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임석순 목사)는 지난 10일 제자광성교회(담임목사 박재신)에서 5월 월례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갖고 한국교회가고독생•고독사 예방과 중독예방에 나서줄 것을 강조했다. 다음은 박재신 목사 설교문이다.(뉴스파워)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5월 월례조찬기도회에서 제자광성교회 박재신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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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장 2~4절
○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눈이 부시게 푸르른 5월이 되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정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감사하는 기간입니다. 저는 가정의 달의 맞이하여 다윗의 가정에 대해 묵상하며 장단점을 배우려고 합니다. 까닭은 다윗왕은 위대한 영적 사람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장군을 물매 돌 다섯 개로 쓰러뜨린 사람이며, 사울왕의 핍박에도 어떤 때는 속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친 체까지 하며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끝까지 살아남아 왕이 된 후 나라를 굳건하게 세운 자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다윗을 그가 기록한 시편에서 보면 그는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결코 잊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영적 사람인 다윗이 그의 개인사에 속하면 속한다 할 수 있는 가정사에서는 잘한 점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안타까운 실수들이 있기에 오늘 이 시간 다윗가정에 생긴 일들을 살펴보고 다윗의 실수는 반면교사삼고, 잘한 점은 배워 행복한 가정을 이룩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다윗가정을 보면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다윗처럼 부모님을 공경합시다!
다윗은 부모님의 큰 사랑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사무엘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으로 이새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기름을 부을 때 아버지 이새로부터 집에 오라는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새가 보기에는 말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어린 나이임에도 들에서 외로이 양떼나 돌보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다윗이 시편 27편 10절의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는 고백처럼 입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랑을 받지 못한 자녀들이 삐뚤어 나갈 법도 한데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부모를 공경합니다. 특히,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서 광야를 전전할 때에도 부모님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배울 점이 큽니다. 다윗이 사울왕이 사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장인이 죽이려 하니 우선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간신히 왕궁을 빠져나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양식과 칼을 구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갑니다. 이때 아기스가 다윗을 알아보고 죽이려 하니 미친 체를 하여 간신히 도망 나와 아둘람굴에 거했던 다윗입니다. 그러니 이 상황의 다윗은 너무나도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아둘람굴에 피신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이때 사무엘상 22장 3절을 보면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라 말씀합니다. 지금 다윗의 형편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지금 내 앞길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순간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위해 모압왕에게 가서 자기의 부모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절을 보면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기 앞길도 불확실한데 부모님을 챙기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같은 부모공경은 너무나도 본 받고 싶은 모습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부모님을 공경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 없는 결혼은 하지 맙시다!
다윗은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맨 처음에 결혼한 미갈과의 결혼생활을 보면 사랑 없는 결혼의 비극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왕은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시기심에 빠집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먼저 세운 계략이 첫째 딸 메랍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블레셋 사람 백명의 목숨을 원합니다. 사울의 생각은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블레셋사람을 통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메랍은 다른 사람과 결혼함으로 이 계획이 실패했다 여겨지는 순간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이 계획을 진행합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가난하고 천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지만 왕의 사위가 되고픈 욕망에 사랑을 뒤로 하고 사울왕이 요구한 백명이 아니라 갑절인 이백명의 목숨 바치고 사울왕의 사위가 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다윗을 사위로 맞이한 사울왕은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문제는 이런 결혼을 한 다윗부부의 아픔입니다. 일개 목동에서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 조건인데 문제는 다윗이 미갈을 사랑했다는 구절이 없는 것입니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해서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한 아버지 사울왕을 속이고 다윗의 목숨을 살려주는 반면에 다윗은 그런 미갈을 사랑했다는 표현이 없는 것입니다. 즉, 다윗의 결혼은 오직 왕의 사위의 자리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도망자의 삶을 사는 과정에서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결혼을 합니다. 그 이후 사울왕은 미갈을 발디와 결혼 시켰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미갈에 대한 사랑은 전혀 없고 도망자의 삶속에서 부모는 챙겼어도 아내는 챙기지 않고 오히려 다른 여인들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이 사랑 없는 미갈과의 결혼의 비극은 그 이후에도 보여집니다. 그것은 다윗이 사울왕이 죽은 후 사울의 군대장군 아브넬의 귀순조건으로 이미 발디와 결혼한 미갈을 다시 내 아내로 데려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미갈을 사랑해서였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다윗에게는 이 미갈이 자신이 아내가 되어야 자신은 사울왕의 사위로서 이스라엘나라를 이어 받는 것에 명분이 생기는 조건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이 없던 이스보셋은 다윗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발디에게서 미갈을 빼어다 다윗에게로 보냅니다. 이때 미갈의 남편이 바후림까지 따라오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눈에는 미갈은 오직 조건뿐이었고 그녀의 행복에는 한치의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미갈을 아내로 맞이한 다윗과 미갈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다윗이 법궤를 매고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결국 폭발하고 맙니다. 미갈은 바지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며 기뻐하는 다윗을 향해 왕이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마치 건달패이나 하듯이 맨살을 보이며 춤을 추냐고 책망하였고, 이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하며, 덧붙이기를 삼하 6장 22절에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말을 하며 23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의 비극은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조건만 가지고 결혼했던 다윗은 신분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미갈을 억지로 데려올 정도로 상대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왕의 사위라는 조건일 뿐이었고 이 조건으로 결혼한 결과는 아내인 미갈의 행복을 철저하게 짓밟아 버리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행태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영적 사람도 이렇게 세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로 자녀에게는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합시다!
