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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김명혁 목사(한복협 회장) 정읍 시내산교회 설교전문
 
김명혁   기사입력  2013/07/18 [09:09]
성경본문: 요3:16

제가 작년 6월 24일 정읍 행정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며 설교를 했는데 그동안 교회를 건축하고 지난 6월 1일 입당예배를 드린 정읍 시내산 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배승수 목사님과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인생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고 여러분들과 나눔의 시간을 가지게 되어서 아주 좋습니다. 인생의 모든 일은 만남과 나눔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배승수 목사님께서 지금 시내산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에 처음으로 나오시는 분들이라고 말해서 오늘 아침 아주 기본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라는 기본적인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우선 서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나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서 우리들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평생 부모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부모님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한 평생 살아가는데 우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친척들과 이웃들이 우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람들입니다. 학교의 선생님들과 우리 사회와 민족과 나라가 우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믿고 서로 고마워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또한 하늘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들은 하늘로부터 햇빛과 이슬과 단비와 흰 눈과 공기를 받아서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조상들이 “경천 애인”하면서 살아가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늘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하늘을 공경하면서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독교의 성경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셔서 존재하게 된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1: 27,28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면서 살아가고 부모님을 공경하면서 살아가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잠1:7-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결국 기독교인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부모님을 공경하면서 살아가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목사님으로 목회했는데 일본 시대에는 일본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감옥에서 고생하셨고 공산주의 시대에는 공산당들에게 붙잡혀서 감옥에서 고생하시다가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평양 사동탄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순교하시기 6년 전인 1944년 4월 15일 한국교회의 아버지의 한 분이신 최봉석 목사님이 평양에서 순교하셨고, 4월 21일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이신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저는 이와 같이 귀한 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신 평양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면서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11살 때인 1948년 8월 부모님을 북한 땅에 남겨두고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서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믿음의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지는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에게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어머니는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11살 때인 1948년 8월 부모님을 북한 땅에 남겨두고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서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함께 오던 어른들은 38선을 넘다가 모두 인민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저는 캄캄한 밤에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3,40 분 동안 달리고 달려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38선을 넘은 것도 아니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 38선을 넘은 것도 아니었고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38선을 넘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믿던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길선주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이 믿던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저는 38선을 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저는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믿게 된 하나님과 예수님을 평화의 사도 성 프랜시스도 믿었고 미국의 워싱턴 대통령과 린컨 대통령도 믿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1운동의 주역 이승훈 선생도 유관순 열사도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도 믿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도 믿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믿었고 지미 카터 대통령도 믿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믿었고 사랑의 봉사자 테레사 수녀도 믿었고 병자들의 친구 장기려 박사님도 믿었습니다. 사실 역사에 나타난 귀한 일들을 많이 한 인물들이 모두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미국의 조지 와싱턴 대통령과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미국과 미국 사람들을 위해서 귀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3.1운동의 주역 이승훈 선생님과 유관순 열사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 귀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 믿은 귀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 중에서 가장 귀중한 말씀 한 마디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요3:16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세계 곳곳을 다니시면서 자주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보다 더 놀랍고 더 귀중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일은 너무나 옳은 일이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망할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살인자도 간음 자도 귀신들린 자도 미친 자도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말이 제일 많이 나오는 성경은 요한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믿음이란 말이 90여 번이나 나오는데 그 중의 몇 말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사도 요한은 자기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우리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귀한 축복을 받고 귀한 일들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히11장에 길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4-26). 역사에 나타난 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을 잘 믿음으로 귀한 축복을 받고 귀한 일들을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귀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것과 귀중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잠 잘 것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지식도 능력도 필요합니다. 가정도 직업도 재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가장 귀중한 것은 한경직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그 중에서 기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가정과 교회에 필요한 것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인데 그 중에서 기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모든 불행과 비극은 불신과 미움과 절망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돈과 세상과 자신을 믿는 것이 문제이고, 하나님 대신 돈과 세상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이고, 하나님 대신 돈과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인 믿음, 사랑, 소망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인 ‘믿음’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고 의롭다 함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2: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2:8).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30).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이 지니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런데 교만한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복잡한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단순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간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니”(눅17:5) 우리들도 사도들처럼 이렇게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들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저와 여러분들이 겸손함과 단순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지니고 믿음을 더 하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인 믿음을 지니고 멋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과 의롭다 함의 축복을 가져다 주고 그리고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불교와 선도에 깊이 빠져 있었던 평양의 길선주 도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길선주 도사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길선주 도사가 변해서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평양의 깡패 두목 이기풍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이기풍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깡패 이기풍이 변해서 한국교회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고 제주도 복음화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함안군 칠원면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한 소년 손양원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그의 운명이 바뀌어 졌습니다. 전라남도 여수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나환자들의 어버이가 되었고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품은 한국교회의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주일학교 선생님들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11살 때 부모님과 동생들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8선을 넘은 그 사건은 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1살 때 하나님을 믿은 저의 믿음은 저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귀국 후 한 평생 동안 마음껏 목회와 교수와 선교와 구제와 연합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되고 행복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믿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믿음의 삶”이란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삶이란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회개는 믿음의 첫 걸음입니다. 회개는 믿음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도 회개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48).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다섯 교회를 향해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다섯 번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제일 먼저 전한 설교도 회개하라는 설교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2:38).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지에서 전하고 가르친 것도 회개와 믿음의 도리였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회개는 자기가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무릎 꿇고 항복하는 것인데 회개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회개 없이는 죄 사함도 구원도 성령도 천국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회개는 믿음의 첫 번째 입문입니다. 그런데 입문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회개는 한 번 크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말하고 참회는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한 번 돌이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와 참회를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밤 낮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윗의 뒤를 이어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평생토록 계속해서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표현하면서 자기 실패와 자기 멸시와 자기 비하의 표현들을 거리낌 없이 진솔하게 사용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18,19,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귀한 종으로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처절한 참회의 고백 때문에 성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도 사도 바울과 같은 참회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도 김치선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맨날 우시면서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사셨습니다.

