 스스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독립투쟁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제1세계와 손을 잡았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고, 발전해왔는가를 “있었던 그대로” 연구하고, 교육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북한에 대한 대한민국 헌법 상의 책임입니다. 제3세계 중에서 자연자원마저 부족한 빈국들을 제4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들 제4세계도 국제사회로부터 폐쇄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자국민을 폭압적으로 억압하는 미얀마 군부정권과 같은 제5세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북한 주민에 대해 가져야 할 대한민국의 책임은 제3세계나 제4세계 보다 심각한 제5세계의 인권에 대한 세계보편적 책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