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같이 아픈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신앙의 탯줄 기도의 탯줄
말씀의 탯줄에서 자라게 하시고
집집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기업주들은 이 회사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나는 관리인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두메마을 우물가의 여인들의 입에서도
공장의 직공들 바다의 선원들 입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각급 학교 교실에서
성경이 필수과목처럼 배워지고
국회나 각의가 모일 때에도
주의 뜻이 먼저 물어지게 하시고
국제 시장에서 한국제 물건은
한국인의 신앙심과 양심이
으레 보증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로 자기하나님으로 삼고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그리하여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김준곤 목사/민족복음화의 환상과 기도)
▲ 1960년대 중반의 김준곤 목사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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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복음화의 꿈’ 또는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기도’라는 제목으로 한국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기도문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 겸 초대 총재 김준곤 목사님(1925.3.28.-2009.9.29.)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 이 기도를 드린 것은 1962년 2월 8일 밤부터 9일 새벽 삼각산 민족기도원입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김 목사님은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광주에서 전남대, 조선대를 중심으로 CCC 사역을 하시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수도여사대(세종대),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직접 대학을 방문하기도 하고 대학 앞에 다방에 자리를 잡고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사역은 쉽지 않았습니다.
김 목사님은 1962년 구정 다음날인 2월 6일부터 9일까지 서울 은평구 불광동 불광2동 산 2번지 팀수양관(한국기독교수양관)에서 CCC 간사수련회를 했습니다. 초창기라 전국에서 20여 명의 간사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중에는 2명의 여자 간사도 있었습니다.
▲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소재한 기독교수양관. 미국의 팀선교회가 1956년 수양관을 건축해 1958년 개관하여 운영했다. 한국CCC는 1958년 설립됐다. 1962년 2월 6일부터 9일까지 간사수련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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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수양관은 미국의 팀선교회가 운영하는 기관이었습니다. 팀선교회의 모체는 1890년 10월 미국 뉴욕 브룩클린에서 프레드릭 프랜슨(Fredrick Freanson)이 창설한 초교파적 선교기관인 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TEAM) 입니다.
팀선교회는 창설 직후 중국, 인도, 일본에 처음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한 이래 현재는 세계의 약 40여개의 국가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한국에서는 1953년에 기독교 문서 선교 기관인 생명의 말씀사를 설립한 이래, 부산의 축복산 고아원, 극동방송의 전신인 HLKX 라디오 방송국, 팀수양관(팀비전센터), 부산의 대성 실업 중고등학교, 관동대학교 등을 설립했습니다. 1995년 3월부터는 팀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귀국했습니다.
팀수양관은 1958년 팀선교회(TEAM Mission)의 선교사 로버트 크리스토풀러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는 한국의 팀선교회에 소속된 생명의말씀사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소재한 기독교수양관. 미국의 팀선교회가 1956년 수양관을 건축해 운영했다. 한국CCC는 1958년 설립됐다. 1962년 2월 6일부터 9일까지 간사수련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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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는 1995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경기도 가평 광성수양관에서 “처음사랑으로, 처음 부르심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CCC전국간사수련회 저녁집회에서 'CCC 역사와 뿌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CCC의 오늘까지를 간증했습니다.
다음은 그 간증 내용 중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내용입니다.
“1962년 2월 간사가 20명쯤 있었습니다. 여자 간사가 2명이고, 총무는 저의 동창인 밥 존슨대학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하고 돌아온 차남진 박사였습니다. 굉장히 좋은 분입니다. 저보다 10살쯤 위인 분입니다.
기독교수양관(서울 은평구 불광동)을 4박 5일 빌려서 간사수련회를 하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냉랭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돌방인데 난로를 피우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온돌이 막혀서 불이 안 들어오고 눈이 많이 오는데 그분이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했습니다.
어디든지 성령의 물꼬를 트게 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목사님 제가 아간입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냉랭해요.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자기 죄를 구체적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도 ‘저도요.’ 합니다.
