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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김장환 목사] “민족복음화운동에 신명을 바치신 분”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 목사, 세계침례교회연맹(BWA) 직전 총회장
 
김장환   기사입력  2023/03/02 [09:45]

한국CCC 63년의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CCC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 김장환 목사     ©극동방송 제공



김준곤 목사님 하면 민족 복음화 운동에 신명을 바치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전도, 육성, 훈련, 파송을 목적으로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하여 대학생 운동을 민족 복음화 운동이라는 대중운동으로까지 승화시키고, 평생을 외길로 대학생 복음화와 민족 복음화, 그리고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누구나 CCC 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전도 운동하는, 사람을 키워내는 선교 기관으로 생각하고 CCC 출신하면 전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느꼈습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지난 19748월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된 엑스플로 '74 대회, 백만 명이 넘게 모인 성도들이 외친 표어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당시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10만여 성도 중 지금 해외선교사로 나간 분들이 여럿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유독 성시화란 말을 좋아하셨던 분입니다. 대전 성시화 운동, 춘천 성시화 운동 등 성시화 집회를 이끌어 오시던 경험을 가지고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가 대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신 후 힘을 얻어 민족 복음화 운동으로 엑스플로 '74를 개최하셨습니다. 1980년에는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 1995년에는 '95 세계선교대회를 통해, 한국 교회의 제자화 운동과 영적 부흥에 이바지해 한국기독교 인구 천만 명이 넘는, 인구비례로 25퍼센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장에 일조하셨다고 생각합니다.

 

1966년에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창설하시어 오늘날의 국가조찬기도회의 기틀을 마련하셨고, 국제 CCC를 통한 선교의 세계화에 앞장을 서셨고 숱한 대형 집회의 주 강사로 나서서 외친 성령 폭발, 복음화의 열정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엑스플로 '74를 준비하면서 김 목사님은 모 일간지에 예수 칼럼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오랫동안 게재해서 명칼럼니스트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가끔 저는 김 목사님을 보고 시인이나 문필가가 되셨어야 할 분이 목사가 되셨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도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대집회를 주관하며 이끄실 때 보면 창의적 아이디어가 샘 솟듯 하시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실 때는 꼭 군대 사령관 같아 보이시고, 심약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이 길러낸 제자들을 흔히 나사렛형제들이라고 말하더군요. 이분들은 CCC가 어려울 때면 어김없이 나서서 방패막이가 되었고, 이분들 중 목사가 되어 한국 교계의 중진·선진 목사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제자 목사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평신도 사역자로 각계에서 알려진 분들의 면모만 보아도 김 목사님의 지금까지의 사역을 알 수 있을 겁니다.

 

70년대 초 김 목사님은 사랑방 운동을 통해 수없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성하셨고, 기독교에 대해서 척박한 한국 신문과 방송에 대형 광고를 통해, CM 혹은 CF를 통해 기독교적 언어가 스스럼없이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기독교와 언론과의 다리를 놓아준 역할도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를 배경음악으로 한 방송광고가 지금도 교계 행사의 방송· TV 광고에 단골로 쓰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순론이란 김 목사님의 사역 이론은 오늘날 셀 교회(Cell Church)의 전선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제가 몸담은 아세아방송(현 제주 극동방송)과 극동방송을 통해 방송된 설교는 명설교로 청취자들의 마음을 붙잡아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1973년 제가 아세아방송 운영이사장으로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막 방송을 시작한 무렵이었습니다. 방송 사옥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김준곤 목사님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대학생선교회(CCC) 정동 사옥 7층의 방 세 개를 무상으로 대여해 주셔서 급한 불을 끄게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대학생선교회는 엑스플로'74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대회의 홍보와 동시통역 시설 등의 기술을 협조하는 조건으로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입니다.

 

김 목사님이 엑스플로 '74를 준비하시면서 집회 장소로 여의도광장을 당국에 신청했으나 거부당하셨습니다. 당시는 군사정권으로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 데모로 이어질 염려가 있어 여의도광장 사용허락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다급해진 김 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당시 안기부의 판기국장이셨던 김영광 님이 우리 학교 선배이셔서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김 목사님을 모시고 면회하러 가서 집회에 관해 설명을 했습니다. 결국 선배님을 통해 여의도광장의 사용 허가받을 수 있도록 관계기관에 협조받아서 엑스플로'74가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은 감추어진 이야기기도 합니다.

 

김 목사님이 지금껏 살아오시는 동안 공과(功過)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보다는 공()이 많은 분으로, 교계의 어른으로 존경받고 계십니다. 저도 한국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향한 복음의 현장에서 이렇게 저렇게 만나 협력하면서 상호 한길을 걸어온 선배로서 또한 동역자로서 김 목사님을 존경하고 미력이나마 도움을 원하실 때 주저 없이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며 김준곤 목사님께서 더욱 건강하시고 남북이 통일되는 환희를 반드시 맛보시기를 기원해 드립니다.

 

아마 한국기독교 발전사에 한국대학생선교회와 김준곤 목사님의 민족 복음화 운동 및 제자화 운동과 영적 부흥 운동이 끼친 영향은 후세 기독교 사가들이 한국의 기독교 발전사에 공헌한 사건, 사역들로 한 면을 기쁘게 장식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는 극동방송 이사장이며, 수원중앙침례교회의 원로 목사, 세계 침례교회 연맹(BWA) 직전 총회장으로서, 미국 밥존스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원과 사우스 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달라스 신학대학원, 그 외 여러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한민국과 캄보디아에서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수도 침례신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김장환 목사는 한국 십대선교회(YFC) 이사장과 세계 각 전도대회의 주 강사, 방송 진행자(극동방송 만나고 싶은 사람들”) 등 중책을 맡아 하나님이 명하신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30여 권의 저서가 있으며, 그 가운데 한국기독교출판협회(KCPA) 우수도서로 선정된 도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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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3/02 [09:45]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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