다윗의 자녀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윗에게는 아들들이 있었고 그 아들들 중 솔로몬이 왕이 되어 왕위를 이어받기까지 그 사이에 있던 아들들이 다 죽임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들들 중 첫째 암논은 둘째 압살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둘째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했다 죽고, 셋째 아도니야도 아버지 생전에 왕위를 물려받으려고 했다 죽고 결국 넷째인 솔로몬이 왕이 되면서 이 비극이 끝나게 되니 아버지인 다윗왕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아픔입니까? 아들들이 다 죽어 나가는 것처럼 힘든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극이 초래된 원인을 보면 다윗왕도 일조했음을 부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그의 사랑을 아들들에게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에 기인합니다. 다윗은 부모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행동으로 나타내지를 못했기에 아들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다윗처럼 위대한 영적 사람이 왜 아들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는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생각됩니다.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지 사랑을 받지 못해본 사람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어색해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의 사랑을 잘 받지 못하고, 없는 사람처럼 혼자서 양이나 지키던 다윗은 사랑 베푸는 것에, 사랑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사랑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던 다윗을 보며 우리들은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려면 슬퍼하기 전에 행동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먼저 장남 암논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사랑하고 만 것입니다. 이럴 때 주변에서 바르게 충고해 줄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불행히도 암논의 주변에는 간교한 자만 있었고 결국 간교한 요나답의 조언을 따라 여동생 다말을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때 다말의 친오빠되는 압살롬이 분노합니다. 친오빠이기에 분노는 당연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을 처리하는 아버지 다윗의 문제였습니다. 사무엘하 13장 21절을 보면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고 말씀하지만, 율법에 따라 죄를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에서는 “암논이 장자인 고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여 암논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책망하기에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을 죽인 죄가 더 크기에 누가 누구를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다윗은 심히 노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잠언 29장 15절을 보면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 히브리서 12장 6절을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매질하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이것이 다말의 친 오빠되는 압살롬에게는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만 것입니다. 사무엘하 13장 22절을 보면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 다윗의 옳은 행동을 기대했지만 다윗이 화내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끝내자 압살롬은 본인이 직접 처단해야겠다 결정하고 아예 잘잘못을 언급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장남 암논이 죽은 것을 슬퍼하기 이전에 먼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선을 그어 주었어야 합니다. 잠언 27장 5절을 새번역성경에서 보면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같은 실수가 결국은 장남 암논이 차남 압살롬에 의해 죽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다윗은 암논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이 슬픔은 너무나도 늦은 슬픔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다윗의 슬픔을 보며 이런 슬픔이 임하기 전에 먼저 행동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잘잘못은 분명하게 확인해 주어서 마음 상함이 없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을 양육할 때 진정 그 가정은 복된 가정들이 되게 됨을 아시고 슬퍼하기 전에 행동으로 부모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다윗의 가정의 아픔을 보면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은 사랑을 주는 것에 어색할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부모는 의무적으로 공경할 수는 있지만, 아내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사랑을 전해 주는 것에는 미흡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은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 모두는 가정에서 이 사랑을 당연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그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에게 표현하며 행동으로 보여줄 때 우리의 가정은 진정 행복한 가정으로 부모님은 공경하고,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은 부모의 면류관들이 다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