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0일 오전 7시 서울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곽혜원 교수가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합세한 위험 시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주제로 발표한 원고이다. 원고에 있던 각주 등은 뉴스파워에 게재하면서 편의상 생략했다.(뉴스파워)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세대와 장로회신학대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튀빙엔(Tübingen) 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 경기대학교 초빙교수이며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 대표이다. 단독저서로는 Das Todesverständnis der koreanischen Kultur(한국 문화의 죽음 이해), 『현대세계의 위기와 하나님의 나라』,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자살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저작)을 발표했으며, 공저로는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 『관계 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죽음 목회』, 『과학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죽음을 왜 두려워하는가』, 『죽음교육의 필요성과 그 방법에 관하여』, 『사람은 왜 죽는가』, 『젠더 이데올로기 심층 연구』, 『유토피아니즘과 하나님의 나라』, 『퀴어 신학이 왜 문제인가』, 『세속적 인간화와 성경적 새 사람』, 『생명과 신학』 『여성과 젠더』(근간)가 있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의 저서들 『절망의 끝에 숨어있는 새로운 시작』,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 『희망의 윤리』를 번역하였다.(뉴스파워)
▲ 서울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곽혜원 교수가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합세한 위험 시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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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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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 제기: 4차 산업혁명과 COVID-19의 합작으로 도래한 문명의 대전환
2. 팬데믹이 합세한 4차 산업혁명 위험 시대의 특징
2.1 팬데믹이 앞당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인공지능(AI)의 급진전
2.2 기계에 대체되는 탈(脫)인간화 시대 속에서 노동의 종말과 잉여 인간의 급증
2.3 디지털 초(超)연결 사회 속에서 빈곤해지는 휴먼 커넥션과 정신질환의 확산
2.4 악화일로로 치닫는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
3.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합세한 위험 시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3.1 기술 발전의 양면성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한 신학적·윤리적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3.2 급변하는 노동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전면적 교육개혁이 불가피하다.
3.3 역경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회복 탄력성이 문명 전환기의 중요 관건이다.
3,4 상생·연대하는 생명 공동체의 회복이 인류의 생존과 안녕을 보장한다.
3. 결어: 문명의 변곡점에 선 21세기 한국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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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차 산업혁명과 COVID-19의 합작으로 도래한 문명의 대전환
인류 역사는 세계적으로 대전쟁이나 대역병을 겪고 난 후,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났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전염병은 인류의 운명과 함께 공존함으로써, 문명의 중대한 변곡점에는 항상 바이러스가 관여하였다. 이에 팬데믹(pandemic)과 함께 시대가 변천함으로써, 옛 시대가 지나가고 새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고대 로마는 흑사병, 천연두, 발진티푸스 등 최악의 역병들을 잇달아 겪으며 저물었다. 중세 유럽은 흑사병의 결과로 농업 근간의 경제가 붕괴되고 장원 중심의 봉건제도가 쇠퇴하였다. 종교개혁의 거대한 영적 기류에도 팬데믹이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게 연구자들의 중론이다. 현대사 최악의 팬데믹 스페인 독감 창궐 후 세계 경제가 재편됨으로써, 대영제국은 몰락했고 미국이 신흥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4차 산업혁명의 초(超)연결 시대 속에서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논하던 2020년, 지구촌은 전대 미문의 COVID-19 팬데믹 블랙홀에 빠지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물질문명과 최첨단의 과학기술, 최고의 의학기술을 자랑하는 이 시대가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세계사를 새롭게 재단하면서 일찌감치 이 시대가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거라고 예단하였다. 특히 필자는 COVID-19와 함께 역사의 변곡점이 또 다시 도래함으로써, COVID-19는 인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될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COVID-19 체제’ 원년인 2020년 이후 다른 세상이 도래함으로써, 이전의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뉴노멀’(new normal)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제 4차 산업혁명과 COVID-19 팬데믹의 합작으로 21세기는 문명의 대전환 시대에 진입할 것이다. COVID-19로 인한 뉴노멀의 등장은 4차 산업이라는 기술혁명의 도구와 함께 우리의 삶을 바꿀 것임은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4차 산업혁명의 기술 발전이 점진적으로 변화를 준 가운데 COVID-19라는 촉매제가 가세함으로써, 변화의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앞으로 팬데믹이 자주 출몰할 것이고 4차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해 우리는 이전에 살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에서 살게 될 것이다. 정치·경제·사회·환경·교육·종교 등 많은 영역이 이미 팬데믹으로 인해 급변함으로써,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향후 몇 년 동안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직 상세한 메뉴얼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이미 1980년대 그의 저서 『위험 사회』(Risk Society, 1986)에서 현대 사회가 기술과 산업은 발달했지만,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위험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기술한 바 있다. 그는 기술과 부(富)가 인류를 안정시키고 번영을 주리라는 유토피아적 낙관보다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 파고듦으로써 21세기가 위험화된 세계가 될 거라고 경고하였다.2016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을 주창한 클라우스슈밥(K. Schwab)은 자신의 책 『제4차 산업혁명』(The Forth Industrial Revolution, 2016)에서 인류 역사상 지금보다 더 잠재적 위험성을 수반한 시기는 없다고 주장하였다.더욱이 글로벌화로 전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다 보니, COVID-19 같은 전염병이 순식간에 전파되고 여러 위험 요인이 전 세계를 뒤흔드는 일이 일상이 될 수 있다.
현재 인류는 위기 위에 위기가 더해지는 ‘메가 크라이시스’(mega crisis)에 직면해있으며 예측 불가능성이 뉴노멀인 시대에 놓여 있다. 21세기 기독교는 이 시대가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함으로써,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위험 시대에 치밀하게 대비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부여받았다. 사실상 4차 산업혁명 단일요인만으로도 너무나 버거운데, 팬데믹이 합세한 위기 국면에 다음 세대를 치밀하게 준비시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이다. 위험 시대가 도래한 21세기는 ‘누가 더 위험을 피해 가느냐보다는, 누가 위험에 잘 대비하고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본 논문은 인류 문명의 변곡점에서, 특히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합세한 위험에 직면한 이 시대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이 위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처 방안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팬데믹이 합세한 4차 산업혁명 위험 시대의 특징
2.1 팬데믹이 앞당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인공지능(AI)의 급진전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디지털 전환이 급속도로 앞당겨짐으로써, 인공지능(AI)의 발달이 가속화하였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최고의 핵심 기술인 AI가 예상보다 빠르게 급진전하고 사회 전반에 변혁을 촉발하게 된 것은 팬데믹 여파 때문이다. 팬데믹 기간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일상을 멈춰야만 했던 사람들은 점차 온라인 비대면 환경에서 말하고 공부하고 노동하는 데 익숙해졌다. 비대면 문화가 일상화되면서 디지털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가운데 AI가 급속히 확산함으로써, 사람들은 AI를 통해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탐색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이후의 급변하는 세계의 중심에는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의 산물 AI가 자리잡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70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AI의 위력과 존재감이 대중적으로 인식된 것은 2016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2016년 전 세계에 휘몰아치듯 발생한 AI 관련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높은 기대감과 함께 큰 충격에 휩싸였다. 구글의 알파고(AI 기사)가 바둑 천재 이세돌 9단을 4승 1패로 이긴 세기적 바둑 대결을 필두로 최고의 의사보다 더 정확하게 암을 진단하는 AI 의사, 변호사 수십 명의 역할을 대신하며 법정에서 판사를 대신해 판결 초안을 만든 AI 법조인, 유능한 투자 전문가 그룹 전체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낸 AI 경영인, 예술 분야 전반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AI 예술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이 2016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발생함으로써, AI는 의학·법학·경영학·예술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놀라운 존재감과 더불어 큰 우려 또한 안겨주었다.