저도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셋이 붙잡고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뜨거운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이 팍팍 타는 것 같았습니다. 제 코에서 장미 향기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뜨겁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하고 돌아오니까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농담하고 장난하던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는 데 두세 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진동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받고 여기 와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전합니다. 설교는 안했습니다. 성경을 펴면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에게 부흥을 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약해가지고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음이 뜨거워져야겠습니다.’ 했더니 울음바다가 되고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여자 간사들은 아침 4시까지 찬송하고, 기도하고, 울고, 감격했습니다. 너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도 금식하자고 안했는데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밥 먹고 있겠느냐? 2~3일 금식하고 끝냈는데 기도에 배고픔이 생겼습니다. 식욕이 생긴 겁니다. 영적으로 기도에 불이 붙으면 기도에 식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고 목이 더 마릅니다. 더 기도하고 싶고 특별 기도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목사는 사역이 너무 힘들어서 CCC를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정도로 무거운 마음으로 간사수련회에 참석했는데 회개와 영적 각성의 불꽃이 타오른 수련회가 되었습니다. CCC 사역에 대한 열정이 회복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수련회를 하루 일찍 마친 셋째날 밤에 평소 기도하러 다니셨던 삼각산 구국기도원으로 기도하시기 위하여 간사들 몇 명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불광동 팀수양관에서 평창동 삼각산 구국기도원까지는 걸어서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 기도원은 김 목사님과 장로회신학교 1회 동창인 박요한 목사님(당시 대전 남부교회 원로, 섬 선교를 하고 계셨음, 예장합동 총회장 역임)과 전화 통화를 해서 그 기도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 엑스플로 '74대회 당시 메시지 전하는 김준곤 목사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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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목사님에 의하면 “구국기도원은 평창동 산 입구에서 걸어서 올라가면 능력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 밑에 있었다. 그리고 누님의 이름은 박애린(朴愛隣) 권사”라고 했습니다.
박요한 목사님은 김준곤 목사님의 부인 인정진 사모님이 1950년 10월 3일 좌익에 의해 순교를 당하신 후 가매장했다가 1년 후 엄두섭 목사님 등 신학교 동창들이 중심이 되어 장례식을 할 때 ‘울밑에 선 봉선화’라는 노래를 개사하여 조가를 불렀던 분이기도 합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증언을 들어 보겠습니다.
“삼각산 꼭대기에 신학교 동창 박요한 목사님의 누님이 하는 민족굴(구국기도원)이 있었는데 원단(구정 설) 때마다 다녔습니다. 우물도 있었습니다. 오륙 명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인데 혼자 다녔습니다. 한번은 간첩으로 오인되어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불면증이 있어 수면제를 갖고 다녔고 성경책도 있고 영문편지도 있었습니다. 늦가을 어느 이슬비 오는 날 경찰이 옆에서 권총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손 들라고 해서 손을 들었습니다. ‘간첩이지?’ ‘아니요.’ ‘무엇 하는 사람이요?’ 하면서 소지품을 뒤지는데 성경책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 간첩들이 신분을 보장받으려고 성경책을 갖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수면제가 나오니까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간첩들이 그 약을 먹고 죽는답니다. 영문편지가 나오니까 이것도 가장이랍니다. 위장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통하면 간첩 아닌 척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후에 제 아내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을 간첩이라고 하는가 하면 밤중에 라디오를 듣는 사람, 종종 외국여행을 하는 사람, 달러를 쓰는 사람, 산에 종종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틀림없이 간첩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볼 때 간첩입니다. 잡혀가면서 제가 이런 사람인데 지금 기도하러 간다니까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라고 굉장히 거칠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세검정파출소(서울 종로구 신영동, 평창동 인근)에 왔는데 ‘당신 아는 사람 있소? 사무실이 어디요.’ 하고 묻습니다.
그때는 중부경찰서 앞 영락교회 근처에 CCC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부경찰서로 연락을 해보라고 했더니 제 인상착의를 듣고 중부경찰서에서 계신 분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소를 적고 생년월일을 적고 나니 미안하다며 그냥 가라고 하였습니다."
김 목사님은 1962년 2월 8일 밤 혼자서 구국기도원에서 기도하려고 팀수양관을 나섰습니다. 그러자 5~6명의 간사들이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김 목사님의 증언을 더 들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민족굴에 가서 기도하려고 나오는데 대여섯 사람이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눈이 아니고 비가 왔습니다. 굉장히 미끄러워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비가 함박눈으로 변할 거요. 굉장히 멋진 설경을 볼 거요.’ 했더니 신이 나서 세 발자국을 갔는데 손바닥만한 함박눈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힘이 나서 따라왔습니다.
