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갈렙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1951년 4월 19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미국 국회에서 행해진 자신의 은퇴 연설 중 군대 막사에서 불리워졌던 오래된 가요를 인용하여 “노장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갈렙이라는 인물은 어쩐지 그러한 노장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왜 그런 것일까?
가데스 바네아에서(민 13∼14장)
‘갈렙’ 하면 같이 떠오르는 인물이 ‘여호수아’이다. 두 사람은 무슨 듀엣처럼 주로 ‘여호수아와 갈렙’으로 불리워진다. 그렇게 된 사연은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선택하여 가나안 땅으로 보낸 민수기 13, 14장에 나오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3:26; 참고: 민 32:8; 신 1:19)에서 기인한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의 세대들에게는 ad와 bc를 갈라놓는 운명적 사건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러한 운명이 확정지어지기 전에 그러한 불운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위협을 무릅쓰고(민 14:10, 온 회중이 그들[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 하는 동시에) 믿음의 관점으로 상황을 보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했던 두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이 사건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하고 성막을 완성한 후 시내산을 출발하여 바야흐로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려는 때였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본적인 입문이 끝나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이었다. 갈렙은 여분네의 아들로서 유다 지파를 대표하여, 각 지파들을 대표한 다른 리더들과 함께 12명의 정탐꾼들 중의 하나였다. 물론 여호수아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그 12명이 똑같이 땅을 정탐하고 같은 것을 보고 관찰했으나 그 결과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12명 중 10명은,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분명했으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며 아낙 자손의 대장부들을 보았고, 자신들은 그들에 비해 메뚜기 같은 정도에 불과하며 능히 올라가서 그들을 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민 13:27∼29, 31∼33).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 땅을 주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그 땅 거민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은 이스라엘의 밥이라고 주장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능히 이길 것이라는 확신 하에 가나안 땅을 취하자라는 주장을 폈다(민 13:30; 14:6∼9).
인간적인 시각과 믿음의 시각은 이토록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적인 시각을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였으며, 하나님의 약속과 출애굽의 역사를 불신으로 보답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민 14:29∼35)는 심판을 내리신다. 갈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고 평가하신다. 출애굽 첫 세대 중 누구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궁극적으로 아론도, 미리암도, 그리고 모세조차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함께 갈렙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갈렙의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대한 ‘오직 믿음’ 때문이었다.
약속의 땅에서(수 14:6∼15; 15:13∼14) 모세오경을 떠나서 갈렙이 다시 등장하는 곳은 여호수아 14장에서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는 장면에서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여호수아 1∼11장까지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11:23b,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12∼21장에서는 ‘땅의 분배’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12장은 요단강을 중심으로(마치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을 나누듯 동서로 나눔) 요단 동편과 서편에서 점령된 왕들의 명단을 다루고 있고, 13장에서는 요단 동편 땅의 분배에 대한 기록을 다루고 있다. 14장에서는 땅의 분깃이 없는 레위 지파들에 대하여 언급한 후, 요단 서편의 땅, 즉 가나안 땅의 분배를 시작하려는 서두에 제일 먼저 그 땅을 분배받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자가 바로 갈렙이다. 저자가 갈렙을 먼저 기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갈렙과 같은 자만이 궁극적으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다. 즉 갈렙을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믿음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본문은 세 번씩 반복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수 14:8, 9, 14). 하나님께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인정하셨다(민 14:24; 32:12; 신 1: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표현은 갈렙에게만 주로 독특하게 사용되었는데, 딱 한 군데 다른 사람에게 사용된 경우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왕상 11:6)라는 구절에서이다.
이 구절은 두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는 갈렙의 믿음과 솔로몬의 믿음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갈렙은 온전한 믿음으로 땅을 차지했으나, 솔로몬은 瀏망?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을 기울게 하며, 나라가 갈라지게 하고, 급기야 땅을 빼앗기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둘째는 갈렙의 믿음과 다윗의 믿음이 동일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둘은 다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모범을 보여 줌으로 각각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다.