2016년 10월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도되었는데,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지능미래센터’(CFI)를 개소하면서연사로 나선 이론 물리학 분야 세계적 석학 스티븐 호킹(S. Hawking)은 “AI는 인류에게 가장 최악의 것이 될 수 있다”(AI could be the worst thing for humanity)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2년 전 2014년 2월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AI는 인류의 종말을 의미할 수 있다”(AI could spell end of the human race)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AI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그리 특별하거나 보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호킹의 발언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AI 기술이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AI의 미래 가능성과 존재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AI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기술인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이미 함께 자라고 있었다. AI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 메시지는 단지호킹만의 목소리가 아니어서, 대표적으로 AI 과학자이자 UCLA 컴퓨터공학과 교수인 스튜어트 러셀(S. Russel)은 AI가 “인류 사상 최대의 성과인 동시에 최후의 성과이자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닉 보스트롬(N. Bostrom) 옥스퍼드대 철학과 교수는 AI 분야의 융복합 윤리, 철학에서 세계가 주목할만한 석학인데, 그 역시 상당히 오래전부터 AI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그러다가 전 세계가 COVID-19 팬데믹 종식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AI는 무섭게 진화하여 지구촌을멘붕 상태에 빠트리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낯설게 느껴졌던 생성형 AI의 대표주자 챗GPT(ChatGPT)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022년 말 전 세계를 AI 열풍으로 몰아넣은 챗GPT는 2022년 11월 30일(한국 시간 12월 1일) 오픈AI(OpenAI)가 출시한 지 2개월 만에 월 사용자 1억 명에 도달하며 역사상 가장 빨리 보급된 기술로 손꼽힌다. 무료로 공개한 ChatGPT-3.5 버전은 1,750억 개의 매개 변수 중에서 가장 연관성이 높은 확률의 단어를 선택해 문장을 구성해 준다. 2023년 3월 14일 공개된 ChatGPT-4 버전은 이전 버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매개 변수를 사용해 훨씬 더 답변의 정확도가 높아졌다.초거대 언어모델 챗GPT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언어라는 인간 고유의 지적 도구를 조작법으로 삼은 데 기인한다. 그동안 언어와 사고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으로 간주되었는데, AI가 대규모 언어모델을 통해 인간의 언어능력을 배우고 인터넷의 방대한 자료를학습해서 인간과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인간 고유의 일로 여겨지던 ‘지식의 생성 능력’까지 얻으면서 챗GPT 시대의 AI는 노동 시장, 특히 인간의 지식 노동을 뒤흔들 가공할만한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챗GPT가 열화와도 같은 인기를 끌다 보니, AI 개발이 초래할 미래에 대해 과학계를 위시하여 사회 각 영역에서 긍정과 부정이 팽팽하게 나뉘는 상황이다. 오픈AI의 공동 설립자였던 일론 머스크(E. Musk)는 2023년 2월 15일 AI가 “문명에 가장 큰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규제에서 벗어난 AI 개발은 핵폭탄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하였다. 3월 28일에는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삶의 미래 연구소’가 “모든 AI 연구소에 GPT-4보다 강력한 AI 개발을 최소 6개월간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서한에는 애플 공동 창업자인 스티븐 워즈니악(S. Wozniak), 테슬라 최고 경영자 일론 머스크,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저자 유발 하라리(Y. N. Harari) 등이 서명하였다. 물론 AI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어서, AI 기술을 개척하여 컴퓨터 과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튜링상을 수상한 얀 르쾽(Y. LeCun)은 “AI를 중단하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유용하고 유익한 기술의 위험성을 조작해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B. Gates)와 딥러닝AI 창업자 엔드류 응(A. Ng)은 AI 개발을 6개월간 유예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면서 이 기술에 큰 이점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AI 기술 발전이 급진전함에 따라 감탄과 동시에 너무 빠르게 진화하는 AI 기술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고 있다. AI에 대한 두려움은 단순히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인간이비(非)인간의 존재를 볼 때 인간과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호감도가 상승하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의 차원도 있겠지만, 기술이 인류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불투명성, 크게 기술적 위험과 인간학적 위험도 큰 몫을 차지한다. 챗GPT 같은 AI에 대해 가장 강하게 우려한 사람 중 한 사람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실 챗GPT 공개 이전부터 AI의 위험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해왔다. 그는 “AI의 새로운 언어 숙달이 인류 문명의 운영체계를 조작할 수 있음을 뜻한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뇌는 점점 더 해킹당하기 쉬워지고 있다”라고 우려한 바 있다. 챗GPT를 바라보는 경탄과 불안의 양가적 감정 속에서 AI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나날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2 기계에 대체되는 탈(脫)인간화 시대 속에서 노동의 종말과 잉여 인간의 급증
COVID-19로 인해 인간을 노동 요소로 인식하는 기존의 생산 프레임은 점점 디지털 탈(脫)인간화 중심으로 가속화되고 있다.원래 팬데믹 사태 이전에도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진행되었는데, 비정규직이나 일명 ‘긱 워커’(gig worker, 고용주의 필요에 따라 단기 계약을 맺고 노동하는 일용직을 지칭)의 등장이 이를 대변한다. 정규직의 감소는 단순히 경기 불황의 문제가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인한 직업의 종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플랫폼 비즈니스(platform business)의 증가로 인해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질 뿐 아니라, AI의 확산과 업무 자동화로 인해 인간의 손을 더욱더 덜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과거의 산업혁명에 비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훨씬 광범위하게 일자리 붕괴 현상이 일어나고, 노동시장 내 양극화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1990년대 제레미 리프킨(J. Rifkin)의 미래서인 『노동의 종말』(End of Work)은 4차 산업혁명을 예견하면서 향후 인간의 노동이 필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노동을 빼앗는 장본인은 기술과 경영혁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블루칼라는 물론 화이트칼라 또한 대량실업을 맞이하는 사회가 오며, 재화나 서비스 생산요소로서의 인간의 요소는 더 이상 불필요해진다는 것이다. 제조업을 위시하여 금융업, 요식업 등 산업 전반에 걸쳐 AI를 통한 자동화는 더욱더 가열차게 진행될 것이다. 노동시장에서는 프리랜서나 긱 워커가 점점 증가함으로써, 전형적 고용 형태는 사라질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G. Standing)이 주창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단어는 불안정하다는 뜻의 ‘precarious’와 노동자 계급인 ‘proletariat’를 합성한 신조어로서, 많은 사람이 불안정한 일자리의 직격탄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인간의 다양한 기능, 특히 대부분의 일자리를 AI나 로봇이 대체한다는 우려는 진작부터 제기되었다. 이미 4차 산업혁명의 돌입으로 선진국들이 리쇼어링을 계기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자동화하는 공장들을 더 많이 늘림으로써, 로봇이 많은 일자리를 대체해가는 상황이었다. 특히 COVID-19로 인해 기업들이 AI를 더욱 선호하고 자동화를 추구함으로써, 로봇의 사용이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팬데믹 때문에 단기간에 수많은 사람이 실직하면서 이제는 사람을 고용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더욱 탈인간화될 것이다. 문제는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의 합작으로 탈인간화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앞당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AI와 로봇이 세상의 온갖 일을 다 하고 인간의 일을 대체한다면, 인간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더욱 빨리 다가오고 있다.