길이 안 막히고 설경을 구경하며 눈에 빠지며 왔습니다. 도착하니까 밤 12시가 되었는데 산 속이라 영하 20도입니다. 굉장히 추웠습니다. 4~5명은 굴로 들어갔습니다. 구부리고 앉아서 기도를 드리며 소리를 지르는데 논스톱으로 폭포수처럼 기도가 쏟아지는 데 등에 땀이 흥건해졌습니다.
그때 한 기도가 민족을 위한 기도, 저 서울의 마도 즉, 마의 도시, 멸망의 도시, 악마의 도시, 타락의 도시, 퇴폐의 도시, 심판의 도시, 진노의 도시, 6.25때 인민군이 폐허를 만들어 전쟁, 수난, 죄와 가난과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도시를 위해 참으로 기도다운 기도를 하면서 ‘지금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민족의 주로 삼게 하옵소서. 신.구약 성경을 민족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게 하소서. 여호와 하나님을 민족의 하나님으로 삼게 하옵소서. 통일을 주시옵소서. 부흥을 주시옵소서. 농촌 마을에도, 김매는 농부의 입에서도 저절로 찬송이 터져나오게 하옵소서. 우물가의 여인들이 할렐루야로 화답하게 하옵시고 두 사람이 길을 가면서도 주님을 이야기하게 하시고 각급 학교에서도…. ’민족 복음화를 위한 기도문‘이 그날 저녁에 다 나온 것입니다. 공중에 뜬 상태 같았습니다. 환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답답하고 사역을 포기하고 싶었던 상황에서 회개와 영적 각성 그리고 이어진 금식기도를 하면서 수련회를 일찍 마친 셋째날 밤에 평소 다니셨던 구국기도원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 빌 브라잇 박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 김준곤 목사(왼쪽부터)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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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목사님의 이어지는 증언입니다.
“그 다음날 집에 내려갔는데 변화산에서 내려 온 것처럼 생각을 해보니 어젯밤 별소리를 다 한 것이 창피하였습니다. 아무리 기도 중이라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런 소리한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사람 만나기도 싫고 나가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기도를 시작했을 때 ‘그것이 주님의 기도입니까? 내 기도입니까?’ ‘네 기도가 어디 있느냐 성령이 감동해서 네 마음에 기도를 심어서 네가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냐.’ 확신이 왔습니다. 로마서에 있습니다. 그때부터 민족복음화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김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민족복음화 운동을 해야 하는데 다섯 가지 물음을 했습니다. ‘민족 전체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면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가?’ 방에 앉아서 쓰는 것입니다. 백인(100인)의 이름도 써보고, 33인의 목사 이름을 보기도 하고 어떤 방법으로 해야 되는가, 누구를 붙잡고 해야 되는가. 그리고 이것을 물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예수 믿는 민족이 된다. 통일이 된다. 학원에서 누구의 강요도 없이 기도를 하고 국회에서도 국난을 만났을 때 여기저기서 기도를 하고 이렇게 되려면 우선 전도를 해야 하는데 민족 단위로 조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의 뜻인가 다시 확인을 해보아야겠다. 하면서 기도했는데 그것은 너무너무 명백했습니다. ‘그런 말을 묻는 놈이 어디 있느냐. 성경에 다 말해 놓았고 네가 기도할 때마다 한 얘기가 내 얘기지, 네 얘기냐. 그것이 내 뜻이지 네 뜻이냐? 내 뜻하고 네 뜻하고 같지 않느냐? 한국이 그렇게 되기를 내가 원한다.’
