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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쇼펜하우어는 현대판 석가모니인가? (2)
기독교 철학 이야기
 
정성민   기사입력  2023/11/05 [13:10]

 

▲ 변증학자 정성민 교수     ©뉴스파워

1. 쇼펜하우어 철학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

 

(1) 인도 철학 (베단타)

 

 베단타 철학은 인도 철학의 육파 철학 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근대적인 힌두교학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철학 체계이다. 이는 바른 지식, 직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영혼(아트만)을 소유한 개인이 우주의 영으로 알려진 절대신 브라만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파니샤드>에 근거해 절대자 브라만을 인식함으로 해탈에 이른다는 교리가 이들의 근본 사상이다.

 

현재 108가지 정도 알려져 있는 <우파니샤드>는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이다. 여기에는 기원전 10~7세기경에 크게 활약했던 일련의 힌두 스승들과 성현들의 사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의 범아일여 사상은 모든 힌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고, 윤회와 생성의 인과율도 함께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베단타 철학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입장과 해석은 어떠했을까? 이제부터 쇼펜하우어가 인도철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신관과 인간관을 보려면 <우파니샤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 창조의 신, 브라만을 가리킨다. 초월적인 신으로서 브라만은 우주적 영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는 개인적 자아를 가리키는데, 이 자아는 영원히 불멸하는 영혼으로서의 자아를 의미한다. 결국 범아일여 사상은 사후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으로서의 자아는 우주적 영으로서의 초월자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뜻이다.

 

힌두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요가라는 명상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내적 본질이 영혼으로서 우주적 영인 브라만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베단타 철학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고,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는 사후세계와 윤회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며, 개별 영혼은 각기 독자성과 개개의 성격이 유지된다. 만일 <우파니샤드>가 말한 영혼이 개체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사후 개인에게 주어질 보상이나 심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사실 인도 철학과 불교를 위대한 철학이라고 불렀던 쇼펜하우어에게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베단타의 철학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베단타 철학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무엇일까?

 

먼저,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우주적 영과 힌두교의 신인 브라만은 우주적 의지로 대체된다. 그가 말하는 우주적 의지는 초월적이거나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말한다.

 

이 현상계에는 진정한 손실도 진정한 이득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의지, 즉 사물 자체인 의지, 모든 현상의 원천인 의지뿐이다.

 

존재의 근원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계의 배후에 있는 사물이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우주적 의지는 현상 세계의 내적 본질로서 이해된다. 이는 수많은 개체가 자신들의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한 투쟁을 하는 가운데 드러난다. 우주적 의지는 현상계가 일정한 통일성과 조화가 유지되도록 하는 사물의 원리나 본질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주적 의지는 자연 전체의 원리로서 자연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는 힌두교가 말하는 신, 즉 초월적이고 신비한 영으로서의 브라만을 현상 세계를 조화롭게 영속시키는 사물의 내적 원리인 자연법칙으로 대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는 힌두교의 신비주의나 초월주의적 신관을 그의 자연주의적이고 범신론적 신관으로 대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은 인간이 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버린 헛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없으면 표상(오감으로 느껴지는 대상)도 세계도 없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보이는 현상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로서의 우주적 의지이다. 우주적 의지는 눈으로 보이는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동일한 의지,’내지는 의지의 단일성을 말한다. 이러한 우주적 의지의 단일성은 현상세계의 그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내적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우주적 의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본질적인 성격이다.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우주의 의지에 따라서 맹목적 충동이나 의지대로 움직이고 행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인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는 객관적 실재이다. 이러한 경험적 세계를 움직이는 인과율의 법칙을 살펴보면, 각 개체의 맹목적 의지나 충동이 원인이 되어 어떠한 결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이나 인간의 모든 신체들은 이러한 맹목적 충동에 의해 동기를 제공받거나 자극을 받아서 움직인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힌두교가 주장하는 아트만(atman)이라는 영혼의 존재는 인간 내면에서 설 곳이 없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의지와 신체는 동일한 것이고, 인간 내부의 살아있는 영혼은 우주적 의지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는 현상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로서 맹목적인 충동은 현상세계 배후에 존재하는 사물, 즉 존재 자체의 원리(우주적 의지)와도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없으면 표상세계도 없다,” “세계는 나의 의지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신체가 맹목적 충동에 따라 끌려다닌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인간은 철두철미 구체적인 의욕이자 욕구이며,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그는 말한다.