『미래 사회 보고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돈이 없어서 소비할 것도 없고 여가를 즐길 수도 없는 암울한 미래 사회를 묘사한다. 여기서 3차 세계대전은 어쩌면 일자리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을 거라는 예측이 나오는데, 실제로 여론 조사 보고서인 갤럽의 CEO 짐 클리프턴(J. Clifton)은 세계 경제조사 보고서에서 “3차 세계대전은 일자리 전쟁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그러므로 앞서 소개한 유발 하라리도 『21세기의 21가지 제언』(21 Lessons for the 21stCentury)에서 기술혁명은 조만간 수십억 명의 인간을 고용시장에서 몰아내고 막대한 규모의 무용(無用)계급을 만들어낼지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즉 자본주의에서의 인간 소외는 4차 산업의 등장으로 엄청난 수효의 잉여 인간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2.3 디지털 초연결 사회 속에서 빈곤해지는 휴먼 커넥션과 정신질환의 확산
COVID-19가 인류 사회에 끼친 영향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사람 간의 접촉으로 인한 감염 우려 때문에 사람을 대면하지 않는 ‘언택트 사회’(untact society)가 도래했다는 점이다.이를 계기로 재택근무의 확산이 시작됨으로써, 원거리 근무(remote work) 또는 홈 오피스(home office)라는 개념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팬데믹 기간에는 ‘방콕 경제’(shut-in-economy)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는데, 이는 곧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온라인 쇼핑, 온라인 회의, 온라인 학교, 집 안에서 하는 취미생활 등의 수요가 급증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동안 우리의 일상은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대면적 일상이 주류였는데, 비대면 사회가 도래함으로 완전한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사람과의 대면이 점차 경원시됨으로써, 요즘 추세는 ‘언택트’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MZ세대는 심지어 전화 통화 자체도 부담스러워해서, 미리 시간을 예약하지 않으면 불시에 걸려오는 전화를 기피하는 경향이다.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합세한 시대에는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화가 예상되는데, 특히 디지털 역량을 전면적으로 활용해 비대면 산업과 같은 신(新)산업의 창출이 중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지배적이다.이에 디지털 기반의 비대면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 등 향후 변화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팬데믹으로 인해 불가피해진 비대면 사회를 위한 기반으로서 5G 기술이 더욱 유용하게 쓰이게 될 전망이다. 5G 통신의 개발로 사물 인터넷(IoT)이 더욱 활성화됨으로써, 삶의 모든 기기가 서로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데이터를 만들어내고 원거리에서 작동될 것이다. 개인과 기업이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사물 인터넷은 스마트 홈, 스마트 팜, 스마트 공장 등 취합된 각종 데이터를 분석하고 원하는 조건을 최적화함으로써, 시간과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리적으로 직접 사람의 손으로 통제하던 것을 이제는 기계로 제어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기술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는 디지털 초연결 사회가 도래하면서, 타인과 공감하는 사회적 능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우려가 아닌 현실이 되었는데, 팬데믹 사태 이전부터 몇 가지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먼저 2010년 미시간(Michigan) 대학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공감 능력이 40퍼센트나 떨어졌고(20~30년 전과 비교 시), 이 공감 능력의 저하는 대부분 2000년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고된다.또한 MIT 대학의 셰리 터클(S. Turkle) 교수에 의하면, 10대 청소년 중 44퍼센트는 가족 혹은 친구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온라인 세상과의 연결을 끊지 않는다. MZ세대의 절반은 중단 없는 온라인 소통으로 인해 휴먼 커넥션에 위중한 문제를 겪는 것이다.그러면서 터클 교수는 스마트폰이 단지 주변 시야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 사이의 유대감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이것은 우리가 스마트폰을 아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지혜롭게 활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디지털 세상은 쉽게 소통하고 비대면으로도 접촉할 수 있는 편리함을 지니고 있지만 개인의 고립감과 외로움을 더 깊게 할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클라우스 슈밥도 지적했듯이 스마트폰을 통한 초연결성이란 피상적인 정보에 의존한 것이어서 공감이나 협력 그리고 연대성 같은 인간의 기본적 능력을 파괴할 가능성이 크다. 비대면 접촉이 늘고, 언택트 상황이 길어지면 친밀감과 유대감 그리고 소속감을 제공하는 공동체에 대한 욕구가 커질 수 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사람들이 원하는 신앙 공동체는 과거와 같은 위계적인 조직이나 딱딱한 제도로서의 공동체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친밀감과 소속감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일 것이다.
팬데믹이 장기화하는 디지털 초연결 시대에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제대로 못 맺다 보니, 우울증을 위시한 정신건강 문제가 대두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자택 격리로 가정폭력과 이혼율이 높아졌다는 보도도 잇따랐다. 팬데믹 기간 시행된 많은 설문 조사 결과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일명 ‘코로나 블루’를 앓았다고 응답하였다.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적응, 경제적 손실, 실직 및 실업, 건강 이상 등의 요인으로 말미암아 각종 정신질환에 노출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국민은 1998년부터 20년 넘게 OECD 자살률 1위(2017년만 예외적으로 2위)의 비상 상황이다.설상가상으로 팬데믹 사태까지 가세하면서 정신 질환자들은 더욱 늘어남으로써, 자살 동향 데이터가 심상찮은 위기 국면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많은 국민이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져있거나, 생존의 벼랑 끝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리프킨은 이미 30년 전에 극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중산층이 무너진 ‘압정형 사회’를 예측하였다. 극소수 엘리트가 세계 재화의 98퍼센트를 생산하고 대다수가 2퍼센트만을 생산하는 구조는 필연적으로 사회분열을 야기한다. 적은 일자리를 둘러싸고 아귀다툼을 벌이지만 일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자학하며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일터에 남아있는 노동자도 정신적·육체적 피로에 시달리는데, 빠른 작업과 높은 성과를 요구하는 기업과 회사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직과 서비스 사원은 컴퓨터로 신속하게 정보를 접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인간의 상호작용을 참지 못해 조급함과 스트레스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AI를 이용한 심리상담, 24시간 멘탈 케어 챗봇도 성행하고 있다. 마침내 AI와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인간을 위로해주는 아이러니한 시대가 온 것이다. 사회부적응자, 낙오자, 사회불만자, 정신질환자들이 급증하는 한편으론 가상현실에서 세상을 도피하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아질 것이다.
