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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로봇의 본질과 인식의 갭(Gap)에 대한 이해의 단서 - 『여김』에 대하여 – 기독교 윤리의 기준 설정하기
김기석 교수(한동대학교 전산전자공학부), 한복협 11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발표문

 
김기석   기사입력  2023/11/10 [13:56]

이 글은 10일 오전 7시 서울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인공지능 로봇의 본질과 인식의 갭(Gap)에 대한 이해의 단서 - 여김에 대하여 기독교 윤리의 기준 설정하기"를 주제로 한동대학교 전산전자공학부 김기석 교수가 발표한 발표문이다. 뉴스파워에 게재하면서 편의상 각주는 생략했다.(뉴스파워)

 

 

▲ 서울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인공지능 로봇의 본질과 인식의 갭(Gap)에 대한 이해의 단서 - 『여김』에 대하여 – 기독교 윤리의 기준 설정하기"를 주제로 한동대학교 전산전자공학부 김기석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 뉴스파워




1. 로봇개를 뒤집은 이재명 후보

20211028일 당시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후보는 일산킨텍스 2021로봇월드 현장을 방문해 4족 보행 로봇개가 네 발로 뛰는 모습을 지켜본 뒤 '밀어도 안넘어진다'는 현장 관계자의 말에 바로 밀어보았다. 잘 버티고 넘어지지 않는 로봇개를 이번엔 두 손으로 밥상 뒤엎듯 뒤집어 버렸다. 로봇개는 힘없이 털썩 쓰러지게 되었다. 현장 관계자들도 당황한 듯 외마디 탄성이 나오고 이 후보는 "원래 일어나야 하는데"라고 하자 관계자는 "일어나는 게 맞다"고 답한다.

 

이 사건은 대선후보라는 정치적 위상에서 다양한 비난과 방어의 뜨거운 논란이 진행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필자가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정치적 논란을 언급하고자 함이 아님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가수 이승환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11년 동안 백돌이 밥(전기) 안 줬음. 죄책감, 측은함 1도 없이 로봇의 허기짐에 감정이입 못하는 난 #사이코패스?”라며 ‘#로봇학대’ ‘#끝판왕등의 해시태그를 붙여 이 후보를 두둔했다.

 

여기서 백돌이란 아마도 전기로 충전하여 작동하는 장난감 강아지인 것으로 추측된다. 백돌이라는 장난감 강아지는 어디까지나 장난감일 뿐이지 살아있는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살아있는 개에게 단 며칠이라도 밥을 안주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어디까지나 생명체가 아닌 그저 전자기기에 불과한 장난감에게 자그만치 11년씩이나 밥을 주지 않은, 즉 전기를 충전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일말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이재명 후보가 뒤집은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개가 아니라, 로봇이라고 하는 전자기기에 불과한 물건을 뒤집어서 제대로 일어나는지를 보고자 한 것 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재명이 뒤집은 로봇 개에 대하여 그것이 단지 로봇 즉 전자기기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정치적인 찬반의 입장에서 생각과 감정이 많이 왜곡되는 것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그 표현이나 생각속에서 로봇개에게 다소간의 정도차는 있을지라도 로봇개가 진짜 개인것처럼 여기는것 같은 모습을 많이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중권 씨는 로봇개를 패대기치지 말라고 했다. 생명이 없는 물체인데 패대기치면 안되는가? 그리고 상기 기사에서는 로봇학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집에 있는 냉장고 문을 쾅 닫으면 냉장고를 학대하는 것인가? 화가 나서 컴퓨터 모니터를 주먹으로 치면 컴퓨터를 학대한 것인가? 학대라는 말 안에는 마치 그 로봇개가 생명을 가진 생물로 여기고이에 대하여 분노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진중권 씨는 이에 더 나아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감정이입 능력의 문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보스턴다이내믹스에서 로봇 개를 발로 차는 영상을 공개했을 때, 커다란 항의와 분노의 물결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개발자들이야 로봇을 혹독한 조건에 몰아넣고 가혹하게 학대하는 실험을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살아있는 개와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가 학대당하는 모습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 살아있는 개와 똑같이 행동하면 살아있는 개가 되는 것인가? 진중권씨는 마치 로봇개에게 감정을 이입해야만 하고 그것도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보스턴 다이내믹스에서의 로봇개를 발로 차는 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살아있는 개와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가 학대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떄문에 그것에 대하여 상처를 입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말한다. 2. 스필버그 영화 A.I.에서 어머니는 양아들 로봇 데이비드를 버릴 수 있는가?