 

모든 의욕의 기초는 결핍, 부족, 즉 고통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미 근원적으로 또 그의 본질로 인해 이미 고통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수한 욕망 덩어리인 인간이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 고통을 느낀다. 또한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더라도 새로운 소망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료함, 즉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결단코 만족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노력하고 충족되고 새로 노력하여 이렇게 끊임없이 계속되는 데 인간의 본질이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소망에서 충족으로, 이 충족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재빨리 옮겨 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행복이고 안녕이다. 충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고통이고, 새로운 소망이 없는 갈망은 권태, 즉 무료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충동의 지배를 받는 정신적인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날마다 다가오는 새로운 욕망을 향한 충동과 그를 충족하고자 하는 의지에 시달리는 동시에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걱정과 불안 가운데서 살아간다. 결국 인간의 삶은 평생 욕망을 충족하느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맹목적인 의지와 생존 자체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향한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매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 그는 말한다.

 

하나하나의 호흡은 계속해서 밀어닥치는 죽음을 막고 있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매 순간 죽음과 싸우고 있다 ... 결국은 죽음이 승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고, 죽음은 잠시 동안만 자신의 전리품을 가지고 놀다가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 이 죽음은 배후에 버티고 있어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어느 때라도 다가올 수 있다. 삶 자체는 암초와 소용돌이로 가득 찬 바다이며, 인간은 최대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이를 피하려 하지만, 안간힘을 쓰고 재주를 부려 뚫고 나가는 데 성공한다 해도, 사실 그럼으로써 한 발짝씩 전면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재기 불가능한 최악의 난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아니 바로 난파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죽음이야말로 힘겨운 항해의 최종 목표이며, 인간에게는 그가 피해 온 어떤 암초보다도 나쁜 것이다.

 