2.4 악화일로로 치닫는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의 심화
4차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엄청난 혜택을 제공하는 한편, 그에 상응하는 과제, 특히 사회적 불평등은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4차 산업혁명의 위험성은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이에 클라우스 슈밥은 『제4차 산업혁명』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노동시장의 거대한 변화가 더욱 심각해지고 사회·경제적으로 배제된 사람이 늘어남으로써, 기존의 엘리트 계층 및 구조에 대한 환멸이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적 행동을 더욱 자극한다고 우려히였다.그러므로 불평등의 증가는 단순한 경제현상이 아닌 중요한 사회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사람들이 번영의 가능성과 삶의 의미를 조금도 찾을 수 없다고 느낀다면 굉장히 심각한 사회적 위험 요인이 발생한다는 것이다.불평등이 횡행하는 시대는 절대로 안녕(安寧)할 수 없는데, 불평등은 바이러스 못지않게 위험해서 못 가진 자들의 절망은 사회적 폭발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에 막 진입한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COVID-19가 우리의 삶을 점령한 지 3년 9개월, 우리 모두가 팬데믹이라는 똑같은 재난 상황을 맞닥뜨렸지만, 그 속에서 만인은 결코 평등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팬데믹은 전 세계를 한꺼번에 급습했지만, 그 충격은 공평하지 않아서 가장 먼저 취약계층을 공격하고 나서 기존의 빈부격차를 극대화시킨 것이다. 유례없는 팬데믹 재난은 취약계층에게 훨씬 더 큰 타격을 입힘으로써, 갈수록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했기 때문이다. 팬데믹이 사회·경제적으로 계층 간 차이를 극명하게 노정함으로써, 소수 부유층과 다수 빈곤층의 계급화를 고착시킨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COVID-19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해진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팬데믹 발생 이후 부유한 이들은 승승장구하고, 가난한 이들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컬럼비아 대학의 존 머터(J. C. Mutter) 교수가 자신의 저서 『재난 불평등』(The Disaster Profiteers, 2015)에서 사회 약자에게 더 혹독한 재난의 속성을 고발한 것은 정당하다: “지배층은 재난의 충격을 완화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소득의 변화를 겪지 않는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죽고, 심하게 다치고, 집을 잃는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고통을 받는다. 조금이나마 갖고 있던 것을 모두 잃는다. 그들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은 주목받지 못한다. … 부자는 재난으로부터 더 멀리 피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빈곤의 덫에 갇히거나 덫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간다.”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도 COVID-19로 인해 인류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다고 말하면서 “누구는 초호화 요트를 타고, 누구는 난파선의 파편을 붙잡고 바다에 떠 있다”라고 일침을 가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팬데믹은 종래 심각했던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 문제를 더욱 위중한 위기 국면으로 몰아가고 있다.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사회 안에 부의 편중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렇지 않아도 침체 상태에 있던 경제 상황에 팬데믹의 악영향이 겹친 것이다. 거듭된 경기 불황 속에서 팬데믹의 여파로 고용시장이 동결되면서 생업을 잃은 실직자들이 극심한 생활고 속에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금번 팬데믹 사태 속에 골이 깊어진 사회 양극화 현실에서 더욱 두드러진 점은, 소득 양극화에 이어 자산 양극화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현실이다. 또한 소득 및 자산의 계층 양극화 속에 교육 부문에서도 격차와 불균형이 심화함으로써, 온라인 교육의 디지털 양극화가 교육계를 넘어 국가적 난제로 심각하게 대두되는 현실이다.
사실상 한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사회 양극화 문제는 해외 언론도 일찍이 주목했던 사안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는 2006년 1월 23일 ‘사회적 시한폭탄’(A Social Time Bomb)이라는 특집기사에서 한국의 사회·경제적 양극화 문제가 사회 전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는 시한폭탄이라고 진단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 양극화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현안으로 급부상한 가장 중대한 분기점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전 국민의 헌신적 노력으로 최단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했지만, 문제는 그 여파로 파생된 사회 양극화로 말미암아 빈곤층의 확대, 가정해체의 급증, 실업자의 양산, 중산층의 몰락, 무엇보다도사회적 스트레스가 극대화된 상황이다. 그동안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제도적 장치와 법안이 마련되었지만, 극심한 빈부격차가 완화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사태 속에서 빈부 격차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이므로 사회 양극화는 21세기 한국 사회를 위기로 내모는 최대 현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합세한 위험 시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3.1 기술 발전의 양면성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한 신학적·윤리적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인류는 현재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문명 변곡점의 서막, 미지의 영역에 서 있음이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기술의 획기적 진보는 우리를 새로운 윤리의 경계로 몰아세우는데, 생명공학에서 인공지능(AI)까지 4차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상상을 초월한 혁신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질문에 직면케 한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빠르고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다면 과연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AI 시대에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이 요구되는 것은, 인간은 가상현실에 존재하는 아바타가 결코 아닌 “하나님의 형상”(창 1:27)이므로 인간 본성을 찾아 갈고 닦는 일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문학적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더욱이 기술 발전이 공공선(公共善)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기술 윤리가 절실히 요청된다.
21세기에 실존하는 우리는 갈수록 강력해지고 편리해지는 문명의 이기(利器)와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이 시대에는 인지, 이해, 판단, 창작 등 다양한 인간의 지적 기능까지 수행하는 AI가 등장했으며, 우리는 탁월하고 효율성 높은 AI의 결과물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인간이 개발한 도구가 인간의 지적 지능 수준을 넘볼 정도로 똑똑해졌지만, 그를 사용하는 인간은 자신의 지적 결함을 보완하고 인지적 수고를 덜어내기 위해 고안된 디지털 기술에 압도당할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가장 강력하고 편리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지적 기능을 대체할 수도 있는 똑똑하고 효율성 높은 기술에 휘둘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24시간 무한 기계학습을 하는 AI와 달리 거의 진화하지 않는데, 성장기 때 교육과 학습을 통해 형성한 사고방식과 인지구조를 변화한 환경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기를 꺼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계에 압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한 이 시대에도 신기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러다이트(Neo-Luddite) 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 일찍이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엘륄(J. Ellul)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현상을 ‘기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사람들은 정치 혹은 경제가 시대를 이끌어 갈 거라면서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엘륄은 기술이 모든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예단하였다. 그는 기술 발달의 양면적 명암을 예측한 예언자이기도 한데, 특별히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기술과 신학의 경계에서 이를 융합하여 신학적·윤리적 토대를 견고히 구축할 인물이 절실히 요청된다. 많은 사람이 근시안적 안목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 속에서 총체적 관점으로 전체 인류와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세심하게 살피는 거시적 혜안(慧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중요한 관건은 기술이 이용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치중립적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일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무한한 번영의 가능성 이면에는 방향만 다를 뿐인 파국의 가능성 역시 잠재하기 마련이다.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기술에대한 높은 기대감을 갖지만, 뒤따르는 부작용은 인간 사회를 난황에 빠트리기도 한다. 신기술에 대한 인류의 오용과 악용, 남용은 언제나 그랬듯이 미리 예측하기도 힘들며 앞서 모두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기술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인류는 희망과 우려, 기대와 후회의 과정을 반복해왔는데, 현 시점에서는 양날의 칼인 AI라는 신기술을 맞이해 다시금 이 반복 과정에진입하였다.