 

스필버그 영화 A.I.는 불치병에 걸려 무의식 상태로 병원에만 있는 외아들로 인하여 슬퍼하는 한 여자에게 그 남편이 최첨단 로봇을 선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최첨단 로봇은 사랑할 줄 아는 기능을 가진 로봇을 말한다. 병원에 있는 아들과 비슷한 나이의 체구와 모습을 한 데이빗이라 이름지워진 로봇은 거의 완벽한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대화나 행동 등에 있어서 사람의 것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아직 사랑할 줄 하는 기능은 작동되지 않았다. 그것은 주인이 된 그 여자가 직접 일정한 암호를 입력함으로써 시작될수 있는 기능이었다. 많은 시간과 갈등 속에서 결국 그 여자는 데이빗의 사랑할 줄 아는 기능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난 후 이 여자와 데이빗은 어머니로서의 모성애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찬 아들로서의 감정을 서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즉 서로 깊은 사랑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병원에 있던 아들이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짜 아들과 입양한 로봇 아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최종적으로 같이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여자는 로봇 아들을 파양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로봇회사로 로봇아들을 돌려보내려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여자에게 알려진다. 로봇회사로 로봇아들을 돌려보내면 그 회사에서 그 로봇을 해체하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말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이 여자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같이 살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양자로 입양하고 심지어는 사랑의 감정을 공유했던 로봇 아들이 해체되는 사실을 알고 로봇회사로 돌려보낼 수도 없다. 이 단계는 인간 공동체와 같이 속했던 휴머노이드 로봇에 대한 인간의 책무에 대한 논쟁으로 연결된다. 어디까지가 로봇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어야 하는가?

 

필자는 4차산업혁명과 기독교 관련 강의를 진행할 때 종종 주어진 청중들을 그룹으로 나누어서 토론을 시키고 발표하도록 한다. 그룹별로 결론을 내려보도록 한다. 만약 당신이 그 여자라면 로봇회사로 돌려보내겠는가? 아니면 영화속 여자처럼 숲속에 유기하겠는?

 

그 토론 중 기억나는 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한다. 회사로 돌려 보내겠다고 말한다. 설사 사랑의 감정을 나눴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입양된 아들 데이빗은 그저 로봇일 뿐이라는 것이다. 로봇은 그저 전자기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장나서 또는 불필요해져서 회사로 돌려보내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뜻인지 충분히 논리적으로 그리고 머리로 이해를 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어쩜 저 학생은 왜 이리도 냉정한지 마음이 차가워진 적이 있었다.

 

3. 로봇의 본질 이재명은 억울하다. 이재명 후보가 뒤집은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반도체 회로와 코딩 그리고 그 명령을 자연스럽게 수항핼수 있는 4족 보행 전자 기기라는 것이 이재명 후보가 뒤집은 로봇개의 본질이다.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 나오는 데이빗이라는 로봇은 사람의 형체와 거의 똑같은 휴머노이드 로봇이지만, 여전히 그 본질은 로봇일 뿐이다. 반도체 회로와 코딩된 명렁어, 그리고 인간의 피부를 거의 흉내낸 로봇 피부, 그리고 인간의 표정을 그대로 흉내낼 수 있는 기능에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로봇의 본질이다.

 

필자가 어느날 , 4차산업혁명과 기독교의 주제로 열린 어떤 신학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날 로봇에게도 사랑이 있다고 말할수 있는지, 또는 로봇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말할수 있는지에 대하여 신학적, 철학적, 관념적, 형이상학적 토론이 신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어떤 결론이 나기보다는 더욱 꼬여가는 토론 속에서 정말 로봇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있는 한 공학자로서 정말 외치고 싶었다. 로봇에게는 사랑이 없다. 로봇에게는 믿음이 없다. 로봇에게는 인격이 없다. 그저 반도체 회로일 뿐이고 그저 그렇게 행동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인공지능 로봇의 본질이다.