죽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은 인류 전체의 숙명이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공포 그 자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인간의 고통이 끝나는 시간이다. 죽음은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이 더 이상 욕망의 충동이나 의지로 인해 고통을 겪지 않는 상태이다. 그리고 우주적 의지, 즉 사물 전체로 볼 때에 인간의 죽음은 자연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를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론 우리는 개체의 생성 소멸을 본다. 그러나 개체는 현상에 불과하고, 근거율, 즉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힌 인식을 통해 존재할 뿐이다. 물론 이 인식에 의해 개체는 자신의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무에서 생겨난 뒤 죽음을 통해 그 선물을 잃어버리고 무로 되돌아간다 ... 출생과 사망은 바로 의지의 현상, 즉 삶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시간은 모르지만 자신의 원래 본질을 객관화하기 위해 바로 앞서 말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의 현상, 즉 시간이라는 형식에서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생성 소멸하는 개체들 속에 나타난다는 것이 삶에 본질적이다. 출생과 사망은 동일한 방식으로 삶에 속하고, 번갈아 가며 서로에 대해 제약을 가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자연과학적이며, 유물론적 시각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죽음에 관한 시각은 석가 당시 인도의 감각 유물론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출생과 사망은 인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충동적 의지로 인해 발생한 자연현상이다. 이러한 접근은 석가의 연기법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인도 감각 유물론이나 석가의 연기법과 유사하다고 본다면, 그가 바라보는 인생은 비참하고 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로서의 아트만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또한 윤회의 주체 내지는 매개체로서의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기에 힌두교가 주장하는 윤회설도 결국 부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윤회는 단지 상징이나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우파니샤드>가 주장하는 윤회가 하나의 신화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런데 민중을 위해 이 위대한 진리는 민중의 좁은 식견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한 근거율에 따르는 인식 방식으로 옮겨졌다. 그 인식 방식은 사실 그 본질에 따라 진리를 순수하게 그 자체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심지어 진리와 정면으로 모순되긴 하지만 신화의 형식으로 그 같은 진리의 대용물을 받아들였는데, 이 대용물은 행동에 대한 규정으로는 충분했다. 그 규정은 행동의 윤리적 의미를 이 의미 자체와는 영원히 무관한 인식 방식으로 근거율에 따라, 그렇지만 비유적인 서술에 의해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이 모든 교의의 목적이며, 그 교의는 거친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에 모조리 신화의 옷을 입힌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일반 민중은 식견이 좁기 때문에 윤회사상에 숨겨진 위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철학적 진리를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신화라는 옷을 입혔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화의 옷을 입히다 보니까 때론 상식이나 진리에 모순되는 이야기들도 등장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전해진 신화 그 자체를 하나의 순수한 진리로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서술된 각종 윤회 이야기들이 지닌 의미와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윤회(Seelenwanderung)에 관한 신화다. 이 신화는, 삶에서 다른 존재에게 주는 모든 고뇌는 바로 이 세상의 다음 삶에서 꼭 같은 고뇌에 의해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에 따르면 한 마리의 짐승이라도 죽인 사람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언젠가 똑같은 짐승으로 태어나 똑같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신화는, 악행은 미래의 삶을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멸시받는 존재로 살아가게 하고, 따라서 그때는 보다 낮은 카스트로 다시 태어나거나, 여자나 짐승, 파리아나 찬달라, 나병환자나 악어 등으로 태어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신화는 보상으로 더 낫고 더 고귀한 형태로 브라만, 현자, 성자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약속한다. 최고 고상한 행위나 완전한 체념에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은 일곱 번의 생을 계속하여 스스로 남편의 죽음에 화형당한 여인에게도 주어지고, 입이 결백하여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주어지지만, 신화는 이 보상을 이 세상의 말로 소극적으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한다... 소수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에 이처럼 가장 고상하고 오래된 민족의 태곳적 가르침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신화는 여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윤회를 하나의 신화로 이해한다면, 이 신화가 지닌 어떠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가 지닌 상징적 의미가 바로 소수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수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로서 윤회가 지닌 상징적 의미나 목적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윤회가 지닌 상징적 의미나 목적은 다분히 윤리적인 것이다. 즉 윤회의 상징적 의미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말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의 질서를 잘 따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동기 부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세계이다. 그는 말한다.

 

... 이 세계가 이미 지옥과 같은 최악의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뿐이다. 이 세계는 유혈이 낭자한 황야다. 그곳에는 다만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는 생물들이 서로 물어뜯고 있다. 맹수는 수백 수천 마리 동물들의 생무덤이 되어 무수한 생물을 삼키면서 살아간다.

 

 

 

쇼펜하우어가 파악한 세상은 불공평과 부정의 그리고 폭력이 난무한 곳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아도 거기에 대한 보상을 현상 세계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하고 싸우고 거짓말을 하여도 즉각적인 심판을 받는 것 같지도 않다. 이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면서 인과응보라는 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사악하고 험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참으로 불쌍하고 가엾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인간 세계는 곤궁과 고통이 넘쳐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은 사악함이 인간 세계의 지배권을 쥐고 있으며, 우매함이 커다란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형편이다. 운명은 잔혹하며 인간은 가엾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상인데,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죄를 짓지 않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을 해야 할 당위성이 없다. 바로 여기에 칸트가 주장하는 실천 이성의 요청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권선징악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사후에 새로운 세상에서라도 반드시 보상이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는 추하고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선하고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삶에 대한 보상이 보장되는 사후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후세계를 가능케 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도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힌두교가 가르치는 윤회사상은 칸트가 주장하는 실천이성의 요청과도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윤회를 신화나 상징으로 이해하려는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는 윤회의 주체는 영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불멸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닌 영혼이라는 실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우주적 의지만은 윤회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홍성광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식 주체로서의 영혼이 아닌 의지만이 윤회한다고 보았다. 어떤 것이 죽더라도 의지는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다. 의지는 새로운 탄생과 더불어 새로운 지성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윤회가 아닌 재생이다.