그런데 위중한 사안은 AI 신기술이 세상 전체를 바꿔버리는 대전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대전환을 일으키는 혁신 신기술이라는 점이다. AI는 누구나 개인적으로 쉽게 다루고 예견되는 역기능에 바로 대처할 수 있는 만만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AI가 확산할수록걱정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다. AI 기술이 기존의 다른 기술과 다른 점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초지능’으로의 자발적 발전 본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런 AI에게 인류의 기존 가치관과 윤리를 학습시키는 자체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AI는 초지능을 정점으로 하여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될 거라고 닉 보스트롬은 경고한 것이다.그럼에도 이를 해소할만한 적절한 대안이 좀처럼 체감되지 않기때문에, 무지는 막연한 공포를 증폭시키고 심란한 상황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AI가 열어줄미래에 대한 올바른 방향 제시와 더불어 구체적 준비도 뒤따라야 한다. 비가역적 대전환이 따라오기에 발생 가능한 문제 상황에 대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대처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기술이 획기적으로 진보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른바 ‘기술 신학’이 구축되어야 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4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불가피 여러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미리 고민하면서 도덕적·윤리적, 사상적·정신적 토대를 마련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화를 못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술 발전이 인간에게 편의와 유익을 준다고 가정하지만, 그만큼 폐해와 부작용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기술 발전의 양면성을 통찰하는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기술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다.그러므로 기술 발전을 뒷받침할만한 기술 신학의 필요성이 대두됨은 물론, 이에 대한 도덕적 윤리와 인문학적 성찰 또한 요청된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술이 절대자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전지전능한 일을 행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이를 어디까지 허용할지 미리 정해놓고 인간에게 이로운 기술이 되도록 도덕적·윤리적, 사상적·정신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과학 기술의 방향성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AI 담론에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이 뇌와 영혼 없는 괴물이 되어서 인간을 지배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 신학을 정립해야 할 당위성은 임박한 AI 혁명을 예고한 챗GPT가 출시되면서 더욱 부각된다. 최근 챗GPT를 사용해본 사람들의 사례가 무수히 공유되면서 경탄과 불안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챗GPT는 사실상 인류가 축적한 거의 모든 지식을 암기하여 깔끔한 논리와 문장의 형태로 매우 신속한 답변을 내놓는다. 많은 사람이 챗GPT에 열광하는 이유는 재밌고 신기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마다영화 속의 ‘아이언맨’(Iron Man)이 아니어도 AI 비서 ‘자비스’(Sabis)를 가질 수 있다는 로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챗GPT가 지닌 문제점 내지 한계 역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챗GPT는 유려한 답변을 재빠르게 제공하지만, ‘환각 현상’(챗GPT의 ‘환각’이란 오류가 있는 데이터를 학습해 잘못된 답변을 정답처럼제시하는 현상)을 대표적 문제점으로 들 수 있다. 이로 인한 정보의 부정확성, 잘못된 편견의 확대재생산, 출처 불분명한 자료의 짜깁기식 표절 등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계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계속 업그레이드된 버전이 나와 오류율이 현저히 떨어진다면, 사람들은 사사건건 챗GPT에게 물어볼 것이고, 마침내 AI가 지식의 판정자가 되는 현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AI가 지식의 판정자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두려운 현실인데, 판정은 미래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지적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생성형 AI는 정보 추출에서 편향성과 함께 인지 빈곤(cognitive poverty) 문제도 야기한다. 일례로 우리가 유튜브에서 검색보다는 알고리즘(algorithm, 어떤 주어진 문제를 풀기 위한 절차나 방법)의 추천을 통해 무의식적인 시청을 하고 이를 통해 편향된 관심과 취향을 강화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듯이, 챗GPT의 생성형 대화방식은 개인의 정보 편향 문제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가 있음에도 알고리즘에 의해 편향된 선택을 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알고리즘의 늪에 빠져 공정한 관점을 잃을 수도 있다. 이에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능력을 함양하지 않으면, 편견을 더욱 증폭시키고 AI에 끌려다닐 수도 있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온 정보 접속 환경이나 미디어는 인간의 인지능력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두뇌 유출’로서 ‘뇌의 인지능력이 줄줄 새는 것’이다.이러한 맥락에서 기술의 발전과 인지능력의 퇴화가 상관관계에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정당하다.특히 챗GPT가 사실이 아닌 내용을 사실로 포장해 결과물을 출력하는 기술이라는 점은, 사용자인 인간이 정보의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사실 검증자의 역할과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검증 능력이 챗GPT 이용 시 핵심 역량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기존의 교육방식, 평가와 보상 체계, 업무 처리, 창작 관행 등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뿐 아니라, 다방면으로 근본적 차원의 재설계와 구조 개편을 요구한다. 생성형 AI가 던지는 핵심적 과제는, 개인과 사회의 기술 따라잡기 차원에서의 수용과 학습 차원을 넘어선다. 거대한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 무기를 누구나 지니게 된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무기 사용법을 능숙히 익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챗GPT처럼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춘 AI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AI의 속성과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면 각종 사기로 인한 피해가 더욱 커지게 된다. 개인적 차원의 활용 교육과 책임 의식 고취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위험 대비책과 규제 방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AI 기술이 가져온 거대한 변화와 그 영향력을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필수적인 시민 역량으로 간주하고 교육하는 일이다. 이른바 ‘AI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한데, 특히 AI에 대한 비판적 사고능력을 가르치는 게 요구된다.이로써 우리가 기술 발전에서 얻을 수 있는 수혜와 혜택은 누리는 한편, 위험과 부작용은 피할 수 있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챗GPT가 교육의 지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이 시대가 이토록 갑작스럽고 빠르게 도래한 사실에 대해 많은 이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특히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나 기독교 교육 사역자들에게 챗GPT는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이슈를 던지고 있다.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챗GPT의 출현으로 인해 목회자와 교사들은 여태껏 해온 여러 사역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스마트폰을 사용하듯 챗GPT를 사용하는 다음세대에게 신앙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챗GPT는 개인에게 차별화·개별화된 맞춤 교육을 시행하고 교사가 여러 업무를 처리함에있어서 도움을 준다는 측면에서 교회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거라는 기대감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챗GPT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잘못된 내용(특히 인터넷에 떠도는 이단 사설)이 뒤섞인 답변을 내놓는 점이나 교사들이 말씀 연구와 교육을 위해 챗GPT에 무분별하게 의존하는 점 등은 상당히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그러므로 챗GPT에 대해 신학적으로 깊이 숙고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주도면밀하게 성찰함으로써, 교회와 성도가 챗GPT 열풍에 휩쓸리는 것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한국 기독교가 챗GPT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전용 챗봇도 구상해볼 만하다. 물론 이러한 일을 각 지역 교회가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교단이나 교회 연합 차원으로 노력과 투자가 모아진다면 바른 신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AI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기독교 역사에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과연 챗GPT로 신앙을 가르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한계와 문제점을 우려하지만,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동반자 인간 교사의 도움이 함께 병행한다면 챗GPT의 좋은 활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는데, 이는 곧 목회자들이 챗GPT의 한계와 잠재적 위험성을 인지하여 하나님과 성도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높은 도덕적 윤리의식, 매 순간 적절한 판단력을 지혜롭게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다. AI에 너무 의존해서 말씀 연구와 신학적 연구에 등한히 하거나 영적 지도자 역할을 망각한다면, 목회자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챗GPT 활용이 교회 사역과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공적 논의가 요청된다.
우리는 기술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 놓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내선 안 된다.이 땅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받은 청지기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동참하고 끊임없이 변화의 바람을 앞서 살펴야 한다. 사실상 인간이 하나님의 문화 위임을 수행함에 있어 도구와 기술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인류는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했고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기술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고 마침내 기술 문명을 이룩하였다. 기술이인간 삶의 일부가 된 기술 문명 시대에는 기술과의 대립 대신에 결국 기술과 공존하는 사회를 구상해야 한다. 다만 어떻게 하면 기술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신론적인 방식이 아닌, 지금보다 더 인간에 친화적이고 가치 중심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인류 공통의 가치와 목표인 공동선(共同善) 가운데 하나인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고민할 과제가 남아있다. 그러려면 앞서 언급했듯이 기술에 대한 신학적 이해력을 높이고 양면성을 내포한 기술이 지닌 장단점 사이의 가치를 신중하게 판단하는 신학적·윤리적 성찰이 절실히 요청된다. AI의 수용할 부분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복음 전도에 지혜롭게 활용하는 한편, 우려되는 부분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건전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3.2 급변하는 노동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전면적 교육개혁이 불가피하다.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는 노동과 임금에 대한 전통적 관점이 획기적으로 변화됨으로써, 전통적 고용 형태가 퇴조하고 임시직 일자리들이 대거 등장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키워드 중 하나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 개인의 취미나 재능, 경험 등을 토대로 기존 직장 개념에서 탈피하여 디지털 기기가 있고, 인터넷 연결만 가능하다면 어디서든 업무를 하는 신개념 직업군)이다. 현재 세대는 2017년경부터 디지털 노마드로 산다고 볼 수 있는데, 한 국가 안에 살면서도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고 주로 이메일로 업무를 수행한다. 특히 COVID-19 사태 이후 재택근무라는 새로운 근무환경을 접하면서 굳이 사무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모여 근무해야 할 필요성이 희석되고 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 노마드는 물리적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인터넷만 연결되면 어느 곳에서든 근무할 수 있는 새로운 근무형태 패러다임을 추구한다.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시대는 급변하는 노동환경으로 인해 평생 한 직장에서 일하기 힘들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직업을 찾는 ‘잡 노마드’(job nomad) 시대이기도 하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한 직업을 가지고 여러 세대가 먹고살았고, 산업사회에서는 한 직장에 근무하면서 평생 먹고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혁신적 신기술이 등장하고 산업이 새롭게 재편되며 변화의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 이 시대에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살 수 없는데, 평생에 걸쳐 평균 5회 이상 직업을 전환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술혁신의 급속한 진보로 인해 근로자가 평생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중요한데, 그렇다면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분야를 넘나들면서 변신할 수 있는 유연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끝까지 생존할 수 있다. 이제 대학에서 배운 지식으로 평생 먹고살던 시대는 끝났기 때문에 새로운 역량을 업그레이드하면서 평생 배워야 하는 시대이다. 자신에게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다면, 학습하여 자신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학습 내용을 현실에 응용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D. H. Pink)는 자신의 저서 『프리 에이전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 새롭게 출현한 프리에이전트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서 20세기에는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던 조직 인간이 사회·경제의 주체였다면, 21세기는 자유롭게 자기 삶을 조절하고 일하면서 여가를 즐기는 프리 에이전트의 시대라고 진단한 바 있다.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 원하는 만큼, 원하는 조건으로 일하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조직을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일하고 여가를 즐기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혹은 ‘깃 워커’(gig worker)로 노동하며 살아갈 수도 있는데, 이것은 본래 재즈 연주자들이 임시로 팀을 만들어 공연한 데서 유래된 용어이다. 대다수 기업이 풀타임 정직원을 뽑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고용이 불안정해지는 상황 속에서 임시직 긱 워커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향후 더 많은 이들이 독립형 근로자로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디지털 잡노마드가 양산될 거라는 방증이다.