 

4. 감정을 가진 로봇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을 뿐이다. 감정을 가진 로봇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개발한 페퍼(Petter)“이다. 알데바란 로보틱스와 소프트뱅크 모바일에서 2014년에 공개된 페퍼(pepper)는 사람의 의도를 읽고 그에 맞게 대응한다. 이 로봇은 현재 일본 소프트뱅크 대리점에서 고객들을 맞이하고, 제품과 서비스에 관한 몇가지 간단한 질문에 답하기도 하지만, 이 로봇의 주요한 가치는 고객과 어울리고 고객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또다른 감정인식 로봇은 IBM에서 만든 나오미인데, 어렵게 쌓은 탑을 다시 무너뜨리라고 요구하는 사람에 대하여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울음을 터트리고 마지못해서 무너뜨리는 영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로봇도 감정을 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과연 로봇은 감정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한 엔지니어의 질문은 매우 명료하다. 봇을 만드는 엔지니어라면 로봇은 반도체 회로와 코딩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전자기기에 불과하다는 명확한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감정을 가진 로봇은 특정 감성 상태를 표현하거나 인식하는 로봇을 말한다.

 

그러나 로봇이 실제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감정 반응을 모방하거나 이해하도록 코딩이 되어 있을 뿐이다. 감정을 인식하기 위하여 카메라, 마이크, 센서 등을 통해 인간의 표정, 목소리, 생체신호를 분석하여 감정상태를 판단한다.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온 몸의 움직임, 소리, 표정, 생각 변화 등을 통해 특정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아무리 인간과 거의 유사하게 감정을 느끼고 또 표현하는 로봇이 있다 하더라도 그 로봇은 어디까지나 반도체 회로일 뿐이고 코딩으로 작동되는 전자기기이다. 이것이 본질이고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분명한 사실과는 무관하게, 그 휴머노이드 로봇의 표정, 말투에 접한 사람들은 마치 그 존재도 우리와 똑같이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여기게된다. 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착각하게 된다. 더욱이 이성적으로 충분한 판단력을 갖고 있지 않은 어린이들이라면 더더욱 휴머노이드 로봇이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설사 어른이라도, 머리로는 단순한 반도체 회로일뿐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우리가 몸으로 또는 마음으로 느끼는 그 존재는 감정이 마치 그 로봇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여기게되는 것이다.

 

감정 뿐만이 아니다. 신앙 고백하는 로봇, 구원의 기쁨을 고백하는 로봇, 인격적인 대접을 받기 원하는 우아하게 생기고 말하는 로봇 등등이 모두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어진 반도체 회로이고 코딩일 뿐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릴 일이다.

 

5. 본질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여기는것이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은 냉정하게 그 본질을 직시하지 않는다. 아니 직시하지 못한다. 재명 후보가 뒤집은 로봇개에 대하여 신문 기사는 로봇학대라고 표현한다. 진중권 교수는 감정이입을 마땅히 해야 했었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개와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가 학대당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 사이에 갭(Gap)이 존재한다. 본질과 사람들의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갭을 필자여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여김에 대하여 상황에 따라 그 의 성격과 내용을 깊이 분석하면 그 갭(Gap)에서 나오는 다양한 갈등 또는 문제의식을 풀 열쇄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찾아질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본 글을 쓰는 동기이다.

 

여기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속으로 그렇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하다는 뜻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 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공지능 로봇은 어디까지나 회로이고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우리와 똑같이 감정을 갖고 있고 또 감정을 표현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똑같은 논리로, 인공지능은 결코 사랑을 가질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또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공지능 로봇은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의 태도와 목소리와 그리고 진실된 톤으로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신앙 자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결코 사랑 자체를 가질수 없고, 감정과 자유의지 등을 갖고 있다고 말할수 없다. 신앙에 대하여 배우고 말할수 있지만, 인공지능 로봇 자체가 신앙을 갖고 있다고 말할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공동체 안의 구성원으로 인공지능 로봇이 자리잡게 될 경우, 사람들은 그가 감정이 없지만 있는 것으로 여기게될 것이고, 사랑 자체를 결코 갖고 있지 않지만, 사랑하는 대상으로 여기게될 것이다. 더 나아가, 결코 신앙 자체를 갖지 못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여기게되는 것.. 그것이 진짜 문제이.

