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주년의 그림자와 빛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 70주년 되는 날이다. 북한은 해마다 이 날에 어김없이 거창하고 요란한 전승절 행사를 벌이고 남한은 6.25전쟁의 상흔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심리전을 가동시킨다. 지난 70년 동안 남북한은 다시는 타방의 공격에 멸망당하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이며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지 못한 채 정전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정전체제 70년이 우리 겨레 모두에게 끼친 피해와 손상은 가혹하다. 첫째, 남북한 공히 군사국가가 되었고 국방비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해 오고 있다. 남한은 재래식 국방력 6위권 군사강국이 되었고 북한은 재래식 국방력의 열세를 만회하는 핵무력으로 무장한 핵보유국가로 자임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남북한 적대적 대치는 북한의 병영국가화와 장기간에 걸친 인권탄압을 초래했고,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오랫동안 저해했다. 남한의 남남이념 갈등은 분단체제가 초래한 전근대적 고질병이다. 셋째, 북한의 핵무장으로 재래식 남북간 군사충돌 가능성은 줄어들었을는지 몰라도, 한반도는 국지적 핵전쟁 발발 가능지역으로 운위되고 있다. 며칠 전 미국 합참의장이 지적한 것처럼, 한반도는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극도의 적의가 감도는 전쟁터이다. 이런 전쟁촉발적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한반도 상황은 남북한 각각을 병들고 황량한 전장터처럼 몰아가고 있다. 북한은 사상 최악의 독재국가요 인권 파괴적 불량국가로 낙인이 찍혔고, 남한은 극도의 생존경쟁과 각축으로 자살율 1위, 출산율 최하위 국가라는 수치를 자초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불완전해 보이는 정전체제가 지난 70년간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의 발전에 전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다. 남북한은 각각 분단체제의 수동적 희생자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이 파도를 뛰어넘는 응전을 감행해 왔다. 남북한은 한국전쟁의 피해자였지만 그 역사적 재앙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지 않았으며, 적대적 분단체제에 대하여 창의적으로 응전해 왔기 때문이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정체성을 수호하여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동참했다. 북한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는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 끝내 핵무장국가로 발돋움함으로써 재래식 전쟁이 한반도에 돌발하는 것을 억제하는 레버러지를 확보했다고 호언하고 있다. 남북한은 러시아와 미국과 중국과 일본, 초강대국 네 나라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해서 머리를 맞대게 하는 이해당사자국이다. 남북한은 태평양으로 나가려고 하는 일대일로의 중국과 태평양을 봉쇄하려고 하는 미국 사이를 오가며 양강의 예각적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완충국가적 열쇠국가(key state)가 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지난 정전체제 70년은 한국전쟁의 두 주축 당사자국인 미국과 중국의 평화협정 체결 방해공작에 일방적으로 당한 역사라고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의 분단 조국은 분단된 채, 단일정부가 들어섰을 때 직면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국제정치적 딜레마를 지혜롭게 처리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친일-반러파 주일 청나라 외교관인 황준헌은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홍집을 통해 고종에게 건네진 <조선책략>(1880년)에서, 조선이 처한 외교적 곤경을 헤쳐나갈 책략을 나름대로 제시했다. 그는 여기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과 대륙으로 북진하려는 일본 사이에 낀 조선의 처지를 주목했다. 그는 조선 조야의 지도층에게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미국(連美國)하고 반(反)러하는 생존전략을 찾으라고 충고했다. 황준헌의 책략의 적실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약소국이 엄혹한 국제관계에서 섣부른 독립자주국가 행세하다가 국난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관계는 우주적 중력이 작용하는 중력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안정된 우주에는 항성과 행성의 질서잡힌 군무(群舞)가 펼쳐지고 있다. 질서잡힌 군무는 항성과 행성의 중력과 질량의 비대칭성과 차이 때문에 가능하다. 어떤 행성도 항성이 만들어내는 중력 궤도를 임의로 이탈하지 못한다. 항성 태양이 여덟 개의 행성을 거느리는 이 우주적 군무는 태양과 행성들 사이의 중력과 질량 차이가 만든 조화이다. 19세기 조선은 압도적 질량과 중력을 가진 중국항성권과 신흥대국으로 부상하는 일본 항성권의 경합적 중력장에 노출되어 있었다. 19세기 조선의 비극은 두 개의 항성권 국가의 대결에 끝내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 조국을 이 문제로부터 70년 동안 자유롭게 해줬다. 친중적 북한과 친미적 남한은 두 개의 다른 항성 궤도를 역할분담하듯이 돌았기 때문에 19세기 말 조선의 비극을 답습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지난 세기 이념 냉전시대가 촉발시킨 전쟁으로 한반도를 두 개의 중력장에 적응할 수 있는 분단국가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정전체제는 중국이나 미국의 단일 항성권 중력에 따라 돌도록 요구받는 단일국가 대신 분단국가를 만들어냈다. 이 분단체제를 견인하는 정전체제는 불완전하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평화를 만들고 있다. 