 

이처럼 쇼펜하우어는 힌두교가 주장하는 아트만이라는 영원불멸의 영혼을 부정하고, 그와 함께 윤회사상조차도 하나의 신화로서 받아들인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실제적 윤회는 우주적 의지의 영속성을 가능케 하는 살려는 의지의 재생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계에서 생존했던 자아와 사후세계에서 존재할 새로운 자아는 동일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전혀 다른 자아인 것이다. 단지 삶의 의지, 즉 우주적 의지만이 새로운 개체에게 전달된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리하여 수백만 년에 걸친 끊임없는 재생도 모든 과거나 미래가 단지 개념 속에서 존재하듯이 단순한 개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 실현된 시간, 의지 현상의 형식만이 현재이고, 개체에게는 시간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개체는 자신을 늘 새로 생긴 것으로 생각한다. 삶이란 삶에의 의지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삶의 형식만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겉으로는 밤에 의해 집어삼켜지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자신이 모든 빛의 원천이고 쉼 없이 불타고 새로운 세계에 새날을 가져다주며 뜨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태양이 지는 것과 같다. 시작과 끝은 개체에게만 해당될 뿐이고, 시간, 즉 이 현상 형식에 의해 표상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위의 언술에서 보인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개인의 죽음은 단순히 무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 정체성이나 개체성이 보장되어 새로운 세상에서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다와 물방울의 관계를 통한 비유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바다의 파도가 칠 때에 물방울이 한시적으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지만, 순식간에 바다에 함몰되어 그 정체성이나 개체성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이에 대해 박찬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자신을 영원한 존재처럼 생각하면서 자신이 독자적인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는 사실 바다에서 파도가 칠 때 일어나는 물방울에 불과하다. 물방울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개체들은 영원의 시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을 살다가 사라진다. 또한 물방울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튀어서 생겨나며, 그것의 모양이나 움직임은 바다 전체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개체는 독자적인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의지가 나타난 것에 불과하며, 그것의 모든 행태는 우주적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지만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하다.

 

