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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심상법 교수] "젊은 날의 영적 멘토”
심상법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신학 명예교수)
 
심상법   기사입력  2023/09/04 [10:10]

한국CCC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CCC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 심상법 교수(총신대 신대원)     ©뉴스파워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어둡고 어둡던 숲

~ 내 젊은 날에 숲

 

그 알 수 없는 나무 사이를 끝없이 헤매며

어두운 숲 사이 날아다니던 시절

저 파란 하늘 한 조각 보고파 울던

그 수많던 시간들을 남긴 채

광야로 저 광야로 광야로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 내 젊은 날에

~ 내 슬픈 날에

~ 그 아름답던 숲

 

김준곤 목사님과의 만남은 1973년 말과 1974년을 잇는 겨울 공화국의 추운 겨울로 시작됩니다. 당시는 위의 노래(양희은의 ’)처럼 사회 전체가 어둡고 어둡던 숲과 같은 혼돈과 방황의 시절이었습니다. 개인의 시간으로 봐도 ‘‘그 알 수 없는 나무 사이를 끝없이 헤매며 어두운 숲 사이로 날아다니던’’ 새처럼 지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저를 신앙으로 인도하셨던 설자 누님은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시기 전에 부산CCC에 저를 위탁하시고 한국을 떠나셨습니다. 비록 시대는 암울하였지만, 그 시대 대다수 젊은이가 보냈던 입시와의 전쟁을 끝내고 대학에서 지내던 시절은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부담과 함께 어두운 젊음을 방황하면서 젊음을 즐기는 시절이었습니다. 저 또한 신설된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1학년에 지내는 동안 전국 각처에서 온 급우들과 함께 동아리를 조직하며 놀았고, 여름에는 미음 맞는 친구들과 여행을 갔고, 탁구부에 가입해 전국 대항 탁구 시합에 나가기도 하며 그럭저럭 젊은 날을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민 가신 누님의 부탁을 받고 나를 찾아와 귀찮게 한 CCC 형제로 말미암아 부산CCC 모임에 할 수 없이 나가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해 말에 정동 채플에서 개최된 CCC 겨울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수련회는 어둡고 어둡던 젊은 날 방황의 숲을 빠져나오게 된 내 신앙의 출애굽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김 목사님은 제 생애에서 신앙의 출애굽을 가능케 해 준 구원자 모세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당시 40대 말의 김 목사님은 어두운 시대 속에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의 허구와 비애를 지적하면서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저와 우리의 실존의 희망이었고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설교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집회는 제 생애 가장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은 사건이었습니다.

 

참된 깃발과 참된 노래와 참된 구호를 상실하였던 그 어두운 시대에 김 목사님의 설교들은 저에게 인생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지금도 저의 뇌리에 각인된 그때의 말씀 중 하나인 ‘‘정신사의 강은 어디로 흐르는가?”는 이후에 프란시스 쉐퍼의 책들이나 다른 기독교 철학자들과 해석학자들의 책들에 의해 더욱더 그 의미가 확장되고 명확해졌으며 이것은 저의 기독교 철학 혹은 철학적 해석학의 골격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 목사님의 민족복음회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열정적 신앙은 지금 한국CCC의 중심된 구호가 된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어둡고 어두웠던 그 시대에 대한 저의 국가적 구원관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겨울 집회를 통해, 특히 김 목사님의 열정적 설교를 통해 중생의 극적인 기쁨을 맛보았고 집회 이후에도 거의 6개월 정도를 어디를 가든지 4영리를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며 불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 CCC에서 배운 4영리 전도 강습은 저에게 전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때의 그 헌신의 시간을 기억하면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이처럼 김 목사님은 나의 신앙에 헌신과 열정의 불을 댕겨 준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때의 김 목사님의 설교는 제 설교의 첫 교과서가 되었는데 그것은 열정과 헌신을 지닌 전도자적 설교였습니다. 이제 저도 50대 초반을 걸으면서 과연 지금의 내가 그때의 김 목사님처럼, 특히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열정과 헌신을 가진 전도자(설교자)로 살 수 있을 것인지 반추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지닌 그런 전도자 말입니다.

 

그때의 집회 이후 저는 부산 CCC 대표순장(1974년부터 1976년까지 3년간 대표순장으로 봉사함)이 되면서 김 목사님과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엑스플로'74를 준비하기 위한 전국 순장 모임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밀한 모임처럼 우리는 민족 복음화의 꿈을 안고, 이곳저곳 다락방과 같은 곳에서 모여 함께 기도하고 민족 복음화와 더 나아가 세계 복음화의 꿈을 나누었습니다.

 

때로는 함께 연쇄 금식기도회를 하였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도의 불은 엑스플로'74 대회뿐 아니라 '80 세계 복음화대회를 지나 CCC의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된 사역(원단 금식기도회)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때 김 목사님을 통해 배웠던 기도는 제 신앙과 목회의 골격과 품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와 성령보다 앞서지 말자라는 김 목사님의 구호는 지금도 여전히 제 신앙의 핏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압니다.