지난 세기의 파란만장한 분단사를 되돌아볼 때, 한반도를 상시적인 전쟁상황에 묶어두려는 미국과 중국의 압도적 의지 때문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반도에 단일통일정부가 들어섰을 때 발생하게 되었을 단일항성권 편입사태라는 재앙을 정전체제가 나름대로 예방해 왔던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21세기 상황이 과연 근본적으로 19세기 조선의 처지와 다른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특히 남한의 사정이 그렇다. 남한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하고 안보군사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곡예를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지금 미중 패권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친중(親中)이냐 결미(結美)-연일(連日)이냐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 남한의 역대정부는 이 적대적 분단 정전체제 아래서도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려고 발분해 왔다. 역대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가 급격한 미국-일본의 항성권 중력에 급격하게 흡수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 깨어있는 시민들의 우려와 탄식을 자아낸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로서 한국교회의 중보자적 위상이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멀고 먼 평화-개신교 근본주의와 멸공응징적 6.25전쟁 기억법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올해 6월 한국전쟁 발발 74주년에도 한국교회 대부분은 멸공적 북한응징적 한국전쟁 회고에 몰두했다. 최근에 파주의 충만한 교회 임다윗 목사는 한국전쟁 기념설교 자리에서 멸공적 기세만으로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한국교회를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이 피의 소리에 침묵하며 6·25전쟁 70년을 보내고 이제 정전 70년을 또 뜻 없이 보내고 있다. 한반도 전역에 피의 호소와 아우성으로 가득하건만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올해 6·25전쟁 73년을 보내면서 ‘6·25의 노래’를 불렀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한반도는 아직도 통곡하며 탄식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호전적인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제2의 비극을 잉태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씹어 볼 일이다”(국민일보 23년 7월 22일 기사: 윤중식, “정전 70년 뜻 없이 보낼 것인가… 피뿌림의 역사 종식 고해야”). 임다윗 목사의 개탄처럼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공산주의 정권을 절대 근본악이라고 간주하며 멸절하기까지 승리하려고 기도하고 있다. 세계역사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는 근본주의 종말론으로 무장한 일부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 전통과 체험적 반공주의를 안고 월남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의 신앙 기상이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 영향 아래서 한국교회는 놀랍게도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회담 자체를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기간은 불과 10개월에 불과했고 51년 가을부터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한국교회는 1951년 부산에서 열린 한국 신도대회 명의로 휴전회담 반대 궐기 대회를 개최한 이후로 1953년 휴전회담 타결 때까지 격렬하게 휴전을 반대했다. 특히 서북지역 월남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한경직 목사와 한국교회협의회(KNCC)는 세계교회와 미국교회, 그리고 한국정부 등과 갈등하면서까지 휴전회담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기독교구국회, 기독의용대, 선무공작대원,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 재건연구위원회 조직 및 전쟁구호사업 등을 주도하던 KNCC는 전쟁을 통해 비약적으로 지도력을 신장시킨 후에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미국 정부의 휴전 움직임에도 격렬하게 반대하며 비현실적인 북진통일을 외쳤다.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에는 유엔이 즉각 나설 것을 촉구하였던 WCC는, 전쟁이 지속적으로 격화되고 미군과 연합군 병사들의 희생이 커지자 오히려 휴전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미국교회 협의회(NCC) 지도자들도 WCC와 보조를 맞춰 51년 12월 5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원자탄 사용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미국의 평화옹호적 목회자들과 시민들의 휴전 청원 노력에 대해 분노한 서북지방 출신의 월남 기독교인들은 북한 공산당을 요한계시록 12-20장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싸우는 ‘붉은 용’이라고 간주하며 멸공을 외쳤다. 그들은 한 때 이승만 정권과 보조를 맞춰, 한국전쟁을 확전시키고자 하는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시킨 트루먼 대통령 결정 배후에 친공세력인 WCC가 있다고 보고 WCC를 즉각 친공단체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 오도된 열정의 배후에는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자 칼 매킨타이어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한국교회(KNCC)가 휴전회담을 반대한 배경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근본주의적 종말론으로 무장된 재한 선교사들의 휴전회담 반대이다. 둘째, KNCC 주도세력인 서북지역 월남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 체험이었다. 이처럼 한국교회 주류에는 한국전쟁의 휴전마저도 아예 반대한 멸공적 기상으로 충천한 신앙흐름이 있다. 오늘날 태극기 부대는 이런 신앙흐름의 연장에 있다. 