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석 박사(장신대 역사신학 박사)가 지난 14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10회 발표회에서 “해방정국기 한경직의 건국신학 연구: 전도입국론을 중심으로”한 주제발표에서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설립자, 1902.12.29.-2000.4.19)의 전도입국론은 남북 분단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이날 발표에서 “한경직은 해방정국에서 새로이 건설될 나라는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방책으로 전도를 통한 건국론을 펼쳤다.”고 밝혔다.
이어 “한경직은 교회는 당회라는 기구가 상징하듯이 대의민주제로 운영되는데, 따라서 교회가 많아질수록 그 안에서 훈련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서 나라 역시 점진적으로 민주화가 될 것으로 본 것”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해방정국 당시에 새로이 세워질 나라의 정체가 될만한 후보군으로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비롯해 기독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역사 공존하고 있었다.”며 “이 가운데 한경직은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야말로 최선이라고 여긴 반면 공산주의를 국가와 교회의 적으로 지목했다.”고 밝혔다.
특히 “해방정국에서 한경직의 기독교 민주주의의 선택과 공산주의 배제는 서북청년단을 추동할만큼 강력한 신학적 담론으로 기능했다.”며 “이는 장차 장로교회라는 교단 차원의 신학을 넘어 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국가관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박사는 “한 목사가 전도입국론을 형성할 수 있었던 데는 1902년 평안남도 평원 간리에서 출생해 어려서부터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는 1세대에 속한다.”는 점과 “더욱이 기독교이능로 자랐기 때문에 성리학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지적성장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민족적 배경과 신학적 배경을 분석했다.
먼저 민족적 배경으로는 서북지역의 기독교 민족주의를 온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던 오산학교에 진학해 3년 간 중등과정을 수학한 것으로 꼽았다. 특히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과 교장인 고당 조만식을 만난 이후 두 스승을 일평생 추앙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 두 사람은 서북 지역의 실력양성론을 대표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로서 개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교육입국을 꿈꾸던 지도자들이었다.
한 목사는 이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학에 진학해 민족보다 교회를 앞세우는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고 스승인 블레어(방위량)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엠포리아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 등을 배우며 신학에 입문하기 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충실히 쌓은 후 이듬해에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한 목사는 교회사를 더 전공하기 위해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폐결핵에 걸려 결국 고국에 돌아와 목회를 할 결심을 하고 귀국했다.
1932년 귀국한 한 목사는 스승인 조만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다가 1933년 신의주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를 했다. 그러던 중 고등비평을 수용한 주석서인 <아빙돈 성경주석>의 번역자로 일했다는 이유로 장로교 총회와 한 차례 불화를 겪었다.
또한 건강상의 우려로 일제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것에 동조했으며, 이후 일제에 의해 신의주제2교회 담임목사직에서 강제 사임을 당한 뒤 교회에서 설립한 보육시설인 보린원에 들어가 원생들과 함께 생활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김 박사는 “해방 직후 한경직은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에서 일하던 중 소련군이 주둔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공산당에 대적할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의 위협을 피하고자 9월 말에 월남하게 된다.”며 “ 한경직이 월남한 시점이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통해 벌인 활동 내용과 기간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박사는 “한 목사는 해방정국에서 건국운동을 활발하게 벌인 기독교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사회민주당 창당은 윤하영이 주도했다.”며 “또한 당 강령은 이유필이 작성한 것에 비해 한경직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은 점이다. 따라서 한경직을 기독교 건국운동가로 보는 관점을 다소 과장된 해석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기독교 사회민주당 강령 가운데 토지 및 주요 산업시설 국유화 정책은 사회주의 정책이 아니라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에게서 기원하고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정책이라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 목사는 월남 직후 미군정에서 통번역일을 하면서 친구 김재준과 함께 서울 시내에 산재되어 있는 敵産(적산) 중 하나인 천리교의 재산을 불하받아 조선신학교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목회의 자리에 우선한 한 목사는 조선신학교 여자기숙사가 있던 자리인 영락정에서 월남한 이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해 오늘날 영락교회를 일구게 됐다.
김 박사는 “한경직은 자신이 미국 유학시 경험한 기독교적 민주주의야말로 장차 한반도에 정착시켜야 할 최적의 제도라고 확신했다.”며 “한경직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은 조국에서 교회만이 이 과업을 가능케 할 수 있다고 봤다. ‘전도가 곧 최대의 정치운동’이라는 명제는 이렇게 탄생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한 목사는 사회주의에서 무신론적 유물론과 폭력적인 수단만 제외한다면 기독교 사회주의로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고 언급했다는 점이다. 김 박사는 “하지만 이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해방정국 당대에 공산주의와의 친밀성을 우려해 한경직은 기독교 사회주의마저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한경직은 공산주의를 “묵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이라고 지목하며 적그리스도화하여 신학적 실체로 명명했다는 것.