사실상 과거 전통적 농경사회에서는 대다수 사람이 깃 워커여서, 일이 있으면 일하고 없으면 쉬는 임시직 고용 형태가 다반사였다. 오늘날처럼 ‘9 To 5/6’의 근무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긱 경제’에서는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것이 줄어든 노동자 보호에 대한 우려 또한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노동시장에 완전히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어서, 근로자들이 각자의 일정에 맞춰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간대와 장소를 선택해 업무를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긱 워커로 여러 가지를 시도하다 보면, 의외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여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서 이를 전문화할 수 있을 것이다. 긱 워커가 디딤돌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꿈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 고용 형태가 사라지고 새롭게 급변하는 노동환경에서는 긍정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4차 산업혁명 단일요인만으로도 엄청난 변수인데, 팬데믹이 합세하여 이 시대는 거대한 문명사적 변곡점에 서 있다. 4차 산업혁명과 COVID-19 팬데믹의 여파로 노동환경을 위시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건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급변하였다. 이러한 급변화는 교육 분야에서도 미래 준비와 적응을 위한 대전환을 요구하는데, 단언하면 문명 대전환기에 교육은 어떤 변화가 도래해도, 어떤 세상이 펼쳐져도 이에 잘 대처하고 적응할 수 있는 다음세대를 길러내야 한다.필자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주역인 대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 입장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현재 청년세대가 직면한 위기를 바라볼 때,문명사적으로 대전환하는 이 시대를 선도(先導·善導)하는 교육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함으로써 청년들이 현실 적응에 실패함으로 인한 불상사라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대학에서 이뤄지는 교육과 21세기가 요구하는 인재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는 사실도 통감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4차 산업혁명 단일요인만으로도 너무나 버거운데, 팬데믹이 합세한 위기 국면에 교육자들이 미래세대를 치밀하게 준비시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노동환경이 급변하는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인해 대량 생산하듯 만들어내는 교육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교육 시스템의 전면적 개혁이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학교 의무교육은 인지능력 향상(지식 습득이나 지적 능력 개발)에 초점을 맞춘 교육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와 교육 전문가들은 인지능력 향상에만 주력하는 교육 시스템이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하다면서 기존의 교육방식과 인재 개발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AI시대에는 비인지 능력(공감력·소통력·인내력·집중력 등)의 강화가 미래 교육과 인재 개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아가는데, AI가 인간의 인지능력 관련 영역을 가장 먼저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교육문화가 시행하던 규격화된 사지선다형 문제에서 답을 찾는 교육에 대해 숱한 비판이 제기되었음에도 거의 시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제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시대가 도래한 이후로는 창의적으로 주관식을 풀어야 생존할 수 있기에 정답을 찾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모든 지식에 순간적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지식을 쌓는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정보를 활용하는 창의적 교육이 더욱 중요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70~80년대식 근면과 성실함만으로는새 시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왜?’를 질문하면서 남들보다 더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기존의 모든 사안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를 제기하고발상의 혁명적 전환을 하면서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이 대세이다. 이를테면 유대인들이 하는 하브루타(Chavruta) 교육처럼 질문하고 생각하고 토론하여 비판적 통찰력을 기르는 교육을 한국의 교육문화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3년 3월 방한한 미국 예일대 피터 샐러베이(P. Salovey) 총장의말을 귀담아들을 만하다. 2013년 23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10년째 예일대 혁신을 이끌고 있는 샐러베이 총장은 “챗GPT 시대 학생들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 명확하게 의사소통하는 법, 지식을 융합하는 법 등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AI가 인간의 비판적 사고를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예전에는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지능으로만 교육평가를 했지만, 이제는 뇌의 영역을다중적으로 쓰는 시대가 도래한 점도 주목할만하다. 하버드 심리학과 교수 하워드 가드너(H. Gardner)의 『다중지능: 인간 지능의 새로운 이해』는 인간의 지능이서로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여덟 개(언어지능, 논리-수학 지능, 시간-공간 지능, 음악 지능, 신체-운동 지능, 자연지능, 대인지능, 자기이해 지능)의 하위요소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이 지능은 AI가 따라 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에, 남들과 차별화하고 기계와 경쟁하지 않으려면 다중지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평생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제일 중요하다. 일찍이 앨빈 토플러(A. Toffler)는 “21세기 문맹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운 것을 잊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이는 급격한 변화가 몰려오는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시대에는 변화에 민감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금번 COVOD-19 기간에도많은 사람은 무의미한 일로 허송세월했지만, 팬데믹이종결되면서 이 기간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따라 개인과 사회마다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다.
끝으로 교육개혁과 관련하여 첨언하면, 챗GPT의 등장으로 대학의 교육현장에 상당한 변화가 불어닥친 상황 속에서 향후 신학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들의 구조와 기능이 변경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미 학생 수의 감소와 교수 역할의 변호, 산업 생태계의 변화로 대학 교육이 필요한지, 대학 학위는 유용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학문적 내용은 인터넷이나 AI의 도움으로 대학에 가지 않아도 어느 정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추후 상당수 대학이 사라질 것이고, 남은 대학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해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학대학도 비껴갈 수 없는 현실이다. 신학대학은 신입생감소 문제가 일반대학보다 빨리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반대학보다 빠른 구조적 개혁이 요구된다. 하지만 신학대학은 일반대학과는 달리 지식 전수가 주된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대학과는 다른 형태로 존속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신학대학은 신학 지식을 가르치는 곳에서 영적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곳으로 변화할 뿐 아니라,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적·정신적 가치를 선도해가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3.3 고난과 역경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회복 탄력성이 문명 전환기의 중요 관건이다.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은 디지털 초(超)연결을 향해 전력 질주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휴먼 커넥션(human connection)은 더욱 빈곤해지는 디지털 탈(脫)인간화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팬데믹 장기화로 대인관계가 위축되고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면서 정신건강 문제가 급격히 대두되고 있다. 이때 가장 필요한 마인드가 바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다. 회복 탄력성이란 자신에게 닥친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현실을 극복하는 힘,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꿋꿋하게 되튀어 오르는 능력을 말한다. 바닥을 쳐 본 사람만이 더 높이 날아오를 힘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회복 탄력성의 비밀이다. 강한 회복 탄력성으로 되튀어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래 있었던 위치보다 더 높은 곳까지 도약할 수 있다.