 

집회를 위해 언제나 먼저 기도로 함께 준비하시는 김 목사님의 모습은 그 후에 전도사가 되어 대학부를 지도하는 저에게 명확한 목회 교범이 되었고 기도를 통해 준비된 대학부 겨울수련회나 여름수련회는 언제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은혜로운 집회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미국 유학 중에 김 목사님을 만나 미주 CCC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줄리아드 찬양 팀이 찬양하는 시간에 뒤에서 저와 함께 앉아 계셨던 김 목사님. 찬양팀의 찬양을 들으면서 몸을 가볍게 흔들며 집회를 위해 기도하시는 김 목사님의 모습을 곁에서 훔쳐보면서 다시 한번 기도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집회를 위하여 집회 전에 간사님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기도하시던 김 목사님은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는 그의 구호처럼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이처럼 김 목사님은 저의 신앙과 목회의 기본 품새를 가르쳐 준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저에게 설교학을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기도 합니다. 김 목사님의 설교는 언제나 알아듣기 쉬운 일상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때로는 열변을 토하며 설교하셨고, 때론 구수한 이야기꾼으로 말씀하실 때 우리는 시가인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언젠가 심천 미루나무 섬에서 불이 다 꺼진 칠흑 같은 밤에 밤벌레도 숨을 죽인 재진행된 그 날밤의 설교는 저의 젊은 영혼에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달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모두 함께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회에 대한 거룩한 복음의 모의(謀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후배들을 데리고 거지 순례를 떠났던 일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 여름밤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김 목사님은 한국 역사의 질고와 아픔을 지닌 한 많은 소리꾼처럼 설교하셨고, 또한 구수한 이야기꾼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한이 서려 있으면서도 확신과 희망에 찬 설교였고 언제나 헌신된 기름으로 불붙는 설교였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고스란히 저의 설교의 품새로 형성이 되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를 주면 김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일제의 수탈과 해방, 그리고 6·25의 한 많은 민족의 상흔과 질곡을 거친 김 목사님의 생애가 민족 복음화를 태동하게 된 신앙적 배경이었다는 것을 자주 들었던 저에게 과연 조국을 위해 신앙인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점은 12년간의 미국과 남아공에서 유학하면서 마음속에 되새김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선진 미국을 보고 그들의 기독교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관찰하면서 한국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정책) 이후 남아공 신학자들이 국가 재건(진실과 화해를 통한 국가 재건)을 위해 모여 진지하게 논의하였던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조국의 민주화와 함께 선진 기독교 국가(사회)의 재건과 변혁을 위해 나는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과 같이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닦아 놓은 민족 복음화의 터 위에서 후배인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점은 제가 CCC 특히 김 목사님의 생애를 통하여 생각하게 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군사독재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나타난 이념적(남과 북)지역적(동과 서), 계층적, 세대 적 갈등이 첨예한 현시점에서 기독교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하는 점은 역사적 질곡을 거친 김 목사님의 생애가 민족 복음화를 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 다음 세대를 이어가야 할 신앙인인 제 가슴속에 지속해서 반추되었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와 민족, 아니 더 나아가 한국 사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하는 점을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은 제가 김 목사님을 만남으로써 생각하게 된 끈질긴 화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김 목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들이 닦아 놓은 한국 기독교의 기초 위에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건설하고 장식해야 할 책임 이 이제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책임을 맡은 다음 세대의 기독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한국 민족(사회)과 기독교라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계기는 바로 김 목사님과의 만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학자로서 다시 조국에 돌아와서 미래의 목회자들을 키우는 신학교에서 사역하고 있는 저에게 영적 멘토(mento)셨던 김 목사님의 생애는 음으로나 양으로나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민족과 사회 앞에서 남은 15~20여 년의 공적 삶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내야 할지를 반추하며 다시 한번 현재의 역사 앞에서 숙연해집니다. 과연 신앙의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선교 2세기를 맞이하며 미래의 목회자를 키우는 가르침의 사역을 하는 저에게 김 목사님은 일종의 커다란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때의 암울했던 조국의 현실 속에서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구호와 기치 아래 젊은이들을 복음의 일군으로 일깨웠던 삶이 지금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어떤 구호와 깃발과 노래로 그들을 일깨울 것인가, 아니 이제는 그때처럼 힘찬 구호나 흔들 깃발이나 부를 노래가 없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드는 그러한 운동은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변화의 파고(波高) 속에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16)으로 자리를 잡아 심령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개혁하는 물결이 되도록 말입니다.

이제는 더욱 알찬 복음의 내실이 가득한 기독교를 꿈꾸어 봅니다. 나뉨보다는 나눔이 있는 기독교, 영적 방종과 요란함이 가득한 들뜬 기독교가 아니라 정절과 거룩함과 형제 사랑이 있는 성숙한 기독교, 자유와 권리 주장이 앞서는 이기적인 기독교보다는 절제와 섬김과 희생이 있는 이타적 기독교, 성령의 나타남만이 있는 기독교보다도 성령의 세움이 있는 기독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선교 2세기에는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의 꿈과 함께 진정한 예수 믿음이, 예수 따름이, 예수 닮음이가 가득 한성서 한국의 꿈을 꾸어봅니다.

 

끝으로 김 목사님의 지난 사역을 반추하며 지금의 저의 사역의 방향을 다듬어봅니다. 제 신앙과 사역의 여정에 하나님은 김준곤 목사님을 선물(gabe)로 주셔서 제가 가야 할 신앙의 길과 사역의 방향을 알려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411~16, 특히 11~12절의 말씀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김준곤 목사님, 사랑합니다. 건강하시고 마지막까지 더욱 아름다운 사표(師表)로 남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심상법 교수는 부산 부전교회에서 자라 CCC에서 훈련을 받고 부산대 기계설계학과를 졸업(1977)한 후,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도미(渡美)하여 미국 비브리칼신학대학원(BTS)에서 신학석사(STM)와 남아공 스텔렌보쉬(Stellenbosch) 대학교에서 신학박사(Th. D) 학위를 취득하였다.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로 부임하여 경건훈련원 원장과 기획실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복음주의신학회(KETS) 부회장으로 섬기고 있으며, 또한 성품 교육에 강조를 둔 기독교 대안교육 국제학교(CSIS) 이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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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9/04 [10:10]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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