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만 90세로 일본 기독교 최고령 현역 목회자인 신현석 목사(야찌마다그레이스교회 담임목사).
▲ 일본 야찌마다그레이스교회 신현석 담임목사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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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목사는 19일 오전 서울 종로 5가 세계성시화운동본부를 방문한 후 연동교회당를 탐방하던 중 교회당 외벽에 부착되어 있는 이 교회 1대 담임목사 게일 목사를 소개한 현수막에 쓰여진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했던 제임스 게일 목사”라는 문구를 보고 “일본인보다 일본인을 더 사랑한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 신현석 목사가 연동교회당 외벽에 붙어 있는 이 교회 설립자 게일 목사 추모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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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목사는 이어 연동교회 옆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 여학교인 정신여학교(정신여고) 구 교사 뒤편에 조성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1892-1944)의 흉상과 수령 557년 된 회화나무를 둘러보았다.
김마리아 선생 공적 기념비에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기록될 만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기독교인이다.
김 마리아는 1919년 2월 8일 한국인 유학생들이 동경 한국YMCA강당에서 발표했던 2.8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밀반입해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흉상과 수령 557년 된 회화나무, 한국 최초 여학교이자 기독교학교 정신여학교(정신여고) 건물. 신현석 목사가 김마리아 선생의 공적을 읽고 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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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는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일본 순사들이 감시를 피해 비밀문서와 태극기, 그리고 교과목으로 금지되었던 국사교재들을 이 회화나무의 빈 구멍에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김마리아 선생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전국조직 활동으로 두 번의 옥고를 겪었으며, 원산의 여자신학교에서 교수로 사역했으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4년 눈을 감았다.
▲ 수령 557년 된 회화나무, 일제 때 이 나무 밑에 비밀문서를 숨겼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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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목사는 계명대학교 음대 성악가를 제1회로 졸업하고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기 전인 1965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1967년 동경신학대학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하면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목사가 된 후에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소속으로 동경 글로리아교회 담임목사와 오비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인화 목사와 함께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철폐운동과 야스쿠니신사문제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
▲ 일본 야찌마다그레이스교회 신현석 담임목사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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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도 앞장서면서 대학에서 일본군 위안부 모의재판을 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신 목사는 동경한국YMCA 이사로도 활동했기에 김마리아 선생의 흉상과 공적을 기리는 내용을 숙연한 자세로 살펴보았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5년 동안 공부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일본에서 살고 있어서 영주권은 취득했지만, 시민권은 일부로 취득하지 않았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사역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 목사는 지난 2003년 은퇴 후 치바현 야찌마다시 새다이 마을 입구에 야찌마다그레이스교회를 개척 설립하고 올해로 만 21년 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신 목사는 코로나19 이전까지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하토야마 전 총리 등이 참여한 동경 록본기남성합창단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신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일본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명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