김 박사는 “해방 정국 당대의 건국 방식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자택일의 대결구도로 전개되었던 것은 맞지만 과연 한경직의 이러한 언명이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바른 판단이었는지는 오늘날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한경직이 교회를 보호하고 진작시킬 수 있는 체제는 민주주의만이 유일하다고 판단해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는 한편 공산주의를 계시록에 등장하는 붉은 용으로 지목해 체제로서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배제했다고 했다.
이어 “이에 한경직은 전도를 통해 건국운동을 일으키자며 대의민주제로 운영되는 교회가 많아져야만 나라 역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국가로 확립될 수 있다는 내용의 전도입국론을 주창하게 된다.”고 밝혔다.
또한 “전도입국론의 방법론은 일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나라의 독립과 발전에 기여하자는 서북지역 실력양성론에서 영향 받은 것이고 점진적인 개혁론과 더불어 숭실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학습한 전도훈련과 가시적 교회론의 영향이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며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면서 한경직이 제시한 기독교가 근간이 된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던 창사진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1960년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막을 내리며 대한민국의 첫 정부가 기독교적 가치관을 담지한 것이 아니요 민주주의를 지향한 것도 아니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고 했다.
그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을 접하며 한경직의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론과 전도입국론이라는 방법은 신학적으로 타당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재고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방정국기 기독교 건국론의 스펙트럼에 대해서도 연구 발표했다.
김 박사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한경직과 동문수학한 사이이자 조국의 교회를 위해 동역하자고 작정한 盟友(맹우)였고 해방당시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던 김재준(1901-1986)은 건국의 방향성에 대해 선린형제단 강연록인 “기독교적 건국 이념”을 인용해 소개했다.
김 박사는 “그 글에서 김재준은 하나님나라를 모든 국가가 따라야 할 궁극의 원형이자 모범으로 제시해 민주주의는 물론 공산주의 역사 상대화시킨다.”며 “또한 김재준은 사회주의를 하나의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건국과 시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통전적이고 포괄적인 견해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서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감리교신학교 교수 출신이던 김창준(1890-1959)은 백성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물적, 경제적 토대를 먼저 구축하는 것이 예수를 바르게 따르는 길이라고 여겨 사회주의적 기독교를 주창했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대다수 교회가 민주주의 국가 수립을 희구하던 남한 사회에서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공산주의 정권인 북한을 선택해 월북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해방정국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품었던 건국신학의 진폭은 의외로 넓었다.”며 “한경직의 경우 교회로부터, 김재준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김창준은 민중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한경직과 김재준은 기독교가 근간이 된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건국론을 가지고 있었다.”며 “다만 김재준이 하나님 나라를 모든 국가가 지향할 궁극으로 이상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수립 자체를 목표로 삼은 한경직에 비해 보다 신학적으로 선명하게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김창준의 경우 농민이나 노동자들과 같은 무산계급을 향한 관심과 그들이 안심하며 살아갈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회주의적 방법론을 신학 안으로 수용하면서 기독교 사회주의를 표방한 건국론은 전개한다는 점에서 여타 기독교 기독교 지도자들과 확연히 구별된다.”고 분석했다.
김 박사는 한경직이 전도입국론을 통해 목회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해방을 맞아 기독교적 민족주의 국가 수립의 당위성을 설교해 남한 사회에서 민주주의 국가 수립의 기독교적 정당성을 제공했다.”며 “또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한 길이라 여겨 건국론을 선교론으로 치환해 교회와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이를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론을 창출하여 이후 세워지는 교회의 모범이 되었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을 새롭게 정립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교회성장을 위한 신학적 기틀을 마련했다.”며 “전도를 통한 건국운동은 필연적으로 민족복음화운동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한국교회는 1960년대 이후로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경험하게 된다.”고 밝혔다.
한경직의 전도입국론의 신학적 한계도 지적했다. 그는 ▶성경주해의 빈곤함 ▶낭만적인 인간론과 낙관적인 역사관 ▶민주주의 이해의 빈곤함 ▶공교회성의 약화 ▶곡해된 정교 분리의 원칙 ▶분단신학의 기능 등을 들었다.
김 박사는 “한경직은 민주주의가 성경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성경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만을 인정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뿐 아니라 인간이 창안해 낸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며 “더구나 교회가 많아짐으로 민주화가 촉진된다는 근거를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이어 “더욱이 최근 교회를 이탈하는 탈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교회를 가장 비민주적인 집단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라며 “이와 같이 대의민주제 정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현실은 지극히 모순적”이라고 밝혔다.
김 박사는 한경직의 전도입국론이 결과적으로 분단신학으로 기능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경직은 전도입국론이라는 방법을 통해 세워질 기독교적 민주주의야말로 장차 건국될 나라의 이상적 정체로 상정한다. 더욱이 공산주의를 ‘계시록의 붉은 용’으로 지목함으로서 신학적으로 실체화하여 공산주의와의 대화나 협력조차 단절시킨다. 오히려 십자군의 궐기를 촉구하면서 백색테러를 긍정함으로 말미암아 냉전의 결과인 분단체를 공고히 하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김 박사는 “한경직의 전도입국론은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이념에 종속되며 협소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장차 화해를 근간으로 한 통일을 지향하는 신학으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