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CCC 63년의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CCC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 서울대 나사렛형제들 윤여표 청장(식품의약품안전청) ©뉴스파워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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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목사님을 뵌 것은 1977년 제가 서울대학교 2학년 학생 때였습니다. 1986년 박사학위를 끝내고 충북대학교 약학대학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 꼭 10년을 정동 채플에서 목사님에게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저는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으며, CCC는 저의 생명의 모태이며 삶의 보람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CCC가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제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목사님과 CCC와의 만남이라고 감히 고백합니다. 또한 목사님을 통해서 이 땅의 수많은 젊은 지성인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한 엄청난 역사를 생각하며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저는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부정적인 이미지와 생각하고 있있으며, 주위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적고 저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믿음을 가질 기회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중학교를 불교(조계종)재단의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매주 불교 교리에 대해서 배우게 되다 보니 불교의 철학적인 면이 어린 저의 마음을 끌게 되었고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매주 절에 가서 불교학생회 예식(참선, 염불, 설법)에 참석했고, 방학 중에는 수련회를 통하여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찾아간 곳이 ‘서울대 총불교 학생회’였으며,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철학과 불교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 2학년 때 같은 학과 친구를 통해서 4영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동 CCC 채플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목사님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주 정동 CCC 채플에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성경 강해와 10단계 성경 공부를 통해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기독교와 불교와 세상 사이에서 6개월 가까이 방황하게 되었는데, 1978년 심천 미루나무 섬 CCC 여름 천막 수련회에 참석하여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밤 심천 모래사장에서의 밤 집회, 칠흑같이 깜깜한 가운데 별빛만 찬란한 밤, 마이크를 통해서 목사님의 메시지만 들리는 그날 밤, 목사님의 초청 메시지에 오만했던 자아와 아집이 깨지면서 저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영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날 밤,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며 소나기가 내렸으며, 엄청난 비를 맞으며 눈물로 회개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날 밤 제 인생의 BC와 AD가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불교와 세상 철학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지만 찾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졌고 의문과 미궁 속에서 혼란스러웠는데, 예수님은 매우 쉽고 명쾌하게 목사님을 통해서 말씀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가야 할 길(Way)이요, 찾고 있는 진리(Truth)요, 소유해야 할 생명(Life)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교만과 무지를 회개했습니다. 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살아가던 것에서 예수님을 믿고 통하는 자세로 바뀌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이 번민과 속박에서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이웃과 국가에 관심을 두게 되었으며, 사람과 사물들이 사랑스럽고 대화하고 싶은 마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0여 년 동안 정동 CCC 채플을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고 성경 강해와 10단계 성경 공부를 통해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또한 매년 여름수련회를 통해서 농도 깊은 신앙훈련과 민족(학원) 복음회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고, 거지 순례 전도를 통해서 인생의 제로 체험하였으며 믿음의 신앙생활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원단 금식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며 깊이 있는 기도를 배웠습니다.
1986년, 저는 충북대학교 약학대학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같은 해 우리 대학에 기독교교수회가 만들어졌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150여 기독 교수가 학원 복음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청주 시내 기독 교수 연합회를 조직하여 연합사역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CCC 지도교수와 청주 CCC 이사장으로 섬기며, 환경보전연구회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경실련 등 각종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과학회 이사 겸 충북지부장을 맡아 교회와 학교, 각종 모임에서 ‘창조론 강의’를 통해서 복음 전파에 쓰임 받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은 목사님을 통해서 받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민족(캠퍼스) 복음화에 대한 꿈(vision)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대학생들을 깨우는 사역뿐만 아니라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에 일생을 헌신하셨습니다. 엑스플로‘74와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 그리고 크고 작은 수많은 집회가 생각납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는 지금도 저의 생각 속에 흐르고 있는 구호들입니다.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는 당시 계엄 아래에서 수백만이 모이는 대형 집회였는데, 저는 서울대 대학원 재학 중에 협동 간사로 섬기면서 수만 명 모이는 국제 대학생 합숙 수련회 시설을 담당하였습니다. 여의도 근처 50여 개 초· 중 · 고등학교를 빌렸으며, 교실 바닥에 상자를 깔아서 숙소로 사용하게 하는 엄청난 시설 관리를 맡아서 진행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동안 저에게 맡겨진 크고 작은 일들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고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중요하게 기억되는 일 중 하나는, '80 세계 복음화 성회 마지막 날 목사님께서 10만 명의 선교 헌신자를 초청했는데 저 자신도 일어서서 선교 헌신을 했던 일입니다. 뚜렷한 소명감을 가지고 일어서지는 않았지만 지금 선교사적 소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때의 선교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수많은 선교사와 선교사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그때의 헌신으로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듣게 됩니다. 목사님의 선교 지향적인 삶과 역할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쳤는지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30년가량 목사님에게서 말씀을 배우고 양육 받으며 사역에 동참하면서 저는 목사님을 ‘하나님의 사람, 꿈꾸는 지도자’라고 감히 표현하고 싶습니다. 성경 인물로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과 지도자 모세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큰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사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100퍼센트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의 삶을 평생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그렇게 크고 위대하게 지속해서 사용하셨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목사님은 청년 대학생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이들에게 비전(꿈)을 심어 주는 강렬한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에서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세계를 품는 마음으로 넓혀 주셨습니다. 생산 예산의 개념과 그리스도인의 백사만사는 믿음으로 된다는 것, 사람을 동원하는 방법을 체득한 것 등은 모두 저에게 커다란 영적 자원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모습 중에서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것 하나는 목사님께서 메모장(작고 허름한 스프링 수첩)을 지니고 다니시면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셨던 모습입니다. 저는 위대한 아이디어와 메시지가 이런 훌륭한 모습에서 창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하나님께 묻어 버리고, 미래는 주님께 맡기고, 오늘은 성령 안에서 살자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자.’라는 목사님의 말씀들이 저의 삶의 지표가 되어 왔습니다. 지나온 저의 삶을 되돌아보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이 지금까지의 제 삶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주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영적 흐름을 주도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저의 모습은 목사님의 영향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사님의 생애 위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욱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윤여표 총장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1986년 충북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한 이후 약학대학 학장, 약품자원개발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 청장과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2014년 제20대 충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후 2021년 제9대 대전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