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연지동(김상옥로 37)에 소재한 연동교회(담임목사 김주용)는 지난 8일 주일 오후 3시 연동교회 본당에서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게일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1900-1905) 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 서울 종로구 연지동(김상옥로 37)에 소재한 연동교회(담임목사 김주용)는 지난 8일 주일 오후 3시 연동교회 본당에서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게일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1900-1905) 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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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미나는 임희국 교수(장신대 명예교수, 역사신학)가 발표했으며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 역사신학)가 논찬을 맡았다.
게일(James Scarth Gale: 奇一, 1863-1937)은 1888년 조선에 선교사로 도착했으며,1990년부터 1927년까지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교역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 혈통을 지닌 그는 캐나다에서 이민 2세로 태어났고, 20대 나이에 조선으로 와서 40여년 사역을 했다.
임 교수는 게일을 “한국화 한 선교사”라고 평가하고 연동교회의 초기 역사에 대한 발표를 이어갔다.
임 교수는 “연동교회는 1894년 예배 처소로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17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국 북장로회 조선(한국)선교부 제10회 연례회의록에는 ‘정동교회(새문안교회) 교인 중 상당수가 연못골(蓮洞,연동)로 옮겨갔는데, 그래함 리(Graham Lee, 이길함) 목사가 이미 예배를 시작했다’고 기록되었다.”며 “그해 8월부터 11월 초순 사이에 예배 처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 1894년 창립된 연동교회가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대 담임목사 게일 목사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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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 이듬해에 연동교회는 예배 처소에서 정식(미조직) 교회로 승격되어 발전했다.”며 “이때 서울에는 정동교회(새문안교회, 1887년), 곤당골교회(1893년), 연못골교회(연동교회, 1896년), 약현교회(1894년) 등 4개 장로교회가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1899년에 연동교회는 전체 세례교인 59명, 신입 세례교인 9명, 전체 학습교인 20명, 신입 학습교인 14명, 願(원)입교인(입교 희망자) 90명, 연보 59.88엔, 주중 모임 장소 3곳, 주중 모인 인원 11명 규모로 발전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게일은 1888년 12월 1일 부산에 도착해 3일 후 제물포에 도착했다.”며 “언더우드 내외가 그를 맞이했고, 일행은 곧장 서울로 왔다.1주일 후 그는 3년 전 서울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헤론(John W. Heron)의 안내로 장안을 구경했다. 12월 19일 그는 내한 외국인들만 모이는 성탄 축하파티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게일은 캐나다의 누이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렇게 외국인들만이 모여 있는 자리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조선 사람이 될 것이다.’는 소감을 밝히면서 ‘이들은 현지인(조선인)과 전혀 접촉하지 않고 자기들과(끼리) 서로 엉켜 지내고 있다.’고 했다.”고 밝혔다.
게일은 선교사들과 무리지어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서울에서 3개월 정도 머문 후 황해도 해주로 가서 2주를 지내다가 소래로 갔다. 소래에서 3개월 정도 지내는 동안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조선의 일상 문화’를 배우고 몸으로 연습했다.
임 교수는 “게일은 소래에서 3개월 동안 지내면서 선교 철학이 확립되었는데, ‘한국화 기독교’였다.”며 “서양 기독교가 조선에서 조선인에 의하여 한국적(조선적) 기독교로 새롭게 탄생하게 하는 선교 철학”이라고 밝혔다.
▲ 서울 종로구 연지동(김상옥로 37)에 소재한 연동교회(담임목사 김주용)는 지난 8일 주일 오후 3시 연동교회 본당에서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게일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1900-1905) 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발표하는 임희국 장신대 명예교수 ©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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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은 1888년 10월 캐나다 토론토를 떠나 밴쿠버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 요코하마를 들러서 나가사키로 갔고, 또 조선의 부산으로 왔다. 그는 나가사키로 향하는 배에서 처음으로 조선 사람을 대면했으며, 그의 첫 번째 목표를 이 나라의 언어 배우기로 정했다.
게일은 언더우드로부터 소개받은 어학선생 송수경에게 3개월 동안 언어를 배웠으며, 한문도 배우기로 했다. 그가 조선어와 중국 고전을 동시에 배우는 언어학습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1889년 봄에 이창직을 만나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규칙적으로 한문 성경을 읽었다. 또한 떠듬떠듬 공자를 읽기 시작했다.
임 교수는 “게일이 진행한 조선의 언어습득과 고전 한문 배우기는 ‘한국화 선교사’의 여정이었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 어떤 선교사들보다 현지 언어(조선, 한문, 고전)를 잘 구사했다.”며 “이를 통해서 그는 조선인과 더불어 생각과 마음 그 사상까지도 막힘 없이 소통했다.”고 했다.