회복 탄력성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탁월한 여러 능력을 갖췄어도 회복 탄력성을 지니지 못하면 한 번의 결정적 위험이 치명적 실패로 이어져 나락으로 떨어지고, 종국에는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어떤 개인은 망가지고 어떤 개인은 회복하는가?’ 예측할 수 없이 급변하는 시기에는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다. 급변의 시기에는 뿌리를 포함한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경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위험 사회가 도래한 21세기는 ‘누가 더 위험을 피해가느냐’보다는, ‘누가 위험과 절망을 딛고 더 빨리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게 하려면 고난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능력,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고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긍정적 스토리텔링, 곧 회복 탄력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앞서 필자는 인류 문명 대전환 시대에 교육도 대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회복 탄력성 교육이 학교 의무교육에 수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최단기간의 압축적 국가발전을 강행하면서 그 역작용으로 국민의 심성이 피폐해지게 되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갈등 지수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팽배,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붕괴된 영적·정신적 가치체계, 자살과 살인이 서로 맞물린 반생명적·반인륜적 우리 사회 분위기는 이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상당수 청년과 중장년이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다가 실패한 후 재기에 성공하지 못함으로 인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실패하고 도전하고, 또 실패하고 도전하면서 실패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회복 탄력성이 이 시대처럼 격변하는 문명 전환기, 특히 한국 사회처럼 사회변동이 극심한 사회에서는 반드시 학교교육 및 평생교육 차원에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바이다.
인류 문명의 대전환 시대에 교육 또한 대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현재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필수적 요소이다. 이를 통해 위태로운 청년세대가 강력한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더욱이 AI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 해준다면, 우리는 남는 시간에 더욱더 인간 본연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세상이 더욱 디지털화되고 첨단 기술화될수록, 인간은 친밀한 관계와 사회적 연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적 감성을 더욱 갈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가 충족되지 않을 때 정신건강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친밀한 관계적 삶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회복 탄력성이 특히 이 시대에 강조되는 이유는, 노동의 종말이 예고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노동 요소로서의 인간이 별로 효용가치가 없어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고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4차 산업혁명 시대 속에서 대다수 사람이 일자리가 없고 할 일이 없게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실존적으로 매우 절실한 문제들이 인간의 심성을 계속 피폐하게 하고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발견할 수 있도록 되튀어 오르는 마음 근력의 힘, 회복 탄력성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3.4 공존·상생, 연대·협력하는 생명 공동체의 회복이 인류의 생존과 안녕을 보장한다.
COVID-19 사태의 장기화 속에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은 거의 전 세계적인현실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사회·경제적 공평 및 정의를 정착시키는 일은 특히 21세기 기독교에명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일 뿐 아니라, 오늘날 글로벌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는 제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해결할 수 있는 핵심적 과제이기도 하다. 더욱이 공동체적 연대를 무시하는 강자의 약육강식이 생존모델로 정당화됨으로써 따뜻한 인정의 그물망이 사라져버린 사회, 승자와 패자가 엄연히 구분되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함으로써 디스토피아(dystopia)가 도래하는 사회, 유능한 사람만이 이상적 인간형으로 부각됨으로써 성공과 출세라는 무한경쟁의 톱니바퀴에서 뒤처진 사람을 실패자·낙오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사회 안에서 절망하는 사회구성원 상호 간에 생존과 협력을 독려하고 공존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생존모델을 몸소 실천하며 사회적 에토스(etos)를 개혁하는 일 역시 21세기 기독교에 부과된 과제이다.
COVID-19 팬데믹이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골을 더욱 깊게 하고 사회 약자들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하자, 사회·경제적 위기 타개책으로 기존의 사회 안전망을 새롭게 재설계해야 한다는 여론이 불일 듯 일고 있다. 특히 많은 전문가들이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매달 일정액을 정기적으로 지급함으로 국민 개개인의 기본 생계를 보장하는 ‘보편적 기본소득 보장제도’(이하 기본소득제)를 새로운 사회 안전망으로 제안하는 상황 속에서,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는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시대의 첨예한 화두다. 사실 수세기 전부터 빈곤과 불평등을 해소할 방안으로 모색되었던 최소생계보장이나 사회보험제도가 오늘날 기본소득제로 형태가 바뀌어 논의 중인 것이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찬반 논란 이전에 성서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보편적 기본소득제가 아닌 선별적 서민복지 강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신 10:18-19). 이제는 기술 혁신으로 말미암는 장기 실업자나 미취업자의 사회적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 여러 형태의 복지제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기본소득제에 찬성하는 진영에서는 일자리 절벽에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촘촘한 사회 안전망 구축 차원에서 막대한 재정투입이 불가피해졌다면서, 기본소득제의 핵심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고질적 소득격차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소득 재분배 제도, 사회 양극화에 대한 해법으로 여겨짐으로써, 국가가 최소한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는 사회 안전장치이자 지역경제를 살리는 경제정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실업의 대비책으로 기본소득제가 주목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제를 찬성하는 입장은 사회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는 팬데믹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기본소득제의 조속한 도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기본소득제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특히 우리나라가 기본소득제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정기적으로 조달할 만큼 국가적 재정 상태가 견실하지 않다고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더욱 걱정스러운 부분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달리 공기업의 비중이 대단히 높은 데다 공기업 부채 수준이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 경제성장이 계속 침체할 거라는 전망도 국가 재정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미 급속도로 진행 중인 고령화가 의료복지 지출과 국민연금 급여액을 증가시키고, 저출산에 따른 경제활동인구의 감소가 세수 기반을 축소시키고, 국민연금 보험료 수입 감소를 초래하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국민 의식이 후퇴할 거라는 우려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공존·상생, 연대·협력하는 생명 공동체의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지금 이 시대에 21세기 한국 사회의 한 중심축을 이루는 한국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사명이 막중하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빈곤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이를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물론 빈곤의 원인은 개인적 책임에 기인할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는 잘못된 사회·경제적 체제의 구조적 모순, 곧 불공정한 분배와 착취 등에 우선적으로 기인하는 경우가 더욱 많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다(눅 6:20) 하여 가난 자체를 정당화한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가난이 불의한 사회구조의 악순환에 기인함을 인식하셨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의 풍성한 창조물을 누리도록 베푸셨지만, 가난의 현실은 소수가 그 창조물을 독점한 결과이다. 이에 하나님의 창조물을 과도하게 독점하는 것은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소수의 과잉 독점으로 인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창조의 선물을 누리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은혜로부터 단절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가난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는 물론, 인간 사이의 단절을 초래한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눅 16:14-31)가 보여주듯이,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가난은 결국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단절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노동을 통해 창조세계를 책임적으로 관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물질적 풍요에 빠진 부자들은 창조물을 나눔으로 창조세계를 관리해야 할 인간 본연의 책임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에 허덕이느라 자유롭고 주체적인 노동을 하지 못하고 인간에게 부과된 책임을 감당할 경황이 없다. 이처럼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은 모두 그들에게 부여된 인간 본연의 책임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소외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므로 가난의 현실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병들고 헐벗으며 굶주리며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예수께서는 병들고 굶주린 일반 백성을 단지 영적·정신적으로만 위로하지 않고,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들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쓰셨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유념할 때 오늘날 사회 양극화가 전 세계적으로 악화일로로 치닫는 시대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처럼 가진 것을 서로 나눔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몸소 실천하는 일이다.여기서 필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물질을 나눔은 모든 소유를 팔아 교회공동체에 바쳐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공산주의적(共産主義的) 입장에서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소유를 똑같이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모든 사유재산의 몰수와 무산계급(無産階級)의 지배를 절대로 주장하지 않으셨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는 예수의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물질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을 나눌 것을 요청함이다. 더 나아가 소수에게 독점된 부(富)가 사회에 골고루 환원되도록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 생존권이 보장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할 것을 촉구함이다.