매 순간 새롭게 탄생하는 개체들을 통해 영속적으로 전달되는 우주적 의지야말로 진정한 실재요, 존재의 근원이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우주적 의지는 현상 세계 배후에 실재하는 무한하면서도 일관성을 지닌 사물(전체로서의 자연) 내지는 존재 그 자체이다. 문제는 현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의 삶이 한없는 결핍감과 무한한 노고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는 개체들의 성격을 좌우하는 우주적 의지가 맹목적 충동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주적 의지 자체도 불만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박찬국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모든 개체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투쟁하는 현상계를 보면 우리는 그러한 현상계의 근원인 우주적 의지 자체도 불만과 고통에 시달린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주적 의지 자체는 결코 만족을 알지 못하는 맹목적 욕망이기에 자신에 대한 내적 갈등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우주적 의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한다. 우주적 의지는 스스로 고통을 초래하지만, 고통을 받는 것 역시 그 자신이다. 우주적 의지는 이렇게 자기 자신과 투쟁하는 존재이기에, 현상계에 자신을 나타낼 때도 그것은 개체들 사이의 투쟁과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사물, 즉 전체로서의 자연이나 모든 존재의 근원은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존재의 근원은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우주적 의지에 불과하다. “이 맹목적 의지는 비합리적이고 의지 자체는 소진하지 않는 것이라서 인간을 포함한 세계는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는다.”그러니까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우주적 의지는 현상계를 살아가고 있고, 현상계를 영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개체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고 축복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박찬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각 개체들에 무한한 관심을 갖는다고 보는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물자체로서의 의지는 개체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본다. 물자체에게 각 개체란 결국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계기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개체가 사멸해도 자신을 표현할 개체들은 넘쳐나기 때문에, 물자체는 개체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즉 우주적 의지는 세상 속의 개체들에 대해 아무런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무한한 충동 속에서 자연이나 세상 속의 존재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 전체가 한 개체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는 것처럼 삶에의 의지는 개체의 생멸에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는다. 자연에서 중요한 것은 이 개체가 아니라 오로지 종속이며, 자연은 종속을 보존하기 위해 남아돌 정도의 무수한 씨앗과 수태 욕동의 커다란 힘을 통해 온갖 열성을 기울이며 낭비라고 할 만큼 배려하기 때문이다. 반면 개체는 자연에 아무런 가치도 없고 가치를 가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무한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의 무한히 많은 수의 가능한 개체들이 자연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자연은 끊임없이 개체를 저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개체는 수많은 방식으로 하찮은 우연에 의해 파멸할 운명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애당초부터 파멸하도록 정해져 있으며, 종족 보존에 봉사한 순간부터 자연에 의해 파멸로 이끌려 가고 있다.

 

요약하자면, 인도의 베단타 사상과 쇼펜하우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힌두교의 신, 브라만은 그 본질이 우주적 영이다. 이는 우주와 자연 전체와는 구별되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인정하면서도 우주와 자연 속에서 내재하는 신적 존재를 말한다. 특별히 자연과 함께 하는 신의 내재성은 우주적 영으로서의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과 동일 본질이라는 범아일여 사상으로 극대화된다. 이러한 힌두교의 신관은 범재신론(Panentheism)적 신비주의로 정의될 수 있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세상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고, 우주와 자연 전체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범신론적 자연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니까 우주적 영으로서의 힌두교 신관을 우주적 의지라는 자연법칙으로 대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신은 우주와 자연 전체라는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 안에 제한되거나 함몰되기에 신과 인간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는 있을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영혼을 지닌 인간은 요가라는 명상을 통해서 우주적 영인 브라만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더 나아가 우주적 영과 자신의 영혼이 하나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황홀경의 신비한 체험도 하게 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신과 인간의 신비적 관계 자체를 부정한다.

 

2) 힌두교는 인간의 본질을 아트만으로 보았다. 바로 영원히 불멸하는 영혼이 윤회의 주체이고, 우주적 영인 브라만과 동일 본질이기에 각 개인의 정체성은 영혼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우주적 의지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하는 인간의 신체만을 인정한다. 영혼이 없는 인간의 신체가 인간의 전부인 것이다. 즉 신체가 하는 그 모든 행위는 우주적 의지가 드러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가 하는 그 모든 행위를 통해 우주적 의지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된다.

 

3) 힌두교에 따르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시작이다. 이러한 윤회적인 삶은 인간 안에 내재하는 영혼이라는 실체로 인해 가능하다. 각 개인의 정체성인 영혼이 이 세상에서 행한 그 모든 선하고 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과 보상을 또 다른 세상에서 받는다. 물론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힌두교적 구원, 목샤(Moksha)는 인간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그 자신이 우주적 영과 하나라는 범아일여 사상을 깨우칠 때에 가능해진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윤회사상이나 업보사상을 부정한다. 그에게 있어, 윤회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 질서를 지키며 선하고 착한 삶을 살아가도록 유도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개체로서의 인간의 삶은 단 한번 뿐이고, 죽으면 끝나는 허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의 상징적 의미와 목적을 알기에 그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칸트가 그의 실천이성적 필요에 따라 사후세계와 신의 존재를 요청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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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11/05 [13:10]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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