 

여김이라는 단어 속에 존재하는 본질과 인식의 갭을 어떻게 인간들에게 그리고 로봇과 함께 자라는 세대에게 인식시키고 구별해줄 수 있게 하느냐가 인공지능 시대에서의 신앙적 혼란을 줄일수 있는 열쇄일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에 인공지능과 관련된 여러 윤리적 기준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수 있다.

 

6. 이재명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로봇개를 살아있는 개처럼 여기는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 것이다. 아무리 이재명이 뒤집은 것의 정체는 반도체 회로로 내부가 구성되어 있고, 바깥외형은 개처럼 생기고 움직이게 한 전자 기기일 뿐이라고 외쳐도, 다소간의 사람들이 그것을 살아있는 개처럼 여기면서마음이 불편한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다시한번 말하지만 정치적 이슈는 제거하고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한 것을 넘어서서 분노하고 또 그 로봇개를 불쌍히 여기는마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스필버그의 a.i. 영화에 나오는 그 엄마는 그 로봇을 아들로 여기는마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코 로봇아들과 나눴던 사랑의 감정을 버릴수 없을 것이다. 그 엄마에게 그 로봇아들이 반도체 회로이며 그렇게 행동하도록 코딩한 , 아주 단순한 전자 기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그냥 로봇회사에게 보내서 폐기처분해도 된다고 설득하면 설득될 것 같은가?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동안 로봇아들과 나누어왔던 , 그리고 위로받았, 그리고 즐거웠던 그 기간들의 감정은 쉽게 없앨수 있는 것이 아니다.

 

7. 로봇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첫 출발은 로봇의 정체는 반도체 회로와 코딩일 뿐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철저히 로봇은 인간을 해쳐서도 안되고, 스스로의 결정으로 인간을 죽이는 무기는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지나치게 인간의 감정과 연대될 수 잇는 상황으로 가능하면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기독교 교회와 신앙공동체 안에는 신앙을 고백하는 로봇을 들여서는 안되며, 특히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이들에게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한 로봇을 가능한한“ 가까이 있게 해서는 안된다.

 

즉 로봇의 정체는 반도체 회로와 코딩일 뿐이지만, 그것을 그렇지 않다고 사람들이 여길수있는 수준을 가능한 한 낮게 만드는 것이 일차적인 윤리의 첫 번쨰 기준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8. 이에 더하여 또 한편의 윤리적 기준은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전 8:1-13을 통하여 제사음식에 대한 두가지 견해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제사 음식은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제사음식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가르침은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한다. 먹어도 되지만, 먹는 것을 본 믿음이 약한 자들은 자칫 멸망에 이르는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약한 형제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할만한 행동은 하지 않도록 말한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형제가 실족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면 영원히 먹지 않아서 형제를 실족하게 할 가능성을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제사음식에 대한 접근 방법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마련해준다. 그렇다. 인공지능 로봇은 단지 반도체 회로이며 코딩일 뿐이다.

 

그래서 전혀 그 인공지능 로봇에 대하여 그것이 어떤 생물로 더 나아가서 사람과 대화할수 있는 인격으로 인정해줄 필요가 없다. 대선후보 이재명이 뒤집은 것은 단지 반도체 회로와 코딩과 개처럼 걷는 물체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혹 실족할 형제가 있을수 있는 것처럼, 로봇개를 보고 그 로봇개가 정녕 살아있는 로봇처럼 여기는사람들이 있다. A.I 영화에서의 그 어머니는 입양한 로봇아들이 그저 반도체회로일 뿐이고 사람을 흉내내도록 코딩된 존재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수 없었다. 이미 로봇아들과 정서적 연대가 깊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로봇아들을 제조 회사에 돌려보내어 헤체되는 것에 대하여 아주 깊은 양심적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마치 사도바울이 믿음이 약한 사람에 대하여 배려하고 그것을 위하여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수 있을 결단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인간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마치 생명체처럼 또는 같은 인간처럼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족으로 여기는사람들에 대한 배려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를 논할 때 또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할 것이다.

