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는 “1970년대 대형집회 가운데 엑스플로 ‘74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집회"라고 평가했다.
▲ 엑스플로 '74 50주년 기념 희년학술대회가 21일 오전 10시 분당 지구촌교회(담임목사 최성은)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백석대 교회사 이상규 석좌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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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지난 21일 오전 10시 분당지구촌교회에서 열린 엑스플로'74 50주년 희년학술대회에서 '엑스플로 '74와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주제 발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어 “우선 민족복음화라는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시작되었고, 이 집회를 위해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준비와 훈련을 거쳐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일회성 집단 회집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1900년대부터 비록 이름은 달리했지만 ‘민족복음화’를 의도하고 대중전도운동을 전개했다.”며 “그 첫 번의 경험이 1907년 평양대부흥을 경험한 후 1909년 9월부터 1911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한 초교파적 전도운동인 ‘백만인구령운동’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일제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30일까지 서울의 경복궁에서 전국의 물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대대적인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를 개최한 기간에 전국적인 전도운동을 실시했다. 특히 박람회 기간에 대형천막을 치고 복음을 전했는데 찾아온 10만명 중 1만1천명이 복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이름과 주소를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이 교수는 “1920년에는 한국교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도운동을 실시했는데, 장로교회는 이를 ‘진흥운동’, 감리교회는 ‘백년 전진’이라고 불렀다.”며 “1930년에는 3년 건 다시 전도운동을 실시했다.”고 했다.
특히 “해방 이후에는 김치선 목사가 ‘300만 부흥전도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한국 인구 3천만명의 십일조인 300만 명을 구원한다는 취지였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1950년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는 전도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족복음화운동을 시도한 바 있다.”며 “1960년대에는 선교80주년이 되는 1965년을 복음화운동의 해로 정하고 초교파적인 조직을 갖추고 전도운동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이어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를 소개한 후 엑스플로 ‘74와 민족복음화운동에 대한 발제를 이어갔다.
특히 “1900년대부터 민족을 복음화하려는 운동이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선명한 명칭을 사용한 분은 김준곤 목사”라며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한 엑스플로‘74는 김준곤 목사의 ’민족복음화의 이상(꿈, 기도)‘(1962)이 가져온 결실”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김 목사의 '이상'이라는 것은 1962년 2월 6일부터 9일까지 서울 은평구 불광동 기독교수양관에서 CCC 간사수련회를 한 후 5~6명의 간사들과 함께 평소에 기도하러 다녔던 삼각산 능력봉 아래에 움막으로 지어진 민족기도원(김준곤 목사의 장로신학교 동창인 박요한 목사의 누님 박애린 권사가 운영했던 기도원)에서 기도한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기도' 내용을 말한다.
이 교수는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32만3419명이 등록해 5박6일 동안 전도훈련을 받고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며, 참석자 중에는 84개 국가에서 온 3천4백명의 지도자들도 있었다고 했다.
또한 매일 밤 50만에서 80만에 이르는 이들이 철야하며 기도했다. 5박6일 동안 연인원 655만명이 참가했으며, 143만 명이 철야기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엑스플로 ‘74의 역사적-정신적 의의로 “민족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며 “엑스플로 ’74가 끝난 후 한국교회 기독교인 수는 700만을 상회하게 되었다.”고 했다.
▲ 엑스플로 '74 50주년 기념 희년학술대회가 21일 오전 10시 분당 지구촌교회(담임목사 최성은)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발제자 이상규 교수(좌)와 조귀삼 교수(우)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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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엑스플로 ‘74는 한국의 청년대학생 전도와 복음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엑스플로 ’74를 전후한 대학생선교회(CCC)의 활동은 우리나라 청년대학생 전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또한 “엑스플로‘74는 한국에서의 복음주의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며 “엑스플로’74는 기도운동, 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전도자를 양성했고, 전도지 4영리는 복음주의 신앙을 보여주는 표준전도지로 전도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엑스플로 ‘74는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를 양성했다.”고 평가하는 한편 “건실한 사회이념 형성에 기여했다. 1970년대 상황에서 엑스플로 ’74예수혁명을 통해 기독교적 삶의 가치를 제시하고 건실한 사회 문화 형성에 토대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오늘 한국 사회에는 주사파들이 활동하고 있고, 언필칭 진보라는 이름의 좌파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 정도라도 건실한 의식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은 김준곤 목사와 대학생선교회(CCC) 그리고 엑스플로 ‘74가 끼친 선한 열매라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김준곤 목사에 의해 주도된 엑스플로 ‘74는 오직 한가지 목표, 곧 민족복음화를 위한 대형전도집회였고, 결과적으로 민족복음화에 기여하여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했고, 한국의 청년대학생 전도와 복음화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복음주의 신앙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엑스플로‘74를 통해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를 양성했고, 1979년대 이후 건실한 사회 이념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엑스플로 '74 리멤버 회고와 전망’ 주제로 열린 이날 대회는 한국CCC, 나사렛형제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EXPLO '74 희년대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이날 발제는 이상규 교수의 발제를 시작으로 박응규 교수(아신대)가 ‘엑스플로 '74와 한국교회사적 의미’를 주제로 발제했다. 또한 조귀삼 교수(한세대 명예교수)가 ‘원심력적 선교구조에 내재된 엑스플로 '74의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주제로 발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