그러면은 두 번째는 주님이 원하면 가능합니까? 현실적입니까? God is willing, God is willing(하나님은 기꺼이 하실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세 번째는 그러면 방법은? ‘사도행전 방법으로 해라. 형편없는 사람들이 했지 않느냐. 그러나 네게는 120명도 있지 않느냐? 사도행전처럼 성령 충만하면, 능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 가지 말아야 하겠구나. 기도와 성령과 믿음으로 열심히 전도하면 되겠구나. 전도폭발이 되고 사랑폭발, 회개폭발, 기도폭발, 성령폭발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한 얘기입니다. 그 직후에 제가 한 얘기입니다. 그것이 제 얘기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방법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언제부터 할까요? 학생이 적어도 만 명이나 적어도 3천 명은 있어야 단위가 되지 않겠습니까. 언제부터입니까?’ ‘아니다. 지금이다 지금부터 해라. 네가 가진 것으로 해라. 모세의 지팡이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 갖고 했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나자 굉장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나 같은 것의 말을 과연 누가 들을까? 아무도 강단에도 안 세워 줄 것 같은 무력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할까요?’ 그랬더니 ‘네가 해라.’하셨습니다. 그때부터 LTI니 LTC니 민족복음화 훈련을 하고 기도회를 할 때마다 다섯 가지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고 물으면 ‘뜻이 아닙니다.’ 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가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능합니까?’ 하면 ‘하나님이 능치 못함이 어디 있소. 뜻대로 구하면 들으십니다.’ ‘그럼 언제부터 할까요?’ ‘지금 합시다. 여기서부터 합시다.’ ‘누가?’ ‘내가!’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하면 ‘내가!’ 하는 것 알 것입니다. 여러분 괜히 해본 것 아닙니다. 그 기원을 알았습니까? 그날 밤에 민족복음화 비전의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김 목사님은 월간 <CCC 편지> 2000년 3월호에서 필자(김철영 목사)와의 특별대담에서 ‘CCC 초창기 사역 중 기억에 남는 비하인드 스토리 한토막만 들려주시죠’라는 질문에 ‘1962년 ’민족 복음화의 기도’를 할 당시를 꼽았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을 주로 삼는 민족 건설 외길 43년 늘 푸른 청년의 꿈”(PP.4~7)이라는 제목의 대담 중 일부입니다.
“1962넌 2월에 불광동 수양관에서 20여 명의 간사들을 데리고 컨퍼런스를 했어요. 간사들도 별로 은혜가 없고, 나도 캠퍼스에서 전도를 해보는데 몇 명 안 되고…위기였지요. 전도의 생산이 안 되니까, 은혜도 없고 ‘이걸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간사가 ‘내가 아간이에요’ 하면서 흐느껴 울어요. 왜 그러냐 그러니까 ‘내가 죄가 있어서 그래요’ 그러더군요. 죄를 고백받으면서 체증이 쫙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옆에 있다가 자기도 아간이라고 해요. 방 안에 들어가보니까 이미 모두가 성령의 불덩어리가 되어 마치 오순절 다락방 같았어요. 내가 11시쯤 들어갔는데 그대로 서서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새벽 4, 5시까지 했어요.
삼각산 꼭대기에 박요한 목사님 누님이 움막을 쳐놓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많이 기도했어요. 밤중에 영하 20도가 되는 추위에 , 눈 쌓인 그곳을 올라갔지요. 그때 굴에서 기도하면서 ‘민족복음화의 꿈’을 되풀이해서 기도했는데 그것이 일종의 헌장처럼 되었어요. 환상처럼 보면서 우리 민족이 이렇게 돼야 되겠다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성령으로는 가능하닥 믿으면서. 대통령과 국회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막히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혼인길도 막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민족복음화가 가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가 얼굴과 얼굴을 대함같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죠. 민족을 복음화하려면 전도운동을 한두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본격적으로, 조직적으로 해야 되겠다 해서 훈련을 시작했어요. 4영리나 기본적인 교재를 가지고 학생들을 훈려시켜 교회에다 내보내고, 시범교회에도 내보내 봤습니다. 1970년대 초 재야의 종소리와 함께 기독교방송을 통해 59000개의 자연부락마다 복음을 전해야겠다, 평신도 전도훈련을 해서 한국 민족을 예수 믿는 민족으로 만들겠다는 선포를 했지요.“(P.5)
필자(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을 보좌하면서 당시의 간증을 직접 듣고 ‘목사님, 어떻게 그 거대한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김 목사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기도를 드린 후 내 손으로 직접 전도하여 키운 제자가 500명이 되면 그때부터 민족복음화를 위한 사역을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려대학교 앞에 집을 얻어 1층은 전효심 사모님이 약국을 하시고, 2층은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전도한 대학생들을 집에 데려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도전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대학생들에게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잠언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며 민족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품게 했습니다.
또한 “젊은이여, 환상을 보라”며 도전하시면서 요엘서 2장 28과 29절 말씀 “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7절 베드로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성취된 것을 강조하시면서 민족의 심장 같고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에게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품고 기도하며 나아갈 것을 도전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민족굴에서 기도한 대로 직접 전도하면서 제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민족 복음화를 위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3년 후에는 국회 사무처에 등록된 30여 명의 크리스천 국회의원 명단을 받아 이들을 초청해 1965년 2월 27일 여당에서는 김종필, 박현숙 장로, 야당에서는 정일형, 김영삼 의원 등 크리스천 국회의원 20여 명 참석한 가운데국회조찬기도회 취지를 설명하고 참여를 요청했습니다.