▲ 서울 종로구 연지동(김상옥로 37)에 소재한 연동교회(담임목사 김주용)는 지난 8일 주일 오후 3시 연동교회 본당에서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게일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1900-1905) 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발표하는 장신대 임희국 명예교수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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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당시 조선 선교사 다수가 선교 현장의 주민들을 알게 모르게 차별했고 또 유색인에 대한 백인 우월 의식도 갖고 있었는데 그들에 비해 게일은 조선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더불어 살고자 했다.”며 “게일은 ‘선교의 황금률은 피선교인과 더불어 지내며 함께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또 ‘한 몸’(One Union)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복음전도 방법은 ’사랑방 전도‘였다.”고 밝혔다.
게일은 곤당골에 사랑방을 따로 만들었으며, 하루 7시간씩 차자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원산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를 통해 선교 현장의 주민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고 상호 간에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임 교수는 “게일은 자주 힘써 조선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조선에 도착한 이후 8년 동안 조선 팔도를 12차례 왕래했다고 한다.”며 “그에게 선교사란 ‘보헤미안’ 순례자였으며, 선교사인 ‘나’와 현지 조선인 ‘그들’ 사이에 있는 벽, 곧 생각, 생활습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노력을 날마다 쉬임 없이 반복했다.”고 밝혔다.
게일은 조선에 온 지 7년이 되던 1895년 영국 존 번연(1628-1688)의 『천로역정』을 간행했다. 이 책의 삽화는 ‘한국화’ 기독교‘의 명제가 예술적으로 표현되어 구현되었다. ’갓 쓴 예수, 두루마기 입은 예수‘를 그려 넣었다. 조선인의 심성 안으로 토착화된 그리스도 신앙을 그린 것이다. 이 삽화는 게일과 김준근이 그렸다고 한다. 특히 ‘족두리 쓴 천사’를 그렸다. 조선의 문화 소속으로 토착화된 독특한 표현이었다.
『천로역정』을 1903년 무렵 의금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이들이 그 이후에 연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 1894년 창립된 연동교회가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대 담임목사 게일 목사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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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교수는 게일의 공적으로 ‘한글의 가치를 발견’한 선교사로 평가했다.
임 교수는 “게일은 ‘한글이야말로 한국의 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특별한 섭리’라고 판단했다.”며 “게일의 한글 발견은 그의 선교 철학과 직결되었다. 즉, 복음이 선교 현장 토착인(조선)의 언어로 증언되어 그 토착 문화 속으로 성육신한다는 것”이라며 “토착 문화 속으로 성육신한 복음이 그 문화 형체로 드러난다고 보았다.”고 밝혔다.
게일은 한글연구에 착수해 문법 연구, 사전편찬, 문자 연구를 진행했다. 1893년 장로교 조선 선교회(공의회)는 10개 항목의 선교정책을 채택하면서 한글을 복음 전파의 언어로 사용하기로 했다.
게일의 한글 문법 연구는 1894년 『辭課指南(사과지남)』으로 발표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164개의 한글 문법 사항을 번호로 매겨가면서 ‘경서언해’에 나오는 한글 구절을 ‘언문’이라 하여 먼저 제시하고, 이어서 언문과 방언형을 구별했다. 그리고 해당 형태(언문 혹은 방언)가 한자 구절을 지니고 있으면 그 아래에다가 그것을 표기했다. 또한 게일은 한글 문법 연구는 종결 어미, 연결어미, 조사로 구성되어 있다.
▲ 1894년 창립된 연동교회가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대 담임목사 게일 목사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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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은 1897년『한영사전』편찬했다. 이 사전은 일본 요코하마 Kelly & Walsh 출판사에서 인쇄했는데, 조선어-영어 이중어 사전으로 3만5천여 개의 표제항을 수록했다.
임 교수는 “게일은 조선에서 사용되는 구어, 문어, 한문을 모두 한국어로 개념화했다.”며 “그러나 이 세가지를 동일한 언어 층위로 보지 않았다.”고 했다.
임 교수는 게일이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했던 상황도 소개했다. 임 교수는 “게일이 조선에 온 지 13년이 되던 1900년 5월에 연동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며 “그는 1899년 9월 원산 선교지부를 캐나다장로회 선교회에 이양하고 그곳을 떠나 서울로 왔다. 1900년 4월 연동교회에서 교역하던 기포드가 세상을 떠난 직후, 5월에 연동교회 담임목사직을 맡아 ‘한국화된 선교사’로서 연동교회의 담임목사로 교역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당시 연못골에 세워진 위치는 蓮花坊(연화방)이라고 불리는 군인 거주지역이었다. 연화방은 조선의 효종왕 시대에 군인 거주지역으로 조성된 이후로 19세기 말까지 변동 없이 이어왔다.