믿음의 삶이란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회개와 참회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고 위선적인 믿음이고 거짓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철저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과 고집이 센 사람은 회개와 참회를 잘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시고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임라"(마5: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시100:2,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41:10).

믿음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염려와 불안과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 속에 들어갈 것을 잘 알면서도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관원들에게 붙잡혀 많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옥 중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사도 바울은 나중에 로마 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 되었지만 원망 불평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지니는 대신 평안과 여유로움과 감사와 기쁨을 지니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0-13).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믿음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살면서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한 평생을 달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과 담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한 평생 모험적인 일들을 즐기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11살 때인 1948년 8월 38선을 혼자서 넘은 일을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서울 중 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총신에서 공부한 다음 1962년 8월 단 돈 100불을 가지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2년 동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목회와 교수의 일을 했는데 주일 성수를 방해하는 군사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1977년 11월 20일 남산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서 하루 종일 그리고 밤새 심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심문하는 사람들을 충고한 일과 잠깐 쉬는 시간에 설교준비까지 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83년 7월 암스텔담 빌리 그래함 국제전도대회에 참석한 후 암스텔담 역에서 여권과 비행기 표와 여행자 수표가 든 가방을 도둑 맞고서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근심 걱정하지 않고 하루 만에 여권과 캐나다 및 미국 비자와 비행기표를 다시 만들어 뱅쿠버로 간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9년 1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비판하고 소신껏 행동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2005년 12월 굳게 닫힌 타직 국경과 아프간 국경을 캄캄한 밤에 뛰어넘어 아프간으로 가서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운 학교 준공식에 참석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삶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뚫고 나아가면서 모든 것을 하면서 사는 삶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또 부어주셔서 고난과 환난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어떤 일을 당해도 평안과 당당함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뚫고 나아가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리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믿음의 삶이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나타내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산상 설교를 하시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반드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나타내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갓임이요”(마5:7).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6:1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셔서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찌니라”(마18:22).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사도 바울은 믿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2-14). 야고보도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7,18).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참되고 순수한 믿음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성 프랜시스의 믿음과 손양원 목사님의 믿음과 한경직 목사님의 믿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이런 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인 죄인이지만 주님께서 지니셨던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니셨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조그만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라도 지니고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북한으로 중국 연변지역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가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조금씩 펴기도 했습니다.

제가 2007년 1월 3일 아침에 쓴 소원의 글과 2011년 3월 29일에 쓴 기도문을 여기 그대로 옮깁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의 모든 죄악을 주님의 피로 도말시켜 주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며 돌아보신 것처럼, 나도 작은 교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계속해서 펴게 하시고 그리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게 하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사도 바울과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서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본받아서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과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있는 곳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심고 분열과 갈등과 대결이 있는 곳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심는 작은 거름과 씨앗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를 하기 전에 주님이 지니셨던 긍휼의 눈물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품으셨던 사랑의 심장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지니셨던 죽음의 흔적을 지니게 하시옵소서!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와 순교자들이 흘린 충성의 피를 의지하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인자와 사랑을 의지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와 한국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북한동포들과 일본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2011.3.29)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죄 사함도 구원도 영생도 의롭다 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필요하고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주님께서 탄식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믿음을 지니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고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참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살아가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리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살아가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살아가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은 우리들이 지니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복잡한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단순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참 믿음을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겸손과 단순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순수한 믿음과 참 믿음을 지니고 날마다 회개하면서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리고 사랑하면서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주 믿는 사람 일어나”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정읍 시내산교회 설교(2013.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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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7/18 [09:09]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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