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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한평우 칼럼]바울을 그리며(6)
로마에서 풀어놓는 한평우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
 
한평우 목사   기사입력  2020/02/19 [20:30]

    

사도바울은 지금 옥중에서 순교의 제물이 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망의 권세가 음흉한 표정으로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바울을 삼키려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상황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의 잘린 목사     © 한평우 목사

 

 

그래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관제란 제물을 드리고 마지막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제사의 마지막 순서를 뜻합니다. 그 후에 곧 불을 붙여 제물을 불사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었다

벌써 라고 하는 부사는 자신이 의도하는 시간보다 빠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꿈꾸지만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네 유언을 준비하라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아는 어느 분은 숨을 거두면서 원통하다고 단말마처럼 외쳤습니다. 어릴 때 넒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느티나무 밑에서 땅따먹기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말입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길 때마다 땅 바닥에 한 뼘씩 반원을 그려 상대방 영역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어느 때는 상대방의 영역을 거의 다 점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얼마나 기분이 좋은 지, 승리했다는 기쁨으로 의기양양하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열중하다보니 벌써 서산에 해가 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땅 따먹기에 열중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를 부르는 어머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말입니다. 그 때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내가 차지한 너른 영역의 땅을 뒤로하고 손을 털고 집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현 주소가 아닌가 합니다.

 

아무리 많은 일, 거창한 일을 이루어 기고만장한 결과를 이루었다 해도 주님께서 오라고 부르시는 순간 애써 모은 그 많은 것들을 그대로 놓고 아쉬워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도 주님께 가야합니다.

 

어느 교회의 중직으로 헌신하셨던 분을 압니다. 그 분은 한참 잘나가실 때 주님께서 오라는 부르심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한창 삶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는 어간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부르심을 연기해보려고 했습니다. 하다못해 예언하는 분들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고, 신유 은사가 있다는 분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효력을 보지 못하고 결국 부르심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발버둥치는 모습을 주님께서 보시고, “너는 이곳에 오기를 싫어하는구나! 하시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반응을 하기 보다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라면서 아름답게 작별을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지 하고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마무리는 결코 쉽지 않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고로 평소에 준비하여야 합니다.

 

언제 부르심을 받는 다해도 기쁨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신앙자세를 말입니다. 이런 삶이 참으로 멋있는 삶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을 살아갈 수 있는 영생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곡식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씨눈인 것처럼, 우리네 신앙에서도 제일 중요한 부분이 부활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즉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5;24).

 

오래전에 이집트에 갔다가 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그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투탕카멘의 부장품을 모아 놓은 곳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15세기의 인물로 모세와 비슷한 시기에 생존했던 왕입니다. 겨우 19살에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의 부장품들은 오늘날 사용하는 물품과 비슷한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종지에 담아놓은 두어 홉 정도 되는 밀알이었습니다. 그 밀알은 미라처럼 바짝 말랐지만 놀라운 것은 아직도 씨눈이 살아있다고 합니다.

 

그 밀알을 물에 불려 땅에 심으면 싹이 난다고 합니다. 3500년 전의 밀알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의 신비를 조금은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천오백 연전의 밀알이 오늘날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씨눈이 살았고 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붙어사는 놈이 있다

바다 속 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는 엄청난 태풍의 압력에서도 바위에 철저히 붙어서 떨어지지 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폐일언하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부활의 생명의 씨눈입니다. 그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요? 바울은 그 생명의 씨눈으로 인해 죽음의 순간에도 소망으로 충만했습니다. 삶의 여로에 지친 나그네가 고향의 동구 밖을 바라보면서 희열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 것처럼, 이런 행복감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수 없이 실패한 다해도 마지막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사도바울의 잘린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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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2/19 [20:30]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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