임 교수는 “이곳에는 근처 여러 궁궐과 그 관련 시설에 근무하는 관료(공무원)들이 거주했고, 또 梨峴(이현)시장과 연결된 이곳에는 상인들이 거주했고, 또 전통적으로 ‘갖바치’라고 불리며 천민으로 분류되던 수공업자(鞋工(혜공), 짚신 만드는 장인), 양혜공들도 거주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이렇게 군인 거주 지역에 있는 연동교회인데, 교인들 가운데는 군인(무관)이나 관료가 거의 없었다.”며 “교인 구성원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이 다수였고, 또 수공업에 종사하는 천민 계층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00년경 연동교회 교인 구성은 사회 계층에서 중인과 그 이하의 주민이 다수였더. 이러한 교인 구성이 1904년 이래로 크게 달라졌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게일은 1902년 6월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이상재를 비롯 김정식(경무관), 안국선(조경군수), 유성준(가선대부, 내부경무국장), 이원긍(대제학, 국군기무처의원), 홍재기(중추의원관, 총리대신 비서, 개성군수) 등 정부고위층 관료들이 소위 ‘개혁당사건’에 연루된 역모 행위 혐의로 체포되어 국사범(정치범) 죄수로 의금부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벙커, 아펜젤러와 함께 이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신앙으로 권면했다.”고 했다.
특히 “1903년 1월 감옥 안에 도서실이 설치되면서 성서공회의 후원으로 서양 학문 서적과 성경이 차입되었다.”며 “이상재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읽으며 감명을 받았고, 요한복음도 30회 이상을 정독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김정식은 1899년 게일에게서 한문 성경을 선물로 받았으나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1903년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해 겨울 두 달 동안 32권의 책을 독파했는데, 게일이 번역한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크게 감명했다. 또 다른 수감자들도 옥중에서 개신교에 입교했다.”고 밝혔다.
▲ 1894년 창립된 연동교회가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대 담임목사 게일 목사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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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하면서 친러(수구)세력이 몰락하면서 정세변동으로 의금부 감옥 수감자들이 석방되었다. 이상재와 옥중 동료였던 김장식, 안국선, 유성준, 이원긍, 홍재기 등이 연동교회 교인으로 등록했으며, 민준호, 박승봉, 이준 등 사대부들도 그들과 함께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임 교수는 “연동교회는 대다수 상인들과 장인들이 교인들이었는데 정부 고위직 관료 출신들이 한꺼번에 교인으로 등록한 이후 다양한 계층이 골고루 출석했다. 이는 전통 반상계급이 타파되는 사회 변혁의 선추였다고 본다.”고평가했다.
임 교수는 “1904년 연동교회의 주일예배 출석 인원이 163명이었는데, 1906년에는 평균 500명 정도로 늘었다. 2년 뒤 1908년에는 주일예배 출석 인원이 1,000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1904년에 갖바치 천민 출신인 조사 고찬익이 연동교회 장로로 선출되었다. 그는 1899년 게일을 따라 서울로 왔고, 그 이듬해에 연동교회 조사가 되었고, 그리고 이제 장로로 장립되었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1893년 미국, 호주, 캐나다 장로교회가 각각 조선으로 파송한 선교사들이 ‘장로교공의호’를 결성했으며, 이 나라에서 개혁교회의 신앙과 ‘장로교회의 정치’를 사용하는 단일교단을 세우는데 목적이 있었다.”며 “여기에 장로교 정치 사용이라는 것은 자유, 평등, 공화주의 원래가 있는 대의민주의 정치체제를 가진 장로교 교단을 상정했다. 이것아 조선(대한제국) 장로교회 체제의 밑그림이었다. 그런데 이 체제는 조선(대한제국)의 역사 속에서 아직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것이었다.”고 했다.
▲ 1894년 창립된 연동교회가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대 담임목사 게일 목사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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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00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교인들의 손으로 교회 대표를 뽑는 투표를 실시했는데, 대의민주주의 실행이었다. 선거로 선출된 교인 대표가 김종섭이었으며, 그는 장로에 임직했다.”며 “계속해소 전국 각 지역의 교회에서 선거로 장로가 선출되었다. 1901년부터 조선인 장로가 교회대표로서 장로회공의회에 총대로 참석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1904년 연동교회에서 고찬익이 장로로 선출되어 교인 대표가 되었고, 장로 장립을 받은 것은 조선(대한제국)의 반상 계급사회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며 “천민 출신이 교인 대표인 장로로 선출되어서 계급 철폐의 평등사회를 이루는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했다.
임 교수는 게일이 교육 개혁을 통해 근대 시민의식 고취에 기여했다고 밝혔다.
연동교회는 1904년 8월 24일 독립협회 출신들을 중심으로 ‘국민교육회’가 창립되어 게일이 추구하는 교육계몽운동에 부응했다. 이에 앞서 1901년 게일은 중학교(경신중학교 전신)을 창설하고 새로운 교과과정을 도입했다.
