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오늘과 유사한 글을 게시한 바가 있다. 계절이 두 번 바뀐 가을이 되니 봄과 다른 모양과 색이 입혀졌다. 먼저 선명함이 흐려져 있다. 모양도 많이 흐트러졌다. 그래도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다름이 있어서 좋다.
길 위에 펼쳐진 풀들은 보살핌은 고사하고 백번 천번 사람들에게 짓밟혔다. 풀에도 피가 흐른다면 길 위는 붉은 핏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을 것이다. 풀이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면 여기저기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 봄부터 길 위에서 살아온 풀인데 무수한 사람들에 짓밟혔어도 끈질기에 살아남았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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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바람 부는 대로 씨가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길 위였다. 가을까지만 살다가 더 좋은 곳으로 옮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꼼짝없이 길 위에서 겨울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슬퍼할 것은 아니다. 봄부터 한 발짝도 떠나 본 일이 없이 그 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했다. 알아주는 이도 없지만 그래도 멋진 예술을 빚어냈다. 길 위가 아니면 도무지 펼쳐낼 수 없는 그림들이다.
▲ 풀이 길 위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려냈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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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를 걷는 시인은 짓밟힌 풀을 보며 시를 짓고, 철학자는 깊은 사고를 꺼낸다. 사상가는 억압 가운데 사는 인생들의 처연함을 보았다. 아울러 쉽게 무너지지 않는 약자의 의연함과 끈질김도 유추해 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레바논의 백향목에서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논하였다. 아가를 보면 창포, 계수, 침향, 합환채, 나도, 몰약, 고멜화, 수선화, 번홍화, 종려, 백합화 등을 능란하게 인용한다. 고대 로마인들도 자연 속을 걸으며 유유자적하고 마음을 높이 갈고 닦았다. 이를 두고 오티움(otium)이라 했다.
▲ 짓밟힌 풀에게서 약자의 의연함을 배운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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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현자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지만 길 위에서 짓밟혀 상처 나고 찢긴 풀을 바라보며 거룩한 상상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낙심하고 있다면 길 위에 누워 있는 풀에 다가가 말을 걸어 보라. 믿음의 도를 따르다가 고난 중에 있는가? 짓밟힌 풀을 보며 의연함과 인내를 배워보면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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