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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일본사역 이끄신 주님 감사합니다"
신현석 선교사(동경 야찌마다 그레이스교회 담임목사) 인터뷰
 
동경=김철영   기사입력  2015/04/21 [21:23]
▲ 신현석 목사     © 뉴스파워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기 이전에 한국인으로는 제1호 일본 유학생으로 일본 땅을 밟았던 신현석 목사(동경 야찌마다 그레이스교회 담임목사).     

그가 이 땅에 온 지 올해로 50년이 됐다. 올해 나이 82세,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현역 선교사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있고, 홈리스사역을 하고 있다. 매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교회 주보에 칼럼을 싣고 있다.   

신 목사는 21일 아침 동경 요도바시교회(미네노 다츠히로 목사)에서 열린 동경성시화운동본부(공동회장 이청길 목사, 오영석 장로) 조찬기도회를 마치고 조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그의 50년 사역 간증을 맑은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신 목사는 스물여덟의 나이인 1961년 계명대 음악부 제1회 학생으로 입학했다.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해 명예제대 했던 그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것은 그 때문이다. 1965년 2월, 졸업 후에는 이 대학의 조교로 채용됐다.     

그는 1964년 계명대 음악대학 학생들과 대구지역 교회들의 음악을 전공하는 청년들 33명으로 구성된 한국복음성가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와서 교회들을 방문해 연주회를 가졌다.   

이듬해인 1965년 12월 2일 계명대학 신태식 학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군위다찌 음악대학 음악부에 장학생으로 유학하기 위해 대구역에서 환송을 받았다. 당시는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은 미수교 상태였고 주일대표부만 있었다.한국에서는 대학생들이 한일수교를 반대하는 데모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일본 유학은 특별한 케이스였고, 일본 유학생 제1호가 되었다.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여권 신청을 세 번이나 했는데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여권 신청을 한 끝에 10개월 만에 유학생 비자 발급을 받았습니다. 권력의 힘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는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을 한 다음에 다시 배틀 타고 동경으로 왔다. 그리고 동경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복지병원과 교회를 설립해 경영하고 있던 김주봉 목사를 찾아갔다. 김 목사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와서 일본 성결교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목사가 된 인물이다.    

그는 이후 종합병원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있었고, 그의 아들은 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1964년에 한국복음성가단을 초청해 일본 공연을 주선해 주어 신 목사가 일본땅을 밟을 수 있게 해주었던 분이다.   

김주봉 목사는 신 목사를 자신의 병원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자신의 비서 겸 경비 등의 업무를 맡겨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신 목사는 그가 시무하는 선린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했다. 김 목사는 또 신 목사에게 동경 우에노예술대학, 군위다찌음악대학, 무사시노음악대학이 유명하다며 추천해 주었고, 군위다찌음악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에게 아주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어느 날 한국 예장통합 총회장을 지낸 경북 예천교회를 담임하던 김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자기 교회를 증축하려고 하는데, 김주봉 목사에게 건축헌금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그분이 선린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같이 기숙사에 자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다음날 자신이 유학했던 동경신학대학을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경대학 박사과정에서 객원교수로 연구하고 있으면서 함께 병원 아르바이트를 하던 박용현 교수가 밤 11시 쯤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당신은 음악을 공부하지 말고 목사가 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신 목사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계명대 음악대학에 입학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그는 박 교수가 신학을 공부할 것을 권하자 하나님도 자신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신가 생각을 했었다.   

“왜 내가 목사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박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하면서 동경신학대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동지사대학 신학부, 도쿄 청산(아오야마)학원 신학부, 동경신학대학 카탈로그를 가져왔다.    

“박 교수의 말을 듣고 교회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박용현 교수가 동경신학대학 카탈로그를 창문으로 던져주고 갔습니다. 예천교회 김 목사님도 동경신학대학교가 좋다고 적극 추천하면서 화요일에 인사하러 갈 때 나를 데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학교에 갔더니 방학 중이라 학생들은 없고, 한국 유학생 5~6명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학교에서 병원으로 전화로 연락해 내일 시험을 치러 오라고 했습니다.그래서 영어사전, 독어사전을 들고 학교에 가서 8과목 시험을 봤습니다. 나는 8과목 중 소논문에 특별히 힘을 기울였지요.”

신 목사는 면접도 성실하게 응했다. 결국 합격을 했고, 3학년 편입학했다. 학교에서는 4월 26일까지 등록을 하라고 했다.   

신 목사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말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고 목사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는알버츠 슈바이처 박사를 떠올렸다. 슈바이처 박사는 음악가이고 연주자이고 교수이고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했던 인물이다. 신 목사는 슈바이쳐 박사처럼 그렇게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경신학대 3학년에 편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학부와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한 6년 동안 가와사키 이인하 목사 밑에서 교회 사역을 했다. 그 이후 강도사가 되어 미국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나고야 옆에 위치한 기후교회에서 4년간 목회하다가, 시모노세끼교회에서 8년을 목회했다. 특히 최창화 목사의 요청으로 함께 인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나이 50에 오사카교회 김덕성 목사의 권유로 미국 프린스턴신학대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승만 목사의 안내로 조직신학을 3년 반 연구를 한 다음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3년 반 교회음악을 연구했어요. 그리고 필라델피아 페이스신학교로 옮겨서 목회학박사과정을 공부했습니다. 또한 남부 아틀란타 조지아 콜럼버스 교회에서 2년가 봉직했지요.”   

그는 다시 일본으로 1988년 5월 30일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 오빌린 대학 강사로 기독교학을 가르치면서 도쿄 글로리아교회를 개척했다. 2003년까지 사역을 하고 은퇴를 했다.   

신 목사는 은퇴 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야찌마다 그레이스교회를 개척해 사역하다 2008년에 설립예배를 드렸다. 교회 주보에는 일본인들을 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칼럼을 7년 째 써오고 있고, 이를 묶어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그는 또 총회신학교 교수를 겸하면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목회 사역과 홈리스사역을 감당해오고 있다. 또한 도쿄 와이즈맨 서비스클럽 채플린으로 사역하고 있다. 일본에 와이즈맨은 4000명이고, 본부와 지부들이 있는데 채플린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는 한 달에 두 번 가서 설교를 하고 있다.    

신 목사는 록번기 남성합창단의 초청 받아 단원이 되었다. 이 합창단에는 수상을 지낸 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배우 등 상류계급에 있는 분들이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원이 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한다. 한 달에 2만5천엔의 회비가 있는 데 신 목사에게는 회비를 내지 않아도 되게 배려해 주었다.

그는 지난 1월 15일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딴 공연에서 수녀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그의 왕성한 활동은 CGN TV에서도 소개가 되었다. 동경 요도바시교회 미네노 타츠히로교회 담임목사가 진행하는 인터뷰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다.   

“일본에 오래 살고 있으니까 일본교회도 보이고 한국교회도 보인다.”고 말하는

올해 82세의 현역 선교사 신현석 목사. 그는 일본에 선교하러 왔다면 선교사의 개념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가 가는 나라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최우선순위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일본 선교를 하려면 적극적으로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본에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적어도 6년간은 후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큰 교회들이 일본 선교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 줬으면 합니다. 단시간에 열매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다려 줘야 합니다.”   

신 목사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오는 7월 2일 평신도 전진대회에서 성악 2곡을 부르고, 15분간 간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 음악가의 꿈을 버리고 목사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음악적 재능을 계속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일본의 영혼들을 위해 쏟아붓고 싶어 하는 신현석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서 '영원한 현역'이라는 별칭을 붙여드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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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4/21 [21:23]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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