▲ 서울 종로구 연지동(김상옥로 37)에 소재한 연동교회(담임목사 김주용)는 지난 8일 주일 오후 3시 연동교회 본당에서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게일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1900-1905) 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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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01-1902년 중학교에서 가르친 교과목은 조선역사, 서양인물사, 식물학, 일반상식, 수공예, 지리, 산술, 한문, 화학 등이었으며, 수업 받은 학생들은 자연과학 학습을 통해 미신적 생활습성을 버렸다. 또한 학교는 이들에게 인간 개인의 자의식이 형성되게 하고, 과학지식에 기반한 이성적 사고를 훈련시켰다.
1904년에는 물리, 화학, 수학(산술, 대수) 그리고 천문학도 가르쳤다. 이와 함께 한국 정통 사상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김정식과 유성준 등이 한문을 가르쳤다. 이에 학생들이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기 나라 조선에 대한 자의식과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게일은 학생 개개인의 능력 향상과 의식 개혁(=근대성)을 위하여 『牖蒙千字(유몽천자) 』를 집필했다.”며 “서문에서 ‘낡고 뒤쳐진 천자문’을 대처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편찬한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임 교수는 이와 함께 “게일은 여성 인권을 위한 여성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며 “여성교육은 조선 개화파 지식인들의 사회 개혁운동과 맞닿아 있었다.”며 “독립협회가 주관했던 남녀평등, 과부 재가 허용, 조혼 폐지, 축첩폐지, 여아 매매 금지 등의 사회 개혁에 게일과 선교사들의 교육이 상응했다. 게일은 남녀 평등으로 나아가는 남녀가 동등한 교육을 받도록 힘썼다.”고 했다.
임 교수는 게일이 성경의 한글 번역에 공헌을 했다며, 유일신 ‘하ᄂᆞ님’을 ‘하나님’으로 표기하고자했다고 밝혔다.
▲ 1894년 창립된 연동교회가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대 담임목사 게일 목사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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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교수는 “그가 한글의 새 철자법을 고안했는데, 아래 아[ㆍ]를 폐기하고 복모음을 단모으로 바꾸는 것이었다.”며 “이에 따라 ‘하ᄂᆞ님’이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다. 게일은 자신의 철자법을 1902년 9월 장로교공의회에다 보고 겸 제안했다. 개정 철자법이 교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나, 서북지역 교회가 아래 아[ㆍ]자를 폐지하면 지역 방언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철자법을 반대해 결국 1903년 장로회공의회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지난해의 결의를 번복해 개정 철자법은 수용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따라서 성경번역에도 새 용어가 반영되지 못했다.”며 “그러나 비록 게일의 제안이 수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유일신 이해는 수용되었으며, 성경의 하나님을 ‘유일한 크신 분’으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했다.
특히 “성경의 하나님이 조선인의 심성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성경기독교로 정착되게 하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임 교수는 발표를 마치면서“몰락해가는 대한제국기에 연동교회를 담임한 게일은 교회를 부흥케 한 목양에 전념하면서도 이 나라의 소생으 위해 목회했다고 본다.”며 “구체적으로 대의민주주의 정착, 국민교육회 조직, 근대화 신식교육, 그리고 청년운동(YMCA) 등으로 구현되었다. 여기에 여성교육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 서울 종로구 연지동(김상옥로 37)에 소재한 연동교회(담임목사 김주용)는 지난 8일 주일 오후 3시 연동교회 본당에서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게일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1900-1905) 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논찬하는 정병준 서울장신대 교수 ©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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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찬을 맡은 정병준 교수는 “게일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고 대학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고전 언어를 공부했고, 문학, 논리학과 역사, 지리학을 공부했다.”며 “그는 1885년 대학교 2학년 때 프랑스에서 공부했는데 그 때 초교파적 맥콜 선교회에서 도시 공장과 빈민 지역을 선교하는 활동을 했다. 이러한 배경이 선교지의 문화와 언어, 민중 지향성을 중시하는 그의 선교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천로역정 』을 번역 출판하면서 “삽화에서 복장의 변화를 통해 기독교 인식이 성숙해가는 모습을 표현했다.”며 “삽화에는 천민, 일반인, 전투 무관, 상급 무관, 최상층 문인, 왕, 신선의 복장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인식을 고려한 것이었다.”는 박점세의 주장을 인용했다.
정 교수는 게일이 연동교회 담임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891년 8월 31일 PCUSA 선교회로 소속을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혔다.
▲ 서울 종로구 연지동(김상옥로 37)에 소재한 연동교회(담임목사 김주용)는 지난 8일 주일 오후 3시 연동교회 본당에서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이라는 주제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게일의 초창기 담임목회를 중심으로(1900-1905) 한 정기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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