이들이 보기에는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논하는 역대 진보정권들 자체가 북한 정권만큼이나 혐오스럽다. 이들에게는 북한과의 공존을 전제하는 어떤 대북정책이나 대북평화협정 체결 시도도 악하게 보인다. 이런 극단주의는 텅 빈 광장을 일시에 장악하는 군중적 야생력에 의해 견인된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다수파를 차지하더라도 이 멸공적 승리주의 신앙기상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평화의 복음이 결여되어 있다. 일찍이 평화학을 개창한 요한 갈퉁은 평화구축의 집요한 장애물로 극단적인 이원론적 우주관에 지지를 받는 종교적 폭력을 지적했다. 갈퉁에 따르면, 종교적 폭력은 DMA(Dichotomization, Manicheism, Armaggeddon) 신드롬이다. 선악 극단 이원론, 역사를 선악의 대결로 보는 마니교적 이원론, 그리고 아마겟돈 전쟁수행 의식이 종교적 폭력의 연료가 된다는 것이다. 멸공적이고 대북응징적인 한국전쟁 기억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들어설 여지를 축소하거나 배척할 수가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원수된 죄인들에게 독생자를 내어주심으로 세상과 자신을 화목케 하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에 진노하시지만, 그 진노의 극한에서 긍휼로 돌이키는 자기반전을 감행하시는 자기반전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호 11:10-11; 사 57:15-17).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기부인적, 자기반전적인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적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 연단과 훈육의 기간이 끝나면 하나님의 소생과 위로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징계와 연단의 시간이 다하면, 우리 조국은 하나님의 쓰임새에 최적화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맛본 전쟁상황이 시효가 다하면 평화와 화해의 대각성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어리석은 과거를 질타하는 대화목과 평화의 마음이 대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남북한의 적대심이 극에 달한 느낌이 드는 날들이 빈번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대마저도 야유를 받는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이 잦아지고, 이에 질세라 한미 동맹도 부산하게 움직인다. 부산에 입항한 미국 핵잠수함과 한반도에 수시로 전개될 전략자산 등 핵무력의 균형으로 한반도는 아슬아슬하게 평화를 유지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실로 남북의 적개심은 이제 결승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민족전멸의 핵전쟁 참화가 현실이 될 것 같다. 이 위태로운 절벽에서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며 마술피리를 불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절망만이 유일한 선택지이다. 정의와 공의,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 하나님 보좌에 좌정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할 자유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한반도가 핵전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실 최후보루이시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모든 세계 만민들과 족속의 이름을 불러가며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궤도를 따라 돌아야 할 진리의 항성이시다. 한국교회는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를 따라 도는 행성이 됨으로써 한반도를 핵전쟁의 참화 시나리오로부터 예인해 갈 수 있다.
복되도다! 화평케 하는 자들이여!
한국전쟁은 평화를 불러내는 기억이 될 수 있는가? 한국전쟁의 기억이 평화를 불러내는 ‘변혁적 기억’이 되려면 신학적인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그것은 분단체제의 파괴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심오한 애휼심으로 나타난다. 분단체제의 희생자들에 대한 애타는 마음이 신학적 성찰의 요체이다. 이런 화평의 마음 대신에 멸공적 승리주의, 멸공응징주의적 기상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요한계시록 12-20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의 전사라고 자임한다. 이런 기상이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인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런 요한계시록 읽기를 교정하는 책이 마이클 고먼(Michael Gorman)의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Reading Revelation Responsibly)>이다. 마이클 고먼과 워렌 카터(284-285쪽)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에서의 전쟁수단은 폭력이 아니라 죽은 이로부터 나오는 계시와 설득과 심판의 말씀이다(285쪽). “하나님 백성은 제국을 폭력으로 뒤엎는 게 아니라 비폭력과 신실한 삶으로 맞서라는 요구를 받았다”(286쪽). “하나님의 어린 양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우시되 자신이 흘린 피로 싸우지 적의 피를 흘리는 칼로 싸우지 않는다. 말씀의 검으로 이기신다”(293쪽). 요한계시록의 종말전쟁에서 중요한 원리는, 자기희생적 평화로 악을 이긴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평화담론은 자기희생, 선제적 희생에서 시작된다.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과거지사가 아니라 평화로운 한국, 정의로운 한국을 건설하라고 하는 아우성이다. 정의와 평화를 정착시킨 결과로 한국전쟁이 창조적으로 종결된다면 그 전쟁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분들의 죽음을 의미있게 기리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전쟁의 악몽을 초극하는 평화가 한반도와 그 주변을 지배하는 것이다.
*한반도평화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