이 모임은 여야 국회의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린 최초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국회조찬기도회의 여야 초대 총무는 김종필 의원과 김영삼 의원이 맡았습니다. 국회조찬기도회는 국회에 등록된 의원 동아리로는 가장 오래된 단체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 국가조찬기도회. 좌측부터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 김준곤 목사, 박정희 대통령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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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목사님은 국회조찬기도회 회원들에게 국가조찬기도회를 제안해 이듬해인 1966년 3월 8일 조선호텔에서 제1회 국가조찬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이 기도회는 미국보다는 9년 늦게 시작되었지만,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열렸습니다. 당시 미국국가조찬기도회 로빈슨 총무와 하버슨 박사 등 ICL 지도자 5명과 브라운 미국 대사, 각국 외교사절, 삼부요인, 이효상 국회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노기남 천주교 대주교 등 267명이 참석했습니다.
기도회 순서는 박현숙 의원의 개회사, 김영삼 의원이 시편 23편 봉독, 김종필 의원이 고린도전서 13장 봉독, 김활란 박사, 강신명 목사, 유호준 목사, 최채섭 장로, 노기남 대주교 등이 순서를 맡았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나와 너의 미래상을 생각해 보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국가조찬기도회에는 이후 한경직 목사님 등 교계 지도자들과 김수환 추기경도 참석을 했습니다. 이 국가조찬기도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의 민족복음화를 위한 사역은 계속 되었습니다. 1968년 8월 CCC 학사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복음화의 제3의 집단’을 표명하며 ‘순’과 ‘사랑방’ 전략을 통해 민족 복음화를 위한 전위대로 ‘나사렛형제들’이 창설되었습니다.
1969년에는 전군신자화운동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안하여 그 때부터 군대에서 진중세례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어 1971년 1월 1일 0시 기독교방송을 통하여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하시고, 서울농대 수원캠퍼에서 ‘민족복음화 지도자 강습회’를 시작으로 구체적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해 나가셨습니다.
1971년 8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1만 명 민족복음화 요원 강습회, 1972년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춘천성시화운동 전도대회, 전국 시군 단위 민족복음화 요원 전도강습회를 열었습니다.
특히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32만3419명이 5박6일 동안 엑스플로 ‘74대회를 개최하면서 한국 교회 폭발적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년 후 한국 교회는 110만 명의 새신자가 늘었으며, 하루에 6개씩 교회가 개척 설립되었습니다.
▲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32만3419명이 5박6일 동안 민족복음화 요원훈련을 받은 엑스플로 '74대회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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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에는 여의도광장에서 ‘80세계복음화대성회를 열어 10만 명의 젊은이들이 세계 선교에 헌신하게 하는 등 대학생들과 한국교회가 캠퍼스 복음화와 민족 복음화 그리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0년 7월과 8월에는 필리핀 마닐라에 3,000여 명의 대학생들을 파송하여 한국 교회 단기선교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특히 1995년 5월에는 전 섹{ 기독교 지도자 4500여명이 서울에서 11일 동안 모여 10/40윈도우지역 미전도 종족 선교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김준곤 목사님은 “전교회가 전복음을 전세계에 전하자”는 주제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이처럼 김 목사님의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한 민족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를 위한 사역은 1962년 2월 8일 밤부터 9일 새벽에 삼각산 민족굴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드린 기도와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천해간 사역이었습니다.
▲ 대학생여름수련회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한국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 ©C.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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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자”고 강조하시면서 본을 보이셨으며, 2009년 9월 29일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식하실 때까지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전도의 사명을 강조하셨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1만여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말이 있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수가 30~40퍼센트 줄었다고 합니다. 2030년에는 한국 기독교인 수가 우리 국민의 10퍼센트 수준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젊은이 선교 동원이 되지 않고, 한국 선교사 평균 연령이 50대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붙잡고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실천할 때 다시 한국 교회를 회복하셔서 통일 한국, 민족복음화 세계 선교의 길을 뚫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김철영 목사/김준곤 목사가 임종할 때까지 보좌했다. 현재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과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뉴스파워 대표, 한국교계국회평신도5단체협의회 상임사무총장으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