둘째로 갈렙은 그의 믿음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있다. 그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14:6b),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14:10a),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14:10b),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14:12a),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14:12b) 등의 표현으로 그가 땅을 요청하는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공을 세운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갈렙은 자신의 나이가 이제 85세임을 상기시키며, 하나님께서 기업의 약속을 주신 때부터 지금까지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14:10)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의 근거가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가 살아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제 그가 살아 있는 목적도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기 위함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는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믿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셋째로 그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수 14:10∼12). 갈렙은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읜湯?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14:11)이라는 말과 함께 노령에도 불구하고 땅의 정복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이러한 표현 뒤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으므로 하나님께서 필요한 강건함과 힘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건강에 의지하여 ‘그 나이에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인간적인 유치함의 발로가 아닌 그의 성숙한 신앙의 깊이가 바탕에 깔려 있는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85세 노장의 진면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도전이 되는 땅을 정복할 것을 요청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아낙 자손이 있는 성읍이었다.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10명의 정탐꾼들이 견고한 성읍과 아낙 자손이 있다고 하여 그들에 비해 자신들은 ‘대장부들 앞에 메뚜기 같다고 비교하며’(민 13:28, 33) 두려워했던 그 치욕스러운 과거에 대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회하고자 하는 과감한 믿음의 요청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아낙 자손들에게 마음이 녹아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원망함으로 40년 광야생활을 해야 했던 바로 ‘그때 그 사람들’을 이제 갈렙이 과업으로 떠맡겠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여기에서 ‘혹시’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실지 안하실지 몰라서 하는 불확실함에서 오는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미 승리까지도 확신하는(수 14:9,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갈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요구나 주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갈렙의 믿음의 깊이와 성숙함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넷째로 갈렙은 믿음의 보상을 받는다(수 14:13∼15). 여호수아는 갈렙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를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했다. 사실 헤브론은 후에 다윗이 처음으로 그의 왕권을 공인시킨 장소이며(삼하 2:1∼4), 또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킬 때 본거지로 사용한(삼하 15:7∼10)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는 유서 깊은 요새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이렇게 중요한 요새지인 헤브론이 갈렙의 기업이 된 것은 그가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것에 대한 보상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갈렙이 차지한 땅은 아낙 사람 중에서도 가장 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가장 도전이 되는 지역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수 14:15). 이것을 통하여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갈렙의 전투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 뛰어났기 때문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
본문은 또한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라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이 표현이 갈렙 스토리와 함께 나옴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갈렙의 일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믿음의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도전을 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갈씬?사라졌으나 노장의 믿음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남겨놓았다.
2.우리에게 주는 교훈
갈렙의 삶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첫째, 믿음은 우리에게 용기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여호수아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원리를 실감 있게 가르쳐 주는 좋은 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지하여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땅을 얻기 위해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용기 있는 행함이 따를 때에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귀한 교훈이다. 갈렙은 그런 믿음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노장의 몸으로 가장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아낙 자손이 사는 성읍을 요청했던 것이다. 물론 목숨을 건 전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은 ‘적당히 싸워도 하나님이 적당히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는 ‘적당주의’적인 믿음이 아닌 전쟁이라는 무서운 현실 속에서도 믿음이라는 더 큰 진실이 있기에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용기인 것이다. 때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왜 하나님께서는 대학 입학을 시켜 주시지 않는가?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며 그토록 간구했건만 왜 나만 직장에 취직이 안 되는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안 들어 주시는 것인가, 저것을 안 들어 주시는가? 등의 의문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당연한 의문이며 누구도 하나님이 아닌 이상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이런 여호수아서나 갈렙의 삶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현실이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은 돌팔매로 양 떼들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 번 무서운 야수들을 죽여 보았기 때문에 골리앗을 대적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고자 했던 것은 그의 믿음의 용기였다. 한번도 돌팔매를 사용해 보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믿음으로 나와보았자 그것은 비현실적인 엉뚱한 요행을 바라는 행위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가상하나 누가 보아도 현실성이 없는 행동들 말이다. 기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아무 때나 함부로, 그것도 요행을 바라는 어리석은 신자의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기 위해 사용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갈렙의 경우도 그는 초보가 아닌 노련한 병사다. 나이는 먹었어도 그는 여호수아와 계속 전쟁의 실전이 있는 자이다. 그러한 그가 어려운 현실 앞에 믿음의 용기를 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현실이라는 강적과 사투를 벌일 각오를 해야 한다. 즉,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현실을 능히 이기실 수 있는 분을 의지하여 이 전쟁을 치룬다는 것이다. 둘째, 믿음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에게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신 1:36)라고 약속하셨다. 여호수아서 본문에 따르면 그것은 45년 전의 일이었다. 갈렙은 85세의 나이까지 그 약속의 성취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45년 동안 기다린 셈이다!
우리는 흔히 10년이나 기도하며 간절히 기도했건만 아직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는 말을 한다. 10년 동안이라는 말에 숙연해진다. 얼마나 긴 세월의 믿음의 시련인가? 이제 갈렙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자. 46년 동안 기다렸다면 그때에 가서 ‘나도 상당히 기다렸노라.’라고 한 마디만 하자.
믿음은 인내 정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 날까지도 기다려야 하며, 죽은 후에라도 성취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을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these were all commended for their faith, yet none of them received what had been promised.)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들은 생전에 약속 받은 것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던 자들이다. 그만큼 믿음은 인내를 요구한다.
셋째, 믿음에는 보상이 따른다. 이것은 세속적인 원리가 아니라 지극히 성서적인 원리이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여호와께서 헤브론성을 분깃으로 갈렙에게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15:13). 사도 바울도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보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믿음의 상급은 사도 바울에게만 예비된 것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상급을 바라보며 주의 오시는 날까지 믿음의 노장의 본을 받아 살아가야겠다.
김윤희 기자는 미국 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명쾌한 논리와 언변으로 기독교방송(cbs)의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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