초대 기독교 역사가들이 증언하듯이, “삶과 죽음의 주이신 그리스도”(롬 14:9)를 신앙하는 초대 교인들은 당시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던 도시에 남아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대다수 의사들이 환자들을 기피하고 방치함으로 말미암아 안락사(euthanasia)가 성행했던 상황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행동이었다.또한 초대 교인들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당했던 고아와 과부들을 긍휼히 여기고 보살핌으로써, 당대의 비인간적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고 새로운 시대 정신을 주창하였다. 기독교의 발흥은 기존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는데, 특히 치명적 전염병이 발생한 결과 대다수 공동체들이 신뢰를 잃은 와중에 초대 교회는 오히려 급성장했고 이 새로운 공동체로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었다.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은 사상 초유의 팬데믹에 맞닥뜨려 정체성을 잃어가는 21세기 기독교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제 21세기 한국 기독교는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공동체를 회복함으로써, 죽음의 기운이 횡행한 이 시대에 생명의 기운을 확산시켜야 할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거의 무력해 보인 가공할만한 대재앙 앞에서 많은 이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몹시 난감해했지만, 그리스도인은 평안할 때만이 아닌 오히려 재난의 때에 더욱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필자가 역설하는 바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려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스스로 구제할 여력이 없는 사회적 소외자들이 다시 소생하기 위해선 누군가로부터의 건짐과 구원의 경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생의 강력한 히든카드이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도움과 격려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누군가의 역할이 교회와 성도의 사려깊은 역할이기도 한데, 생명력을 잃어가는 사회구성원에게 삶과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vificans)을 전하는 것은 본래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책임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4. 결어: 문명의 변곡점에 선 21세기 한국 기독교
지난 세 차례 산업혁명은 산업 분야를 위시하여 사회 문화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이행했고, 왕정 체제는 민주 체제로 바뀌었으며, 가족 공동체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모하였다. 더욱이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촉발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대한 신학적 난제들을 던지고 있다. 지난 세 차례의 산업혁명이 사회 체제를 변화시켰다면, 4차 산업혁명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물론 인간성의 본질까지 재구성하려고 한다.기하급수적으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현 시대의 기술 변화는 기계라는 단순한 도구의 수준을 넘어서서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해서도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혁신 기술은 인간을 증강하고 변형시키고 재프로그램하고 재설계까지 할 수 있는 지점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혼의 존재나 종교 체험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아예 인간 자신을 신격화하는 방식으로 종교성을 왜곡하기도 한다.
뼈아픈 통찰은 기독교 신학이 세 차례의 산업혁명 시대에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분적 실패를 경험했던 일이다. 그 결과 산업혁명이 진행될수록 사회 전반을 탈종교화(세속화) 시킴으로써,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도 약화시켰고 교인의 탈교회화 현상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세 차례의 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은 유럽과 달리 단기간에 동시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문명 전환기에 기술이 가져올 신학적·목회적 영향을 깊이 성찰할 여력이 여의치 않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한 작금의 현실에서도 한국 교계에는 기술에 대한 신학적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기술에 대한 공포(‘기술 디스토피아’) 또는 열광(‘기술 유토피아’)의 모순적 현상이 팽배함을 부인할 수 없다.사실 기독교계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리더십을 가질 만한 인프라가 이미 구축되어 있지만, 문제는 교회 교육과 신학 교육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이 혜안과 통찰력이 부족함으로 인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경계하고 회피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 4차 산업혁명과 그 핵심 기술인 AI에 대한 논의와 분석을 등한히 하고 있다.
올해 들어와 챗GPT 광풍이 불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챗GPT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이 강한 것 같다.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노력이 부족하니 모호한 경계심과 실용주의적 태도만이 커지는 형국이다.출시 4개월 만에 몇 차례의 버전 업과 경쟁사들의 치열한 경쟁이 불꽃 튀는 현재로선 챗GPT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간이므로, 지나친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를 유보하고 AI 전반에 대한 더욱 심도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 상황 속에서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합세한 문명의 변곡점에서 시대의 변화에 다각도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한국 기독교의 책임적 자세가 매우 절실히 요청된다. 지난 2022년 2월 소천한 이어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과학의 시대에 기독교는 왜 (소외되고) 쓸쓸해지는가?”라고 안타깝게 반문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과학과 오늘날의 문명을 품을 때 하나님의 목소리가 비로소 들리게 될 것이다”라고 권고하였다.이 권고의 의미는 기독교가 문명의 변곡점에서 첨단 과학과 기술 문명에 등지고 복음을 전한다면, 새로운 시대에 복된 소식(the gospel)이 들리지 않게 될 거라는 경고성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인류 역사 속에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은 혁명적 변화들이 수차례 일어났는데, 이 혁명적 변화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세력은 항상 존재하였다. 기독교 교회는 보수적 반응을 보인 가장 대표적 집단 중 하나다. 그러나 결국 시간의 문제였을 뿐, 그 어떤 강한 반대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막지 못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새로운 변화가 낯설다고 해서, 또 여러 역기능이 우려된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한데, 왜냐하면 패러다임의 새로운 변화가 분출되어 일어나면, 아무리 반대해도 결국 일어날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기에 이것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배척한다고 해서 멈춰지지 않는다. 배척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사회에서부터 점차 고립될 것이고, 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영향력도 점차 감소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한국 기독교가 이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 하면 못 할수록 사회로부터 점점 고립된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받아들이되 다가올 변화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에 부응하는 교육 방법의 지평을 넓히는 변화, 일례로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와 ‘인공지능 리터러시’(AI Literacy) 같은 AI시대를 준비하는 교육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전문가는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팬데믹 이후 도래할 문명 전환기를 피할 수 없다면 그 거센 파도에 올라타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조언한다. 어떤 개인과 사회는 문명 전환기의 파도에 그냥 휩쓸려 가지만, 또 다른 개인과 사회는 변화의 파도 위에 올라타서 이를 위대한 기회로 삼기도 한다. 대전환을 기회로 만들기 위해선 적을 두려워하거나 맞서기보다, 오히려 이를 지혜롭게 선용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는 이 위기의 시간에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인류를 비인간화하여 우리 삶에 의미를 주는 전통적 가치를 위태롭게 할지, 아니면 공동운명체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의 윤리의식의 세계로 인류의 수준을 높이는 데 4차 산업혁명을 활용할 수 있을지는 공존·상생, 연대·협력하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기독교가 시대와 소통을 할 때에 계속해서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1세기 기독교는 AI를 위시하여 과학 기술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회와 함께 호흡해 나가야 한다.
특별히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여파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막대한 규모로 인간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21세기 기독교가 위기에 잘 대처하려면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창 1:27) 존엄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을 체화하고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미래적 잠재성을 지니고 다른 유기체와는 구별된 특별한 존재로서 문화 위임을 수행할 책임적 존재이다. 하지만 AI가 인간보다 대부분의 부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일 경우, 인간이 하던 일의 상당수를 AI가 대체함으로써, 인간은 소위 ‘잉여 인간’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과학은 학문적 특성상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어떤 논리적 주장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21세기 기독교계에서 적극적으로 다뤄야 할 책임이 있다.우리의 인간성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과제이며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인간성은 우리가 보호하고 지키려고 애써야 할 무엇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