 

9.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 때, 잘못 형성될 인간의 여김의 가능성을 최소화할수 있게 해

야 한다.

 

신서유기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강호동을 비롯한 여러 유명인들이 모여서 다양한 체험을 진행하며 때로는 게임을 진행하기도 한다. 2017년 어느날 방송된 프로그램에서는 애플의 인공지능 대화 프로그램인 시리로부터 사랑해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게임에서 이기는 게임이었다. 강호등, 이수근, 규현 등이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유도하지만 시리는 결코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I Love You“를 한국말로 하면 뭐지? 라고 물어도 대답은 사전을 찾아 보세요라고 말한다.

 

이 프로그램을 시리를 만들고 설계한 공학자의 입장에서 보자. 처음에 시리를 만든 공학 엔지니어들은 이 시리가 잘 못 사용될 가능성을 미리부터 분명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즉 이 글의 요지로 표현하면 시리를 단지 대화의 상태가 아닌, 사랑을 나눌수 있는 연인으로 여길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조금도 실현되지 않도록 철저히 그리고 가장 방어적으로 시리라는 프로그램을 코딩하였던 것이다.

 

래서 마치 시리가 사랑해 라고 말함으로써 듣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존재로 여기될 가능성을 아주 배제한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존재할 다양한 인공지능 로봇과 관련 서비스들을 제작할 때, 이와같은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사람 모양을 한 로봇을 만들지 않아야 하, 많은 서비스 끝에는 항상 단지 인공지능 로봇임을 스스로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수준 이상으로 정서적 연대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 선을 넘어서지 않도록 주의하거, 또 주변에 경고를 던질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사람을 신체적으로 해할 가능성은 철저해 배재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것이 또하나의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10. 마무리- 로봇 추모 예배를 치르실 준비되셨나요인공지능 시대 기독교윤리의 맨 오른쪽 끝. 2017년 봄, 도쿄 인근 지바현 이스미시의 고후쿠지(光福寺)에선 100대의 아이보 영혼을 위로하는 장례식이 열렸다. 이날 장례식은 후지소프트의 대화형 로봇인 팔로(Palro) 로봇의 추도사와 분겐 오이 스님의 경전 암송으로 진행됐다.

 

이번이 소니 아이보 로봇을 위5번째 장례식이라고 한다 장례식이 필요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그 로봇을 AS하기 위한 부품도 사라지고 또 그 조직도 사라져서이다. 만약 성도들이 집에서 함께 하던 인공지능 로봇을 어떤 이유로 장례식을 치러야할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느날 목사님들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어떤 목사님께서 이중에서 성도들이 키우던 애완견 장례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 목사님 손들어보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었는데 놀라웠던 것은 그 자리에 계신 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께서 그런 경험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개는 그저 개일 뿐이고 영혼은 없는 존재라고 성도를 설득하며 장례 예배를 드릴 필요는 없다고 설득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의 슬픔에 같이 슬픔을 나누며 예배를 드릴 것인가?

 

, 이 글을 진지하게 읽으신 목사님들은 아마 기꺼이 로봇 추모 예배를 드려 달라는 성도의 부탁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준비가 되셨을 것이라고 본다. 로봇은 어디까지나 반도체 회로일 뿐이고 코딩일 뿐이며, 또한 미생물일 뿐이다.

 

그것을 인공지능 로봇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기준의 맨 왼쪽이라고 해보자. 그 가족들과 정서적 연대를 나누며 사랑을 나누고 인격적인 교류를 나눠왔기에, 그 가족들은 인공지능 로봇을 또하나의 가족으로 기고살아 왔던 것이다. 그 로봇과 헤어질 때의 슬픔에 대하여 우리는 인간의 마음에 형성된 정서적 연대를 무시하지 말고 함께 슬픔을 나누는 것..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에 생각할수 있는 기독교 윤리의 맨 오른쪽 끝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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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11/10 [13:56]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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